겨울 길목
십일월에 든 절기로는 초순에 입동이고 하순에 소설이다. 아직 겨울이라 이르기는 좀 이른 늦가을이다. 도심에서 개미 쳇바퀴 돌 듯 집에서 근무지로 오가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엊그제 주말 토요일은 용추계곡으로 들어 진례산성 동문 터를 넘어 대암산을 올라 만추를 장식한 야생화들을 보았다. 투구꽃, 누룩치, 구절초, 쑥부쟁이, 오이풀, 용담 등이었다.
이튿날 일요일은 창원중앙역에서 한림정으로 나갔다. 추수가 끝나가는 들녘엔 축산 사료로 쓸 볏짚더미들이 둥글게 뭉쳐져 있었다. 길섶에는 산간지역에 흔히 보는 산국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꽃길로 가꾼 듯 무성했다. 강변 둔치 술뫼생태공원에는 갈색으로 바래가는 물억새 허연 이삭은 은빛 물결로 일렁거렸다. 갈대로 한 몫 거들고 노란 감국도 그윽한 향기를 뿜었다.
그 이튿날 월요일 학교로 출근하니 교정의 천연잔디는 하루가 다르게 색이 바래갔다. 뒤뜰로 가니 주말 이틀 새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모과나무에선 열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예닐곱 개나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지난번 가을태풍 때도 떨어지지 않았던 모과가 고물이 차고 노랗게 익으니 절로 자유낙하를 했다. 교정의 여러 유실수 가운데 산수유와 함께 늦게까지 달린 열매였다.
일찍 출근하는 내가 가으내 아침을 여는 첫 일과는 마당비를 들고 낙엽을 쓰는 일이다. 내가 관리와 청소지도를 맡은 별마루와 급식소 주변은 면적이 제법 된다. 수령이 오래된 여러 그루 고목 벚나무는 조락한 낙엽이 시나브로 떨어졌다. 팔월 말부터 절간의 수행승처럼 대빗자루를 들고 마침마다 그 낙엽을 쓸고 있다. 주말을 지나면 수북한데 나목이 되다시피 해 쓸 낙엽이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지난 주중 수요일이다. 겨울의 문턱으로 든다는 입동 절기다. 절기는 입동이라지만 아직 겨울이라 붙이기는 이르다. 가을 끝자락 만추라 보면 된다. 우리 지역엔 서리는 내렸지 싶은데 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리려면 아직 멀었다. 때 이르게 날아온 미세먼지가 신경이 쓰인다. 전국적으로 시야가 흐리고 다른 곳에서는 하늘이 흐려져 비까지 살짝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 현관을 나섰다. 낮이 점차 짧아져 가니 해가 늦게 떠올랐다. 엊그제 월요일 아침엔 음력 구월 스무여드레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 눈썹달을 보면서 내가 알고 지내는 어느 시인은 조각달을 보고 부메랑이라 표현했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시인은 다양하게 재음미하였다. 그 시인의 눈에서는 그믐달이 인디언의 사냥도구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으니 입동인 주중 수요일은 음력으론 구월 그믐날이구나. 하늘에 엷은 구름이 끼기도 했지만 조각달이 걸릴 일도 아니었다. 아파트단지 벚나무에서도 뜰에 떨어지는 낙엽이 현저히 적어 경비원이 할 일이 그만큼 줄었지 싶다. 나는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반송소하천 보도를 따라 걸어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으로 향했다. 인적 드문 대학 구내를 빠져나갔다.
일직선 통로를 지나 산업인력공단 경남지사에서 다시 직각으로 교육단지로 꺾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자녀를 태워주기 위해 드나드는 학부모나 출근하는 교직원 차량은 다니질 않았다, 아스팔트 차도나 그 곁의 보도에 오가는 차량이나 보행자는 아무도 없었다. 벚나무 가로수는 일찍부터 가을을 접수하고 겨울을 날 채비를 마쳤다. 거의 나목이 되고 단풍잎은 몇 개만 달려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교정으로 드니 운동장 잔디는 하루가 다르게 갈색으로 바뀌어 갔다. 이른 시가이라 등교하는 학생이나 출근하는 동료는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다. 본관을 돌아 뒤뜰로 가니 산언덕 아래 늦게 핀 코스모스가 밝은 모습으로 맞아주었다. 그 곁의 보도블록에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낙엽이 뒹굴었다. 아침이면 내가 빗질을 하는 자리엔 간밤 떨어진 낙엽이 몇 장 되질 않았다. 18.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