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https://youtu.be/mQrQCqjjooY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로 요한계시록은 시작됩니다. 성경의 제목은 요한계시록인데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씀하는데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 표현일까요? 복음서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마태복음은 마태가 주인공이고 마가복음은 마가가 주인공일까요? 복음이신 예수님이 주인공이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단지 기록한 사람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지요. 계시를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요한은 예수님의 계시를 기록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을 보려하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요. 계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보아야 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목사나 사역자에게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특히 유명한 목사나, 독특한 카리스마나 지도력을 가진 목사를 마치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높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목사나 사역자가 훌륭해도 인간일 뿐입니다. 그가 가진 능력으로 어떤 일들은 행할 수 있겠지만 목사나 사역자가 나의 구원일 수 없고, 나의 참된 생명의 길일 수는 없지요. 우리가 만나야 하고, 우리가 들어야 하고, 우리가 봐야 하고,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 어떤 계시의 말씀이 기록되었던지 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예수님의 계시를 깨달아야 하는 거죠.
1절 중간에 보면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여러 경로가 거쳐지고 있지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그의 천사에게 명하셨고, 천사는 사도 요한에 알게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거기에서 멈췄겠습니까? 사도요한은 계시의 말씀과 내용을 기록해서 편지로 보냈고, 그 편지를 받은 교회의 지도자는 성도들 앞에서 낭독했을 것이고 그제서야 일반 성도들이 계시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직접 모든 성도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여러 경로들을 통해서 전달되게 하셨을까요?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무나 온전하게 거룩하고 모든 게 완벽하신 하나님을 죄와 허물투성이인 우리 인간이 직접 뵙거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도저히 감당 못할 수준이지요.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죽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너무 높은 사람이나 너무 완고하거나 껄끄러운 사람을 대할 때 좀 부담스러워서 중간에 다리 놓는 사람을 만들어 두지 않습니까? 그리고 같은 성경으로 세상 모든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읽겠지만 미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같은 한국이어도 서울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과 속초 사람에게 적용되는 게 다를 수 있지요. 또 같은 속초에 있는 교회라 해도 이 교회의 목사와 저 교회의 목사의 해석과 적용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저는 설교할 때에 속초갈릴리교회 성도라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설교합니다. 만일 제가 다른 교회를 염두에 두고 설교한다면 서로 교감이 잘 안되는 거죠. 그래서 속초갈릴리교회에는 저 같은 설교자가 필요한 거고 다른 교회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필요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 당시에 로마로부터 심한 박해를 당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위험한 성도들을 향해 주어진 계시이지요.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계셔서 고난당하는 그들에게 더 실제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었고, 또 계시를 기록하는 사도요한도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서 밧모섬이라는 곳에서 외롭게 유배생활을 하고 있어서 박해의 상황을 함께 겪어가면서 그의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여러 경로를 거쳐가는 것은 연약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끝으로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말씀하지요. 속히 일어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속히 일어날 일이기도 하지만 일어나야 할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내가 지금 질병에 걸려 아프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치료되고 회복되는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영원토록 아프기만 한다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지금 사도요한 시대의 성도들이 심한 박해 속에 시달리고 있지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앞으로 영원히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패배하신 상태로 있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박해가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사탄의 권세를 이기셔야 하고, 지금 당하는 박해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속히 일어날 일은 지금의 이 어둡고 힘든 현실을 제대로 된 현실, 바른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약속하는 소망이 담겨진 표현이지요.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속히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죄악과 부족함과 허물들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그 일들이 나에게서 속히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