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토박이도 아니고 서울도 송파 쪽에서만 지낸 터라 강북 쪽은 잘 모른다.
나이를 먹어 서울이란 곳에서 직장을 얻어 정신없이 살다가 조금 옆으로 눈을 돌려 본 것이 서울의 고궁이고 공원이 서울의 낭만적인 모습 전부였다.
어느 해 인지 기억은 흐리지만 아름다운 사연이 있는 길상사란 절이 있다고 들었다. 한 번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법정 스님이 작년에 입적 하면서 다시금 길상사란 이름이 생각났고 그 바램이 진해졌다.
모든 낮 설은 곳의 여행이 그렇듯이 샘터 잡지에서 만난 법정스님의 글이 전부였다. 대학교 다닐 때 보던 책이 내가 일고 있던 지식의 전부였을 터인데 이젠 좀 여유가 있으니,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길상사를 찾아간다.
우연찮게 가입한 카페에서 이종원 선생님과 동행으로 길상사를 가게 되었다. 속으로 내심 쾌재를 불렀다.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때 아닌 일정 변경으로 길상사를 가니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서울 성곽 길을 돌아 길상사에 이른다.
속세를 씻는다는 일주문을 지나본다. 맑고 향기롭게라는 글귀에 모든 마음이 풀어지고 도심의 공원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감로수병을 들고 있은 관음석상을 겨울 햇볕 따듯한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본다. 관음석상의 부드러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선생의 작품이다. 마리아 상을 닮았다는 섭입견이 있어 그런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게 만든다.
김영한님과 백석 작가의 이루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과 이 뜻을 이어받은 법정 스님의 의의로운 모습이 한 겨울 눈으로 덮여있는 길상사를 더운 운치 있게 만든다.
어려운 삶으로 김영한은 기생이 되었지만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졌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대원각을 차리게 된다. 김영한은 우연한 기회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접하게 되고 대원각을 기부한다. 법정 스님은 이 뜻을 10년 가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법정 스님은 김영한의 뜻을 받아 지금의 길상사가 생기게 되었다. “천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사랑한 김영한의 고결한 사랑과 무소유의 실천이 지금의 길상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길상헌을 끼고 돌아 청향당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솔길이 아닌데 오솔길 걷는 느낌이 든다. 눈 사이로 풍성하게 퍼져있는 산죽의 푸름이 더욱더 운치를 더해준다. 길산선원 쪽으로 빠져 나간다. 곳곳에 조용히 와 묵언이란 글귀가 많이 걸려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다져먹는다. 길상사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성곽 밑 성북동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게 만든다.
맑고 향기롭게 라는 도량으로 세상을 소박한 마음으로 널이 이롭게 한다는 길상사...
의의로운 사랑과 법정스님의 넓은 도량이 곳곳이 은은한 향기로 퍼져있는 곳...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 있는가
모두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법정 스님-
오늘도 법정스님의 글 한 구절을 마음에 품고 떠나본다. 모든 것이 이른 봄 아지랑이처럼 희미하지만 그 조차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고 싶다는 교훈을 얻고 돌아간다. 어린 시절 막연한 꿈을 안고 마음을 고쳐먹듯이 해지는 성북동 노을에 하루를 기억하며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한 가지 더…….
길상사를 빠져나와 좌측으로 한성대역 쪽으로 500미터 아래로 걷다보면 성북동 성당이 길옆에 위치해 있다. 전혀 낯설지 않은 성모마리아 상과 이국적인 형상의 아담한 성당에 발걸음을 잠시 멈춰본다. 비록 신자가 아니라도 고즈넉한 성당 한쪽의자에 몸을 기대어 인자하게 쳐다보는 성모마리아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즐겨본다.
막연한 어려움과 고단함이 밀려올 때 저택과 소박과 민가가 어우러져 있고 복닥거리는 시내와 한적한 성곽이 공존하는 성북동... 훌쩍 발걸음을 옮겨 심적인 외로움을 던져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돌아오면 어떨까 생각한다.
성북동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볼거리와 운치 있는 여행지가 많다. 따뜻한 봄날이 되면 성곽길 돌아 아름다운 사연이 절절히 흐르는 성북동을 여유 있게 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