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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루카 11,42-46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누구나 불효자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는 더워서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잤습니다.
장막 안으로 들어온 함이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는 밖에 있던 두 형제, 셈과 야펫에게 알렸습니다.
셈과 야펫은 함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겉옷으로 아버지의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노아가 잠에서 깨어 이 사실을 알고 함은 저주하고 셈과 야펫은 축복해 주었습니다.
왜 함은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불효입니다.
아버지가 벌거벗고 자는 것은 물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자녀는 수도 없이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을 잊었으니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의로움은 자신이 받을 것을 알고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100억을 빚져 갚을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빚을 지지 않은 척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채권자 앞에서 채무자가 빚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 앞에서 자기 힘으로 컸다고 말한다면 부모가 장하다고 칭찬해 주실까요?
자녀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약하디 약한 존재로 태어나고 성장하지만 그 받은 사랑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혼자 컸다고 말하면 그것이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빚을 진 것을 알면 채무자의 자세를 취하겠지만 채권자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채권자는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부모 앞에서도 채권자의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들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부모님은 시골집에 살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아는 의로운 사람이라면 자신보다는 부모의 영광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란 대목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공경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누구도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십일조는 잘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무관심하다고 꾸짖으십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의롭지도 못하고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보스톤 해변가에서 한 노인이 매일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비싼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준다고 그 노인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어뢰로 배가 격침되어 그와 그의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탔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부족으로 바다 위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매기 한 마리가 구명정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으로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갈매기는 희한하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그때 갈매기를 먹지 않았다면 탈진하여 구조되기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갈매기 한 마리가 없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과 친구들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라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대도 채권자의 자세로 산다면 그것이 의롭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그분 앞에서 불효자가 되는 길입니다.
항상 주님의 기도에서 내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42-46
정작 필요한 정결은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오래전부터 유다인들이 목숨 걸고 준수해오던 정결예식, 사실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거쳐오면서 감염병 예방을 위해 손을 잘 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정결 예식은 얼마나 극단적 형식주의로 치달았던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결 예식은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특히 자칭 거룩한 존재로 여겼던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을 다녀오면 죄인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집단 세심증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모습 앞에 율법의 주인이자 자유로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합니다.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던 정결례를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파기하십니다.
보란 듯이 손도 안 씻고 그냥 음식을 드십니다.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될 나병 환자의 손을 서슴없이 잡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정결은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 안에서도 작은 정결 예식의 순간이 있습니다.
입당 후 곧바로 이어지는 참회 예식의 순간, ‘제 탓이요.’를 세 번씩이나 외치는 그 순간이 어찌 보면 작은 정결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기 전, 사제는 복사가 가져다주는 물그릇에 손을 담그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작은 정결 예식을 행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돌아보니 정말이지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손 씻는 예식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가 제 삶 안에서 의식화되고 성취되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손 씻을 때 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겠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미사 안에 재현되는 파스카 신비를 제 삶 안에서 구체화시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미사 때마다 어제의 나를 죄와 종살이의 땅 이집트에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홍해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이자 구원의 땅 새로운 이스라엘로 넘어와야겠습니다.
기도나 묵상, 로사기오 기도나 각종 전례 행위 등 영적 의무를 실천하는 기회 때마다 매일 회개하고 순간순간 새로워져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끝없이 거듭나야겠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위선과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0. 16. 수)(루카 11,42-46)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2-44).”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1)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 무덤’은, 무덤이라는 표시가 없어서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지나다니는 무덤입니다.
무덤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되고, 반드시 정화 예식을 실행해야 합니다(민수 19,16).
표시가 없어서 모르고 접촉했더라도 부정하게 될까?
누구나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민수기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끝까지 모르고 있으면,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 부정을 벗기 위한 정화 예식을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지도자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그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활과
가르침을 따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데도 죄인 줄 모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등, 위선자들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옳은 가르침이라고 믿고 따랐다가 죄를 짓게 되었다면, 따른 쪽의 책임이 아니라, 잘못 가르친 쪽의 책임이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잘못 가르친 자의 책임이 훨씬 더 크고(마태 18,6-7), 모르고 따른 사람의 책임은 작지만, 그래도 죄는 죄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죄인 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해서 사람들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회칠한 무덤’이 상반되는 표현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선자들은 ‘생명력 없는 무덤과 같은 존재’이고,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같은 표현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는 말은, 남을 부정하게 하는, 즉 죄짓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속은 거룩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하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말입니다.>
2) ‘드러나지 않는 무덤’의 뜻을, “위선자라는 것을
남들도 모르고 자신도 모른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바로 그 점이 위선의 위험한 점입니다.
모르니까 고치지 않고,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어쩌면 자기가 도달한 곳이 ‘멸망’인 줄도 모르고
‘구원’이라고 생각하면서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사실 위선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즉 모든 신앙인이 언제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위선자가 되는 줄도 모르는 채로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3)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안 내도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잘 내면서” 라는 뜻입니다.
위선자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내면서 자기는 남들보다 더 봉헌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선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일’만 잘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하면서 실행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 남들이 볼 때에만 잘하고,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안 하는 것도 위선이고, 생색내기 좋은 일만 하고, 힘들기만 하고 생색내기가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 것도 위선입니다.>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은 예수님께서 십일조 제도 자체는 인정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헌금이었습니다(신명 14,29).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 6장에 있는 ‘불행 선언’을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6,26).>
46절의 ‘힘겨운 짐’은 일차적으로는 ‘율법 실천’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인생고’를 뜻합니다.
위선자들은 남들에게는 율법 실천을 강요하면서 자기 자신은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만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