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308〉
■ 봄비 (고정희, 1948~1991)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1987년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 지성사)
*그제 저녁부터 내린 봄비가 오늘 아침에도 계속될 기세라, 그간의 가뭄이 완전히 해갈될 듯합니다. 이전 도시에 있을 때 내리는 봄비는 낭만적으로 바라보았는데, 시골에서 흙을 밟으며 꽃과 함께 살다 보니 내리는 봄비가 더욱 반갑고 소중하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번에 흠뻑 내린 봄비는, 오랜 기간 메말랐던 땅이나 미세먼지와 황사, 매연 등으로 오염돼 있던 주변 곳곳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물오르는 식물들에겐 생명수 같은 단비가 되겠지요. 비록 한창 피어난 벚꽃이 봄비를 맞고 반쯤 떨어져 버린 아쉬움이 있지만, 주변의 산자락이 하루가 다르게 연초록의 숲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다소 팍팍하던 마음도 푸근해지는군요.
봄비를 노래한 이 詩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 봄비를 생명의 토대이자 원천으로서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기쁜 마음이 문장마다 드러나 있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이 詩에서는 또한 암울했던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위축되고 울분에 쌓인 젊은이들에게 봄비를 통해 닫힌 가슴을 활짝 열고 새로이 도전해 나가자며 용기를 북돋는 모습도 함께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이 詩를 천천히 읽으며 음미하면, 침체되거나 울적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생명의 싹을 틔우는 봄비가 전해주는 희망의 메세지가 가슴에서부터 힘차게 솟아나는 느낌을 받는 듯하군요.
그나저나 올해는 봄이 유난히 빨리 온 탓인지, 지금 내리는 봄비가 여름을 더욱 재촉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려.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