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포럼
기술 선진국의 길 ‘최초의 질문’으로 열자
(입력: 서울대총동창회보 544호/2023.07.15)
이정동 (자원공학86-90)
서울공대 협동과정 기술경영경제정책 전공 교수
베스트셀러 ‘축적의 시간’ 저자
국제 표준화 주도권 잡아야
“선배 세대가 냉장고에 쌓아놓은 걸 다음 세대가 파먹고만 있는 꼴이다. 사회 분 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절대로 한국에서 새로운 기술은 나올 수 없다.”
6월 28일 마포구 본회 장학빌딩에서 열린 수요특강에서 이정동 서울공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일갈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기술 발전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기술 진화의 원리를 연구하고, 우리 사회에 혁신기술이란 화두를 던진 베스트셀러 ‘축적의 시간’을 썼다. 한국 공학한림원에서 한국 산업기술사 70년을 집대성한 ‘한국 산업기술 발전사’ 집필에도 참여했다.
무려 5000페이지짜리 ‘한국 산업기술 발전사’의 큰 줄기를 추리면 세 단계로 요약된다. 선진기술을 가져와 배우는 ‘도입기술’ 시기, 선진기술의 원리를 이해하고 개선한 ‘개량기술’ 시기, 선진기술을 따라잡고 뛰어넘었던 ‘자체기술’ 시기. 치열한 기술 경쟁 국면에서 한국은 어떤 새로운 시기를 열어갈 것인가. “‘최초의 질문’이 필요한 때”라고 그는 말했다.
1970년대 ‘도입기술’ 시기, 눈대중과 귀동냥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어렵사리 선진 기술이 이 땅에 이식됐다. 기술의 원리는 채 알지 못하던 때다. 1980년대 들어 선진기술을 이해하고 더 낫게 변형도 하는 ‘개량기술’로 진일보한다. “이 때의 상징이 ‘한국형 냉장고, 한국형 VTR’ 입니다. 미국과 일본 냉장고를 갖다 놓고 베끼려니 미국 건 너무 크고, 일본 건 너무 작아서 중간을 만들고 싶은데 원리를 몰라요. 부품을 왜 이 압력으로 체결했는 지조차 해석하지 못 했죠. 당시 현장에서 ‘가방끈만 길다’고 기피하던 카이스트, 서울공대 대학원 졸업생들이 이 문제를 풀었어요. 그때부터 과학 교육을 받은 한국의 석박사 인력이 현장에 투입됐고, 한국형 냉장고와 VTR이 탄생했죠.”
2000년대엔 선진 기술 수준과 비슷한 수준을 넘어 능가하기까지 하는 ‘자체기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첨단 해양 플랜트와 자동차, 반도체, 휴대폰, FDA 승인 받은 신약, 인터넷 포털에 우주 발사체와 최첨단 4세대 이상 전투기까지 바닥부터 시작해 산업의 ‘풀 패키지’를 가진 몇 안 되는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설명. 그러나 이 동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채근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진기술이라는 답을 갖고 그것보다 더 잘 개발하려 했어요. 한 마디로 ‘뉴 투 코리아(New to Korea 한국에게만 새로운)’죠. 물론 답이 있다고 실천하기 쉬운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젠 선진기술이라는 모범 사례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해요. 우리가 벤치마크 되는 입장이 돼야죠.”
그래서 강조한 것이 ‘국제 표준’이다. 스마트폰은 물론 생수 한 병도 표준을 지키지 않고는 수출할 수 없기 때문에, “표준을 지배하는 자가 비즈니스의 질서를 정한다”. 표준의 위력을 아는 글로벌기업들은 자사의 기술을 표준으로 제안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ISO 상임이사국으로서 ‘절대 반지’ 같은 국제 표준화의 헤게모니를 쥐어왔다. 그런데 중국이 ISO 상임이사국에 가입함은 물론 주요 국제표준화기구인 ITU, IEC의 수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기적처럼 ISO 차기 회장에 조성환(기계공학80-84 현대 모비스 대표) 동문이 당선됐다.
“잘 모르셨죠? 한국인 최초로 국제표준화기구 수장을 배출했다는 건 한국 기술과 산업에서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에요. 그런데도 몰라주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지멘스, 퀄컴도 고급 임원을 국제표준화기구에 파견해 몇 십 년씩 보내게 합니다. 그들이 스몰 토크를 하면서 표준을 정하는 거예요. 중국 후보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표를 호소했는데 우리나라 산업부, 외교부는 관심이 없었어요. 표준을 정하는 데 참여하기보다, 정해지고 나서 더 빠르게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까요.”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앞선 이의 발 자국이 보이지 않는, 설원과 같은 ‘화이트 스페이스(White Space)’에 이르렀다. 흰 눈밭에 길을 내려면 국제 표준화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상배 MIT 교수의 사례를 들었다. 김 교수는 유압으로 로봇을 구동한다는 기존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기모터로 강한 힘을 내며 뛰고 움직이는 4족 로봇을 만들었다. “100이면 100명이 미쳤다고 하는데 손을 든 거죠. 우리나라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받고선 그러기 힘들지 않겠냐고 했더니, 자신도 한국에서 초중고 교 육 받았고 문제 없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손을 든다면, 작은 기회를 한 번만 달라’는 겁니다. 최초의 질문이 그렇게 중요해요. 최초의 질문은, 기존에 정답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게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자 비전이에요. 한국 사회에선 이 얘길 하기 참 어렵죠.”
질의응답 시간에 ‘인도의 기술이 중국을 앞서가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다. “수학 과학도 잘하지만, 더 무서운 게 있어요. 한 인도 학생이 석사논문 초안을 가져왔는데 앞장에 자기가 만든 모델이라고 ‘○○(학생 이름)'s 모델’이라 써온 겁니다. 대가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저도 ‘이정동's 모델’이란 말 안 쓰거든요. 혼을 내고 생각해보니 그 깡이 대단하다 싶어요. 지도교수에게 욕을 먹더라도 일단 ‘이정동's 모델’이라 질러 보는 힘이. 수업 시간에도 진행이 안 될 정도로 계속 질문하고요. 대구 사투리로 낯 두꺼운 걸 ‘뻔찌’라고 합니다. 그 ‘뻔찌’가 정말 두렵더군요.”
이왕이면 서울대가 앞장서 ‘최초의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국가미래전략원 과학과 기술의 미래 클러스터에서 그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과학기술 10개 분야별로 연구자들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동안 성취한 건 세상이 다 알테니, ‘몇 년 동안 골머리 썩였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더라’ 싶은 걸 얘기해 달라고요. 서울대가 출제한 ‘최초의 질문’ 10개를 연말쯤 공개할 계획입니다. 오랜만에 ‘서울대가 서울대 했구나’ 소리 듣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