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잠자리 물고기 외 2편
정재학
유치원에서 분양받은 백와달팽이. 처음에는 흙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아 밖으로 나갔나? 죽었나? 싶었던 작은 애기가 내 손바닥 절반만큼 컸다. 달팽이의 이름은 아들이 잠자리라고 지었다. 다섯 살 아이와 매일매일 잠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관찰한다. 아이가 달팽이는 더듬이에 눈이 있다고 말을 해준다. "많이 컸으니 라면에 넣어서 먹을까?" 했더니 아이가 눈을 못 뜰 정도로 울었다. 가끔은 취해서 늦게 들어온 밤에 잠자리에게 한참 말을 걸기도 한다. 잠자리야, 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네 집처럼 나도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인데. 등껍질이 아름답다고 자주 칭찬도 해준다. 내일은 달걀껍질을 먹여줘야지. 달팽이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고 하니 옆에서 아들이 "달팽이 사랑해요"로 쓰란다. 얼마 전 이름도 물고기로 바꿨다고 한다.
나비차원
나비가 꽃대를 기어올라
말랑말랑한 허공을 걸어간다
날개를 움직이지도 않고
빈 곳이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점점 날개가 커지는데
마음껏 걷고 있다
저 아래 땅바닥이 보이지만
그 아래 또하나의 땅바닥도 보인다
가볍게 겹쳐지는
나비차원
물고기 은행을 조심해라
은행 직원에게 그동안 정성스레 키운 물고기들을 주었다. 은행 직원은 언제 알을 깔지 알 수 없으나 예정대로라면 십 년 뒤에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 했다. 은행 직원 바로 뒤에는 파돗소리가 들리는 파란 우체통이 있었고 내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넣었다. 잡초들은 흙이 조금만 있어도 자라나듯 바다가 마르지 않을 테니 물고기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곳곳에서 바다가 오염되어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나는 은행 직원에게 내 물고기들을 돌려 달라고 했으나 이미 영해를 떠났고 배타적경제수역마저 벗어났다고 했다. 날이 갈수록 바다의 폐경기(閉經期)가 짙어졌다. 나는 물고기들에게 편지를 써서 은행 직원에게 주었으나 "이 편지는 전달되지 않을 테지만 시도는 해볼게요."라며 물이 넘치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주었다. 편지는 바로 찢어질 만큼 젖었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지만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고객님의 물고기들은 분명 안전할 겁니다." 다시 한번 강조했다. 며칠 후 은행은 커피전문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문학동내 / 2022)
정재학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가 있다.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