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과에 날씬하고 매력적인 신입사원이 발령 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후, 홍보과는 물론이고 인근 부서까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홍보과의 카피라이터 황충길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충길 씨는 금년 서른 아홉의 노총각이다. 남들은 벌써 장가가서 아들 딸 낳아 학부형이 될 나이에 아직도 총각이라니. 그렇다고 해서 눈이 기린처럼 높은 것도 아니고, 어딘지 모르게 신체적인 흠이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컴퓨터 실력에다 영어도 잘하며 또한 그가 뽑아낸 카피는 지하에 있는 괴테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뿐인가. 인간성도 좋아 홍보과에는 그가 사는 술을 안 먹어본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이고 아무리 바빠도 남이 특근이나 야근을 하면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끓일 줄 아는, 의리에 죽고 못사는 사람이다.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기에 여태 장가를 못들었지’하고 구태여 흠을 잡는다면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6, 7년 전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꽤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충길 씨는 이번에 장가를 가지 못한다면 사십을 넘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영 총각 귀신을 면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그래서 며칠을 작심한 끝에 남대문 시장에 가서 멋진 가발을 샀다. 과연 설운도나 이덕화가 「형님!」하고 인사를 할 정도로 그에게 딱 들어맞는 가발이었다. 소문대로 그녀는 수려한 용모에 날씬한 몸매, 거기다가 인상이 탁 트인게 성격까지 썩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자리 또한 황충길 씨 옆으로 배정되었기 때문에 노총각 황충길 씨를 구원하기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닌가 할 정도로 모든 것은 잘 진행되었다.
어느 일요일, 황충길 씨는 그녀와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다. 사내에 등산동호회가 조직되어 한 달에 한번씩 등산을 가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회원들의 인파에 휩싸여 서울 근교에 있는 조그만 산을 오르며 황충길 씨와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를 때는 손목을 잡아주기도 하였다. 마치 개미가 단물을 찾아가듯 그녀는 일말의 거부도 없이 황충길 씨에게 끌려 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황충길 씨는 내친 김에 아예 프로포즈까지 하고 말겠다는 기세였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등산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멋진 프로포즈를 할 생각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보니 마음이 좀 급해졌던 모양이었다. 좀 전에 서비스로 갖다 준걸 미처 보지 못한 채, 종업원을 향해 여기, “모듬회 좀 더 가져다줘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녹색의 앞치마를 두른 여종업원은 “벌써 갖다 드렸잖아요. 젊은 사람이 너무 밝히면 대머리 까진다구요. 생긴 것은 그렇게 안생겼는데 너무 밝히시네”하고 핀잔을 하면서 황충길 씨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이 때 장난기가 발동하였는지 영업과의 송과장이
“이봐요, 아가씨. 그렇게 생겼는지 안생겼는지 어떻게 알아요. 한번 확인을 좀 해봐야지. 대머리인지 아닌지”
약간의 취기 때문인지 좌중에 있던 사람들도 여기저기에서 ‘옳소, 옳소. 한번 확인해봐’하고 떠들어댔다. 황충길 씨가 대머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키들키들 웃어댔고, 아무 영문도 모르는 그녀만이 꿀먹은 벙어리인 채 주위를 돌아볼 뿐이었다. 헌데 종업원도 느닷없이 장난기가 발동하였는지 행주와 가위를 식탁 위에 놓은 채 황충길 씨의 이마를 만지려고 하였다.
순간 종업원의 손길을 피하려고 옥신각신하다가 황충길 씨의 가발이 훌떡 벗겨져서 식탁 위로 툭 떨어졌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황충길 씨는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분노를 누를 길이 없어 가발을 집어들자마자 죄없는 식탁을 뒤집어엎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동안 깔깔대고 웃던 직원들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그동안 얼마나 기다려온 기회였는데 이렇게 허위로 돌아가다니…’하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대머리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아버렸으니 장가고 뭐고 다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황충길 씨는 맨 뒷좌석에 혼자 앉아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녀와 함께 달콤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던 황충길 씨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일행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차창으로 몸을 기댄 채 부아를 식히고 있던 황충길 씨의 눈이 번쩍 떠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여덟 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오늘도 만나려나 그리워지네…”
빨간 등산모를 삐딱하게 눌러쓴 그녀가 황충길 씨를 바라보며 경쾌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첫댓글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일부러 내 얼굴을 바꾸지는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