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글쓰기책쓰기 - (215) 자의식의 힘 - ① 나를 마주하는 글쓰기/ EBS 프로듀스 김민태

[화룡이(이창모)]

자의식의 힘

네이버 블로그 - Zㅣ-존 주니/ [나를 마주하는 글쓰기] #4 닭, 말, 기러기 그 어디쯤 ​

① 나를 마주하는 글쓰기

소설가 김영하가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는 용서한다’로 시작하는 글을 쓰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글을 첫 문장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학생들에게 맡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실은 침묵에 잠겼고 연필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이때 김영하는 학생들이 정말 자기 경험에 몰입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30분이 지나자, 갑자기 한 학생이 울면서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덩달아 슬픔을 못 이기고 뒤따라 나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단 몇 분의 글쓰기로 자신의 기억과 마주했다. 글이 가진 놀라운 힘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복잡한 감정을 언어라는 논리로 풀어낼 때 어두운 기억은 환한 세상으로 나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더 단단해지는 거죠.”

김영하는 이것을 글쓰기가 가진 ‘자기 해방의 힘’이라고 말한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일을 증언한다.

“저는 학생들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쓰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넘어서야만 저 반대편 심장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긴 글을 쓰면서 느꼈던 감정, 내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고조되었다가 어느새 정리되는 기분도 이와 비슷했다. 더러는 눈가가 뜨거워지기도 했다. 이것은 일하며 업무 메일을 보내거나 보고서를 쓰면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왜 그전에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었을까. 그동안 써온 글이 얼마인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한마디로 그동안 ‘재미없는 글만 써왔기 때문’이다. 그 글들은 내가 선택해 쓴 글도 아니었고, 내 관심사와도 먼 글이었다.

☆ 똑같은 시간, 다른 기억을 가진 글쓰기

내 인생에서 글을 가장 많이 썼던 때는 대학 시절이다. 학기마다 적어도 두세 편씩의 리포트를 과제로 제출해야 했고, 학기 시험도 대부분 장문의 글쓰기였기에 매달 한 편 정도의 글을 썼다. 그러나 신기하리만큼 글쓰기에 대해 기억나는 ‘장면’이 없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까마득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반증되는, 당시 글쓰기의 몇몇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1994년 〈월간 말〉 100호 특집에 내가 쓴 글이 실린 일이 있다. 나는 가을의 그날 아침을 비교적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같이 자취하던 후배가 나를 급히 깨웠다. 이 잡지를 즐겨보던 후배가 여느 때처럼 신간을 사서 읽다가 내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손바닥만 하게 실린 독자투고 글을 후배는 용케도 찾아냈다. 당시 나는 입대 영장을 받고 쓸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복권이 당첨된 것처럼 기쁜 시간을 보냈다. 그 해를 통털어 손꼽을 만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또 다른 기억은 1999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시와 일기, 그 어느 중간이 되는 형식의 글을 이따금 썼다. 연애의 영향이 컸다. 당시 문구점에서 흔하게 팔던 장정판 일기장에 온갖 멋을 부리면서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모두 이미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들이다. 그런데도 사진처럼 뚜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많다. 반면 학교에서 학과 과정 중에 쓴 글들과 당시의 상황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뿌옇게 흐려진 기억과 선명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 이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왜 교실 문을 넘어간 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걸까?

택사스대학교의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Pennebaker) 교수는 글쓰기가 가진 잠재적 영향력은 상상 그 이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글쓰기의 자기표현 기능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글쓰기는 정서 회복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고 문제해결력을 높입니다.”

경험에 대해 내 생각과 의견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자발적 선택의 수준이 높다. 물론 일기와 같이 자기서사적 글쓰기를 숙제로 내주고 심지어 그것을 누군가 확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흔치 않은 일일뿐더러 이런 경우 진정한 의미의 자기표현적 글쓰기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때만이 나의 삶이 제대로 녹아들어갈 수 있다.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해내야만 진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으며 글쓰기의 진정한 경험을 할 수 있다. < ‘일단 오늘 한 줄 써봅시다, 평범한 일상을 바꾸는 아주 쉽고 단순한 하루 3분 습관(김민태, 비즈니스북스,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2.2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