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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로마 이름으로는 베누스(Venus), 영어 식으로는 비너스라고 불린다.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은 거품이라는 단어 ‘아프로스(aphros)’와 유래를 나타내는 여성 접미사 ‘디테(dite)’가 합쳐져 ‘거품에서 태어난 여자’라는 뜻이다. 이는 여신의 탄생 설화와 관련되는데, 크게 두 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먼저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와 바다의 요정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반면 헤시오도스는 [신통기] 에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지자 그 주위에서 거품이 일며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비너스가 태어난 순간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이므로 두 시인의 주장은 커다란 시간 차이를 보인다. 공통점은 오로지 아프로디테가 그 이름대로 바다 거품 속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후 여신을 태운 조개는 바람에 실려 키프로스 해변가로 밀려왔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작품은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 작자미상 [돌고래 위의 에로스와 "카피톨리엄 양식"의 아프로디테] BC 331년 |
화면 왼쪽에 꽃의 님프 클로리스를 안은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여신과 조개를 해변으로 밀어주고 있다. 마침내 육지에 도착한 아프로디테는 다소 무표정에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왼손과 머리카락으로 아랫부분을 살포시 가리고 있는데, 이 자세는 고대의 아프로디테 조각상에서 유래한 포즈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 즉 순결하고 정숙한 비너스를 뜻한다. 오른쪽에서 화려하게 수 놓인 망토를 들고 황급히 여신을 맞는 이는 계절의 신 호라이 중 한 명인 봄의 여신으로 추정된다. 보티첼리가 묘사한 부분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라 그 다음 장면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망토를 두른 아프로디테는 뭍으로 올라와 발을 내딛고, 그 순간 그녀의 발 밑으로 풀들이 자라난다. 아마도 아름다움과 사랑이 지닌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정신적 사랑, 쾌락적 사랑의 비너스
아름다움과 사랑, 그리고 생명력의 관계는 사실상 불가분의 관계다. 이는 여신 아프로디테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어머니 없이 우라노스(의 성기)가 직접 낳은 아프로디테는 ‘우라니아(Urania, 천상의)’라 부르고 제우스와 디오네가 낳은 아프로디테는 ‘판데모스(pandemos, 세속적)’라고 부른다며 이 여신의 특성을 둘로 구분한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사랑을, 세속적인 아프로디테는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쾌락적인 사랑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티치아노 [성스런 사랑과 세속적 사랑] 1514년
캔버스에 유채, 118cmx279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시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이 세속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정신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을 이해하고 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베셀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가 그린 [성스런 사랑과 세속적 사랑]을 보자. 여기서 두 여인은 각각 어떤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까? 화려한 옷과 장신구는 꾸미는 아름다움, 사랑을 뜻한다. 순수한 아름다움, 고귀한 사랑은 이러한 허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상의 아름다움과 쾌락은 오로지 천상의 아름다움과 영적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다.
따라서 미술가들이 아프로디테를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묘사해야 함은 당연지사였다. 여신의 흠잡을 데 없는 외면은 곧 천상의 아름다움, 사랑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탓에 아름다움을 가꾸는 여신, 일명 [비너스의 화장]이라는 주제가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17, 18세기 동안 발전하기도 했다. 주로 방금 목욕을 마친 여신이 눈부신 나신을 뽐내며 거울을 보면서 치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아름다운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격을 드러낸다기 보다는 사실상 유혹적인 여성 누드 재현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했다.
프랑스 화파 [화장하는 비너스] 1550년경 | 프랑수아 부셰 [비너스의 화장] 1751년 |
가령 루이 15세의 궁정 화가였던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가 1751년에 그린 [비너스의 화장]에는 왕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과 꼭 닮은 여인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상징하는 진주 장식과 비둘기, 푸토(putto, 아기 천사)들과 함께 등장한다.
19세기 서양 미술에서 여성의 누드는 최고의 인기 주제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실제 여성이 아닌 여신의 이름으로만 가능했다. 1863년 파리 살롱전에서 나폴레옹 3세의 극찬을 받으며 1등을 거머쥔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은 여신이기에 감히 허락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취향의 누드화를 보여준다 (참고로 마네의 [올랭피아]는 여신의 누드가 아닌 현실의 창녀를 그렸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넘실대는 파도와 흰 포말 위에 갓 태어난 아프로디테가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위로 올린 채 비스듬히 누워 있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결정체인 여신의 도자기 빛 나신 위로 사랑스런 푸토들이 날아 다닌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cmx225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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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세속적인 아름다움과 묘하게 신적인 아름다움이 뒤섞여 있는 카바넬의 비너스는 이후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William Adolphe Bouguereau)와 앙리 제르벡스(Henri Gervex)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들이 그린 미(美)와 사랑의 여신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보티첼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비너스 푸디카’ 포즈를 취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고혹적인 몸매를 과감히 드러낸 여신이 과연 당대의 관람자들로 하여금 더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했을까?
아마도 19세기 사람들은 아프로디테의 미덕을 다른 부분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원래 동방에서 유래된 이 여신의 책무가 풍요와 다산, 즉 자연스러운 성(性)의 추구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이처럼 [비너스의 탄생]은 시대를 불문하고 여러 미술가들에 의해 반복 재생되었다. 물론 각 시대마다 또 작가마다 묘사하는 방식이나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지기는 했다.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의 탄생]과 19세기 후반 [비너스의 탄생]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여기에 한 작품 더 보태서 야수파 운동에 가담했던 프랑스의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가 보티첼리를 모사한 20세기의 [비너스의 탄생]도 비교해서 감상할 만 하다.
아름다움과 사랑, 그야말로 영원한 인류 공통의 관심사가 아닌가? 게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갖가지 사랑 이야기라니, [비너스의 탄생] 이외에도 아프로디테 신화가 일찍이 수많은 미술가와 대중들로부터 작품의 주제로 환영 받아 온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한번 돌이켜보자.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비너스, 그 아름다움과 사랑은 과연 어떤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지. 정신적인 사랑, 내적인 아름다움을 우러렀던 고대인들로부터 세속적이고 외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기울었던 19세기를 거쳐, 오늘날 우리의 부등호는 이후로 계속 한쪽으로만 열려 있는 듯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