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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문보기 글쓴이: make it fast
팔카오, '잉글랜드 요크셔 혈통'… 증조부가 셀비 출신
태어난 순간부터, 라다멜 팔카오는 축구 선수가 될 운명이었다. 1982 월드 컵을 제패한 브라질의 위대한 영웅(파울루 호베르투 파우캉, Paulo Roberto Falcao)의 이름을 땄고, 선수 출신 아버지를 둔 팔카오는 뷰티풀 게임, 축구로 뛰어들었다.
부친인 라다멜 가르시아가 선수 생활 황혼기를 바쁘게 보냈기 때문에, 유년 시절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왔다갔다하며 보냈다. 어린 팔카오는 언제나 구경을 하고 있었다; 관찰하고, 따라하고, 배우면서 말이다.
라다멜 1세의 영향은 막대했다. 수비수였던 그는 팔카오에게 자신을 상대하는 방식, 즉 공격을 가르쳤고, 형성기의 아들을 헌신, 희생, 프로 의식으로 지도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데뷔골을 자축하고 있는 라다멜 팔카오 - 그는 축구 선수가 될 운명이었다
팔카오 1세와 콜롬비아의 전설, 카를로스 발데라마 - 팔카오 1세 또한 프로 축구 선수였다
팔카오(맨 윗줄, 좌측에서 다섯째)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되기 전 보고타 유소년 팀에서 뛰었다
라다멜 1세는 아들의 선수 생활을 책임졌고 심지어 첫 프로 계약 - 주급 50파운드였다 - 을 맺기도 하였으며, 팔카오는 13세의 나이로 콜롬비아 2부 리그에서 데뷔했다 - 여전히 남아 있는 '최연소 선수' 기록이다.
이후 팔카오는 세계에서 가장 득점력 있는 공격수 중 하나로 성장했고, 이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럽 축구계 정상 복귀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데뷔한 지 15년째인 그는 정점에 올라섰다. 이적 시장 마감일 루이 판 할 감독은 그를 신체적으로 격렬하고, 빠른 템포의 프리미어 리그로 오라고 구슬렸다. 팔카오 인생의 최대 시험대지만,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북부에 신장개업한 술집에서, 라다멜 사장은 아들이 올드 트래포드에서 성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공개했다.
팔카오의 가족은 잉글랜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콜롬비아에서조차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상세한 혈통이 궁금하다.
"나는 잉글랜드 혈통이 자랑스럽다," 라 쿠에바 델 티그레(호랑이 굴) 술집에서 라다멜 1세가 팔을 뻗어 자신의 핏줄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 할아버지도 잉글랜드인이었고, 운동 선수였다."
그의 동업자인 대니얼은 이 발언을 듣고 즐겁다는 양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유는 알기 쉽다. 아들처럼, 라다멜 1세도 산타 마르타 출신이다. 콜롬비아의 영웅, 카를로스 발데라마가 태어난 카리브해 연안의 도시다. 그의 메스티조 피부는 거칠어졌고, 북부 연안 지방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표현을 썼다.
몇 가지 영여 단어를 더듬거리던 그는 포기하고 요크셔 출신의 젊은이가 대전 사이 기간에 콜롬비아로 이주해, 현지 여성과 사랑에 빠져 5명의 아이를 낳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데니스가 팔카오의 할머니다.
수십 년 후, 이러한 잉글랜드 혈통 때문에 라다멜 1세는 리베르 플레이트와 계약 체결 직전이었던 10대 팔카오의 여권 신청을 위해 영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팔카오는 아마 13살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 여권은 유럽 진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대사관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거부당했다," 라다멜 1세의 발언이다.
증조부 조지 킹은 팔카오의 영국 시민권 획득에 있어서는 가르시아 족보에서 너무 먼 인물이었다. 그렇게 팔카오의 잉글랜드 대표팀 승선 기회는 사라졌다.
1932년 노스 요크셔의의 소규모 마을이자 셀비 북부에서 몇 마일 떨어진 번(Burn) 시에서, 20대 중반의 한 청년과 임산부였던 부인은 남미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짐을 꾸렸다.
조지는 콜롬비아 북부 지방에서 회계사 자리를 맡게 되었다. 1920년대 1차 세계 대전과 경제적 불안감을 안고 자란 젊은 부부에게는, 대공황으로 신음하던 유럽을 떠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직후, 부인이 출산과 동시에 사망하는 비극이 조지를 덮쳤다. 유럽은 다시 전쟁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지는 남아서 일에 모든 힘을 바치기로 선택했다.
미국인이 소유한 유나이티드 연합 과일 상회(United Fruit Company, 이하 UFC) 자회사에 추업한 조지는 주요 인사였지만, 그의 고용주들은 당시 콜롬비아 최대 추문 중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요크셔 출신 조지가 이주한 지 4년이 지난 1928년 말, 조지가 출근하던 바나나 농장의 파업 참가 노동자들은 노예 수준의 근무환경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UFC의 압박으로, 정부는 군대를 투입했다. 일요일이라 시위자들은 교회를 가는 사람들과 뒤섞였고, 군대는 주 광장의 출구를 봉쇄하고 발포했다. 아무도 몇 명이 사망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일각에서는 2000명까지 추정하고 있다.
조지는 아내를 잃은 뒤 콜롬비아 출신의 훌리아나와 사랑에 빠졌고, 그는 5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잭, 로이, 카를로스, 텔마, 데니스 - 팔카오의 할머니였다.
또 누가 있나? 잉글랜드와 관계가 있는 외국인 스타
개러스 베일
레알 마드리드의 스타인 베일은 작년에 이렇게 발언한 바 있다: "내 외할머니가 잉글랜드인이다. 그러나 나는 웨일즈인이다. 간단한 문제다."
팀 케이힐
시드니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잉글랜드인. 에버턴 소속이었던 그는 호주 대표 선수로 75경기를 소화했다.
엑토르 쿠페르(Hector Cuper)
쿠퍼(Cooper) 성을 가진 잉글랜드인 선조의 후손. 수비수인 쿠페르는 아르헨티나 대표 선수로 뛰었고 발렌시아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감독이었다.
호르헤 '조지' 로블레도(Jorge 'George' Robledo)
칠레 출생. 잉글랜드인 모친의 성은 올리버였다. 1940년대, 1950년대 뉴캐슬 및 반슬리 소속.
쥐세페 윌슨
이탈리아의 수비수였던 그는 달링턴에서, 잉글랜드인 철강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70년대 라치오 소속으로 296경기에 출전했다.
P.S. 앙드레 빌라즈-보아쉬는 앞으로 잉글랜드 국가 대표팀 감독직을 원할지도 모른다 - 그의 모친이 스톡포트 출신이다.
80대의 데니스는 지금도 팔카오가 태어난 도시에 살고 있고, 자신의 부친 조지가 '천천히 대화하는 침착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으며, 존경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킹이 증손자(라다멜 팔카오)와 달리,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UFC 시설 내에서 정기적으로 골프를 친 예리한 골퍼였다고 한다.
1960년, 프루테라 세비야 자회사는 파산했고 킹은 회사의 파산 당시 금융정리 책임자였다.
팔카오의 성장 | |||
란세로스 보야카 | 1999-2001 | 8경기 | 1골 |
리베르 플레이트 | 2001-2009 | 90경기 | 34골 |
FC 포르투 | 2009-2011 | 51경기 | 41골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2011-2013 | 68경기 | 52골 |
AS 모나코 | 2013 | 20경기 | 11골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임대) | 2014- | 4경기 | 1골 |
리그 경기만 합산 | |||
콜롬비아 | 2007- | 54경기 | 21골 |
"회사는 그에게 해결할 자금을 제공했는데, 퇴근 중 돈을 훔친 사람이 그를 살해했다," 데니스의 회상이다. 요크셔 출신 킹의 남미 생활 28년의 비극적 결말이었다.
현재 라다멜 1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들의 유년 시절은 부친의 축구 경력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버지의 선수 생활 때문에 몇 달마다 이사를 해야 했던 팔카오는 매우 빠르게 강인해져야 했다.
"산타 마르타에 살 때, 경기장은 돌멩이로 가득했다. 종종 걸려 넘어지거나 발 끝으로 돌을 차서 피를 흘리면서 집에 오던 팔카오가 기억난다. 그래도 그냥 무시하고 계속 뛰곤 했다," 라다멜 1세의 회상이다.
더 체격이 큰 아이들과 뛰고 고통을 무시한 일이 팔카오 유년의 주제였다. 아마 그 경험이 리베르 플레이트와 AS 모나코에서 당한 세 차례의 심각한 무릎 부상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5세의 팔카오는 가족의 베네수엘라행으로 인해 친구들과 작별했다. 어린 팔카오에게, 이제 축구의 경쟁자가 생기게 된 적도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 중 하나가 얼굴에 공을 던져서 코에 피를 흘리면서 오던 게 기억난다," 라다멜 1세의 발언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놀릴 수 없도록 내게 베네수엘라의 국민 스포츠, 야구를 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그래서, 바로 그날 밤, 우리는 배트와 배트와 공을 들고 연습을 시작했다."
이후 팔카오는 팀에 들어갔고, 잠재력이 깊은 인상을 받은 그의 코치는 라다멜 1세에게 계속 야구를 시킬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라다멜은 점잖게 팔카오를 축구로 돌려보냈고 1995년 가족이 콜롬비아로 돌아갈 당시, 유소년 팔카오는 이미 축구를 진지하게 시작한 참이었다. 보고타의 양대 산맥 산타 페와 미요나리오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치른 팔카오는 라다멜 1세의 보호 아래로 들어갔고, 그는 당시 라 가이타나의 유소년 코치였다.
훈련장에서, 라다멜 1세는 옛 동료이자 아르헨티나 출신인 실바노 에스핀돌라와 마주쳤고, 기독교 신앙과 스포츠를 결합한 학교를 창립했었다.
"경기에서 챔피언이 되려면, 경기장 밖에서도 챔피언이어야 한다"가 페어 플레이 학교(Fair Play)의 표어였다. 공과 교회의 가르침을 섞은 것이다.
에스핀돌라는 공격수를 물색 중이었고 팔카오에게 입단 테스트를 제의햇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는 팔카오의 실력을 확신했고,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로 팔카오 수준의 재능은 본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 "이 아이는 괴물이다," 에스핀돌라의 말이었다. "우리는 진정 신이 내린 재능(real phenomenon)을 책임지게 되었다."
가르시아 가족의 상황은 어려웠었고 라다멜 1세는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택시를 몰았다. 팔카오는 종종 훈련장까지 갈 버스 요금이 없었고, 대신 도시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차를 얻어 타야 했다. "경기일에는 택시를 찾곤 했다," 라다멜 1세의 발언이다.
실바노는 팔카오의 페어 플레이 학교 입학을 설득했다. "여기서는 단순히 축구만 배우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장담이었다. 그는 또 라다멜 1세에게 코치직을 제의했고 팔카오의 누나들인 멜라니와 미첼의 교회학교에 입학시켰다.
교회의 도덕적 교육은 팔카오가 1990년대 파우스티노 아스피리야 같은 콜롬비아의 황금세대 선수들을 둘러싼 추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게 되었다. "마라도나를 봐라," 라다멜 1세가 아들 팔카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는 했다. "그의 길을 걷지 마라. 절대 남과 싸우지 말고, 사람들에 대해 악담하지 마라."
자신의 우상 마라도나의 10번을 입은 팔카오의 선수 생활은 도약을 시작했다. 1997년 그는 56득점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했고, '적기가 아니다'라는 부친의 말에 따라 20만 달러의 아약스 이적을 거절한 뒤 마침내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에스핀돌라는 콜롬비아 2부 리그 팀에 들어갔고, 라다멜 1세를 수석코치로, 에르난 파체코를 코치로 대동한 그는 팔카오에게 첫 선발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팔카오의 영웅은 보카 주니오로스의 공격수, 마르틴 팔레르모였고,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1경기 3PK 실축을 한 바 있다," 파체코의 회상이다. "팔카오는 그와 비슷하게 이발을 하곤 했고, 기를 쓰고 그를 따라하려고 했다. 본연의 플레이 스타일은, 즉 팔카오의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1999년 8월 29일 팔카오는 역사를 썼다. "실바노와 에르난은 페레이라와의 경기가 있기 며칠 전부터 팔카오 기용을 합의한 상태였다. 그는 20분이 남았을 때 투입되었는데, 들어가자마자 혼이 났다. 모두가 움찔했지만, 그는 바로 일어나서 경기를 계속했다," 라다멜 1세의 발언이다. 산타 마르타의 바위투성이 경기장의 효과였다.
"그 이후, BBC가 그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기에 수업 중에 나왔던 게 기억난다," 유년 시절 친구의 회상이다. 7경기 후, 그리고 2000년 엘 코도르를 상대로 14세였던 그는 프로로서 첫 득점을 기록한 뒤, 다시 한 번 콜롬비아와 헤어지게 되었다. 당초 그는 아르헨티나 팀 벨레스 사스필드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선수 소유권 관련 분쟁으로 인해 협상이 결렬되었다. 대신 팔카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숙적, 리베르 플레이트에 입단했다.
그것이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를 거쳐 결국 올드 트래포드로 그를 이끈 경력의 시발점이었다. 28세의 그는 콜롬비아 역대 최다 득점자 아르놀도 이과란의 25득점을 제치기까지 단 6골을 남겨 두고 있다. 엘 티그레(호랑이), 팔카오의 현 별명처럼, 5년 전 유럽에 입성하기 전까지 그는 100골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완성된 공격수 중 하나라는 명성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이제 그의 경력에서 정말로 중요한 단계다. 언제나 내가 품은 큰 소망이었고, 우리 두 사람의 꿈이 실현되었다," 라다멜 1세가 환하게 웃었다.
증조부 조지도 분명 공감하고 있을 감정이다.
P.S.
출처: Mail (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2794356/radamel-falcao-s-blood-makes-proud-yorkshire-roots-man-united-dream-come-true-says-dad.html)
번역: make it fast
첫댓글 흥미롭네요. 요크셔테리어도 영국개인가
개들 이름에 지방이나 나라이름 붙는건 거기가 원산지라는거에용
팔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