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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버마전(캄보디아 정복전)[War006] 1595년 4월11일 네팔, 선전포고. 시암, 캄보디아 버마편으로 참전 1595년 5월24일 페논방 점령[캄보디아 영토] 1595년 6월16~18일 다카 전투[시암] 1595년 6월23~26일 북 타이만 해전[캄보디아](패배) 1595년 7월 1~6일 캄보디아 전투 1595년 7월29일~8월 1일 갠지스강 하구 해전(패배) 1595년 8월 9일 캄보디아 점령[캄보디아 영토] 1595년 9월15일 네팔왕립군, 방콕 상륙 1595년 9월22일 북 타이만 해전[캄보디아](패배) 1595년10월23일 Lanchang 점령[캄보디아 영토] 캄보디아 합병 1595년11월 3일 방콕 점령[시암 수도] 시암 비정규2사단 Chan ta bun에서 전향. 종전(조건 없음)
참전 전사 생존 |
1595년 네팔 왕실은 인도차이나 반도 정복을 천명했다.
인접국인 버마에 선전포고를 해 주력이 버마로 진격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네팔의 대군은 캄보디아의 페논방에 상륙하였다. 버마군은 당황하였고, 그 사이 네팔 왕립군의 방콕 상륙 작전으로 시암의 수도 마저 점령당하는 사태마저 벌어지고 만다.
버마군의 주력이 네팔과의 접경 지대에 있는 상황이라 네팔의 움직임을 막을 군대는 존재 하지 않았다. 시암군이 수도 수복을 내려오고 있었지만, 그 사이 캄보디아의 합병을 선포하고 버마와의 협상에 들어가 합병을 인정 받음으로써 네팔군은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캄보디아를 합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근 10만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크메르 출신의 시암 비정규 2사단이 네팔군의 크메르 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네팔에 투항 함으로써 시암은 체면을 더 구기게 된다. |
1595년 11월의 네팔강역도
제1차 안남전[War007]
1597년 8월14일 네팔, 선전포고. 중국이 안남편으로 참전 1597년 8월24일 4,5,7군 톈진 상륙 1597년10월 6일 톈진 점령 1597년11월18일~1월10일 1~5차 베이징 전투 1598년 1월20일 톈진 상실[중국 수복] 1598년 3월10일 베이징 점령[중국의 수도] 1598년 3월27일 종전(중국의 위신실추,전쟁 배상금 지불)
참전 전사 생존 --------------------------------------------------------------- 1598년 7월 23일 세율 20%,교육,치안 예산 최대 --------------------------------------------------------------- 루앙프라방전[War008]
1598년10월22일 네팔,선전포고
1599년 5월17일 네팔 왕립 사관 학교 설립
1599년 5월17~19일 안남 전투 참전 전사 생존 --------------------------------------------------------------- 1601년 1월 11일 군 개편 왕립군+5군 체재 1607년 5월 4일 비정규1사단 Korat 봉기 1607년12월 1일 네팔, 선전포고. 안남편으로 중국 참전 참전 전사 생존 --------------------------------------------------------------- |
버마와의 전쟁으로 군자금을 거의 소진해버린 네팔 정부는 궁리 끝에 안남과의 전면전을 선포했고, 중국이 안남에 지원군을 보내기 위해 수도를 비운사이 텐진을 점령하고,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그 결과 한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누적 전사자:382718명 --------------------------------------------------------------- 네팔 왕실은 종전 이후 넘쳐나는 자금의 사용처를 고민하다가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 폭동의 위험이 있음을 알게되고 세율 인하, 교육,치안 예산 확대를 통해 유화책을 펼치게 된다. --------------------------------------------------------------- 캄보디아를 정복한지 아직 3년밖에 지나지 않은 1598년 네팔 왕실은 또 다시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1년 3개월 후 루앙프라방을 병탄했다. 이로 인해 또 10만의 젊은 이의 피가 흘렀으니....
누적 전사자:482662 --------------------------------------------------------------- 네팔군은 창설 이후 첫 개편을 하게 되었고 5만(5개 사단)을 1군으로 하는 군 개념을 채택하였다. 다만, 왕립군 만은 예외로 규정 했다. 그로부터 1년 4개월 후 크메르 인들을 징집하면서 5개 군이 추가 창설 된다. 한편 네팔 왕실은 왕립 박물관을 개장하는데... --------------------------------------------------------------- 다시 재정 위기가 닥친 네팔. 또다시 배상금 전쟁을 벌였고, 전쟁을 위해 또 덧없는 젊은이들이 쓰러져 갔다. 이로 인해 국내 반전여론은 점점 커져갔다.
누적 전사자:566121 --------------------------------------------------------------- B01 통상파괴선의 배치로 네팔 최초 전투 함대가 창설 되었다. --------------------------------------------------------------- 네팔 왕실은 또다시 22만의 라오스 인을 징집하는데... |
1617년의 네팔강역도
제1차 중국전(안남 합병 전쟁)[War010]
1617년 2월27일 네팔, 선전포고. 안남, 중국 편으로 참전. 참전 전사 생존 |
네팔 정부가 점령한지 불과 16년 밖에 되지 않은 라오스 인들을 징집한 것은 안남 합병을 위한 소모품으로 쓰기 위해서 였다. 네팔 왕실은 바로 전에 정복한 피지배 민족을 다음 전쟁에 사용하는 지독한 왕실이었다.
1617년 2월 봄이 찾아오는 겨울 막바지에 네팔은 중국에 선전포고 했고, 3군 15만이 공격했으나, 실은 이쪽은 주공이 아니었다. 나머지 36만의 군세가 안남으로 진격했고, 구 루앙프라방과 캄보디아에 인접한 상당수 지역이 먼저 점령된 후 동해안으로 몰아쳐 나갔다.
개전 9개월 새로운 겨울이 다가오는 11월에 전쟁은 안남의 합병과 중국의 전쟁 배상금 지불로 끝났다. 그러나 그 사이 죽은 군인은 무려 32만에 달했다.
네팔 정부는 32만이라는 사상 초유의 전사자에 조의를 표했으며 종전일인 11월 27일을 전사 군인을 기리는 날로 제정했다. 그리고 국립 묘지를 건설 할 것임을 공표했다.
그러나 32만의 전사자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니... 앞으로 얼마의 생명이 더 사그라들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적 전사자(1601~):407891 누적 전사자: 890553 |
1619년 네팔강역도
첫댓글 네팔이... 다시금 연방을 이루어나갈때가 멀지않은...[퍽퍼퍼퍽]
연방이 아니라 제국으로 달리는...
역시 호이 네팔보다 쉬워보이는....퍼퍽
글쎄요 처음에 비정규 사단으로 시작한다는 건 아시는지?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말말말말말말말말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말머리~ 마아아아아알머리~~~ 담부터는 말머리 꼬옥 ^^ Presto Oc #4 G16B16A8 B16A16B8 Oc #5 C16D16G8 E16A16B8 3번 반복 Oc #6 C16D16G8 2번 반복 Oc #7 C16C16C16C16C16C16C16C16C16C16 Oc #6 B16A8 Oc #4 G16B16A8 B16A16B8 B16A16D8 3번 반복 Oc #8 B1-Tie-B1 A8 G8 (작사 : 청색세계, 작곡 : OTL군)
다음부터는 말머리 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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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너무 딱딱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