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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태조1335년 10월 11일 (양력 11월 4일)-
전갈자리:부인 2명 .4남 1녀
항상 발란스를 맞추려고 함. 통찰력이 있다
정종 1357년 7월 1일 (양력 7월 26일)-
사자자리:부인 10명. 17남 8녀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없 는 조치였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사냥과 격구, 연회,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냄
태종 1367년 5월 16일 (양력 6월 21일) -쌍둥이자리:부인: 10명12남 17녀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예종은 19세에 즉위했으나 세조 비 윤씨가 수렴청정하고, 신숙주ㆍ구치관(具致寬) 등이 원상으로서 서정을 의결하여 왕권은 약화된 시기였다.
성종 1457년 7월 30일 (양력 8월 28일):처녀자리-부인 12명 자녀16남 12녀
학문을 좋아하였고 인재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연산군 1476년 11월 7일 (양력 12월 2일): 사수좌-부인 4명 자녀 4남 2녀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국조보감 國朝寶鑑≫·≪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도 있슴
중종 1488년 3월 5일 (양력 3월 26일):양자리-부인 12명 자녀 9남 11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치세 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相助)정신을 고취시켰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명종 1534년 5월 22일 (양력 7월 13일):게자리-부인 7명 자녀 1남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숙종 1661년 8월 15일 (양력 9월 8일)-처녀자리,부인 9명 자녀 6남 2녀
현종의 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현종 때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다.왕의 치세 기간 신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 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종 1688년 10월 28일 (양력 11월 20일)-전갈자리:부인2명 자녀없슴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이다
세자 때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었으며, 재위 4년 동안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쳤다.
영조 1694년 9월 13일 (양력 10월 31일)-전갈자리:부인 6명 자녀 2남 7녀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조 1752년 9월 22일 (양력 10월 28일)-전갈자리: 부인 5명 자녀 2남 2녀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
순조 1790년 6월 18일 (양력 7월 29일)-사자자리:부인 2명 자녀 1남 5녀
김조순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헌종 1827년 7월 18일 (양력 9월 8일)-처녀자리:부인 4명, 자녀1녀
8세에 즉위하여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며 많은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고, 천주교인의 적발 방법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적용하였다. 친정(親政) 이후에도 삼정(三政)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가 가중되었다. 후사는 없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철종 1831년 6월 17일 (양력 7월 25일)-사자자리:부인 8명 자녀5남 1녀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고종 1852년 7월 25일 (양력 9월 8일)-처녀자리:부인 7명, 자녀 6남 1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전갈5 태조 세조 경종 정조 영조
처녀4 성종 숙종 헌종 고종
사수4 문종 연산군 선조 인조
사자4 정종 단종 순조 철종
쌍둥이2 태종 광해군
양2 중종 순종
물고기2 인종 현종
게2 명종 효종
황소 세종
물병 예종
전갈자리 지분 ㄷㄷ
그리고 태조 세조 정조 영조 다들 넘나 쎈캐들이시고요..
별자리별 성격 1도 안믿었는데 어느정도 신빙성있는거같소..
별자리보니 다들 오오..싶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