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마을숲 생태조사 (5) 성라산 지렁산
고조선부터 사람들 찾았던 유서깊은 숲
지금도 덕양 주민들이 가장 즐겨 찾아
국사봉 지렁산 정상 고인돌군 훼손, 방치
너무 많은 진입로와 샛길 "정비 필요"
섬처럼 살아남았지만 개발 위협 계속돼
성라산과 지렁산은 낮고 완만해 치마를 입고 걷는 시민들도 자주 눈에 띈다.
[고양신문] 원당과 화정 사이에 자리한 성라산은 덕양의 주산으로, 청동기시대 이래 수천 년간 고양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유서 깊은 마을숲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성라산(星羅山)은 “산 위에 별이 비단처럼 펼쳐져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별라산, 별아산 또는 배라산으로도 불렸다. 이 중 배라산은 성사동의 자연촌락 마을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성사천과 성사동이라는 지명 또한 성라산 정상에 올라서면 별이 모래처럼 많이 보인다 해서 성사(星沙)라 불렀다 하니, 도시화 이전에 이곳이 대단한 '별천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달 9일과 28일, 성라산과 지렁산에 대한 전문가‧시민 생태조사가 두 차례 진행됐다. 원당역에서 출발해 성라산 국사봉을 지나 지렁산까지는 해발 100m 안팎의 야트막한 마을숲 세 개가 이어진다. 이 구간은 원당역에서 화정동, 행신동, 강매동을 거쳐 행주동까지 숲과 하천, 마을, 논밭길을 잇는 행주누리길(11.9㎞)의 일부다.
성황당 있던 국사봉 돌더미 수북
성라산의 최고봉은 국사봉(해발 109.4m)이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국사봉이란 산 이름은 43개로 봉화산 다음으로 많다. 봉화대가 많았던 나라여서 봉화산이 많은 건 알겠는데, 국사봉이 많은 이유가 뭘까.
국사봉 정상 부근에 쌓인 돌더미. 국사봉은 국사당이 있는 산을 뜻한다.
성라산 탐방로 옆에 덩그라니 남겨진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
국사봉은 한자로 國師峰, 國士峰, 國思峰으로 제각각 쓰고 있는데, 국사봉이란 이름이 붙은 산에는 예외 없이 국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국사당(國師堂)이란 마을 사람들이 돌더미를 쌓아놓고 금줄 걸고 치성을 드리는 서낭당을 일컫는다. 즉 국사봉은 ‘국사당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서낭산‧선황산 등의 산 이름도 같은 유래에서 나온 것이다. ‘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의 한자 이름은 무속신앙과 관련된 산 이름이 나중에 유교 이념이 담긴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와 해방 후 정치권력이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서낭당을 불도저로 밀기 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높은 고개나 산봉우리에서는 성황당과 돌더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성라산 국사봉에 세워진 ‘성황당과 돌더미’란 표지판에도 이런 설명이 적혀 있다.
국사봉 탐방로에는 고양시의 대표적 선사유적인 고인돌군이 남아있다. 군부대가 차지해 접근할 수 없는 정상 부근에는 장사바위와 오줌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 아래 작은 바위들이 많이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청동기시대 후기 고인돌로 추정된다고 한다. 가까운 파주 교하와 월롱면에서도 유사한 고인돌군이 확인된 바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장사바위와 오줌바위는 국사봉 아래에서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장수가 태어났는데 어찌나 힘이 셌던지 국사봉 바위에 오줌을 누니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가 어른이 되면 나라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며 날개를 불살라버렸고 아기장수는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한다.
산과 강, 비옥한 땅이 갖춰진 국사봉 부근에서는 고조선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다. 2010년 국사봉 고인돌군에서 동쪽으로 1㎞ 떨어진 도내동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후기 주거지와 마제석검 등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바 있다.
성라산 참나무숲은 많은 덕양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참나무숲에 나타난 ‘도토리 도둑’
원당역 쪽 들머리에 올라서니 인공 조림한 리기다소나무와 아까시나무가 줄지어 탐방객을 반겼다. 참나무류는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와 손톱으로 누르면 쑥 들어갈 만큼 나무껍질이 폭신한 굴참나무 여러 그루가 보였는데, 다양한 모양의 도토리를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도토리는 겨울철 야생동물의 먹이로 귀하게 쓰일 텐데 자루에 가득 줍는 사람들이 있어 탐방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탐방객 중 누군가 “아무리 도토리 채취금지라고 써 붙여 놓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싹쓸이 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라며 안타까워했다. 밤나무도 제법 많이 보이는데 알맹이는 안보이고 빈 밤송이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덕양산과 마찬가지로 성라산에도 애기나리와 남산제비꽃 군락지가 보이는데, 애기나리는 한군데 모여 있고 남산제비꽃은 10m 이상 줄지어 있어 꽃 피는 봄을 기대하게 했다.
산초나무 줄기에 새똥 모양의 호랑나비 애벌레가 붙어있다.
운향과 식물 특유의 향기 때문에 잎을 떼어 얼굴에 한두 개 붙이면 모기들을 쫓아준다는 산초나무들이 탐방로 양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새똥을 닮은 약 2㎝ 크기의 호랑나비 애벌레가 줄기에 붙어있었다.
김경숙 도란도반 대표는 “호랑나비는 산초나무의 번식을 돕고, 산초나무 잎을 먹이로 취하는 생태계의 공생관계”라며 “호랑나비 애벌레는 포식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새똥과 같은 색으로 위장하고 자신의 허물을 먹어 치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호랑나비 애벌레는 다섯 번 허물을 벗는데 모양이 모두 달라 ‘변신의 귀재’로 불린다”고 덧붙였다.
산철쭉과 진달래도 흔하게 보였다. 꽃이 없으면 알아보기 어려운 진달래는 잔가지가 곡선으로 구부러진 느낌을 준다. 진달래는 독성이 약해 화전이나 술(두견주)을 담그기도 하는데, 술을 담글 때나 전을 부칠 때 꽃밥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임철호 숲해설가가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는 활엽수의 맹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잎과 꽃의 모양, 열매가 익어가는 시기까지 비슷해서 구분이 쉽지 않은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를 성라산에서 모두 만날 수 있는데 가장 쉬운 구분 포인트는 잎의 감촉이다. 들꿩이 좋아한다고 해서 들꿩나무라 불리다가 덜꿩나무가 된 이 나무는 잎에 성상모가 빽빽해 우단을 만지듯 촉감이 부드럽다. 이에 반해 하얀 꽃봉오리가 마치 까마귀가 먹는 쌀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은 가막살나무는 잎이 매우 까칠하다. 동그란 빨간 열매의 빛깔이 아름답기로는 두 나무가 앞을 다툰다.
이 밖에도 수피가 미끈한 팥배나무와 우산을 펴서 층층이 쌓아놓은 것 같은 층층나무, 동그스름한 잎이 귀여운 물오리나무,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며 산의 주인공 행세를 하는 누리장나무 등 성라산, 지렁산에서는 식물 43과 81종이 관찰됐다. 또 곤충은 제비나방, 갈색날개노린재, 점박이불나방애벌레 등 13과 15종, 거미류는 무당거미, 긴호랑거미 등 2과 4종이 관찰됐다.
박평수 사회적 협동조합 한강 고양지부장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샛길을 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맨발걷기 성지가 된 지렁산
성라산과 지렁산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덕양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다. 하지만 이용객이 많은 만큼 진입로와 탐방로가 지나치게 많아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작은 숲이 몸살을 앓고 있다. 나무 계단이 놓인 공식 탐방로 옆에 두세 개의 샛길은 기본이고 많게는 대여섯 개의 샛길이 나 있었다. 박평수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고양지부장은 “샛길이 너무 많아 식물이 제대로 자라기 어렵고 동물도 은신처가 줄어 숲생태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탐방로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성라산과 지렁산 사이 밭길 너머로 북한산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성라산에서 내려와 작은 숲을 지나면 지렁산 들머리까지 작은 마을길과 논길이 이어진다. 지렁산 입구에서는 백운대를 비롯한 북한산 30여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보면, 북한산의 산줄기가 성라산과 화정, 행신을 거쳐 한강 앞까지 이어져 있다. 하지만 도시화가 진행된 지금은 옛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도시의 산은 통로조차 없이 완벽하게 고립된 섬으로 남겨졌다.
개발의 삽날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지렁산은 요즘 유행하는 어싱(맨발걷기)의 성지가 됐다. 정상 부근에 군부대가 철거된 자리에 황토 물웅덩이가 조성되면서 맨발로 땅의 기운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줄잇고 있다.
탐방객들이 지렁산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산세가 야트막하고 구불구불해서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지렁산에서 내려서면 ‘꽃우물’ 화정이다. 화정(花井)은 꽃과 찬우물로 유명한 자연촌락 화수(花水)와 냉정(冷井)에서 한 자씩 따 붙인 마을 이름이다.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게 마을 뒤에 국사봉과 지렁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성사천과 기름진 논밭이 있어 살기 좋은 마을이었는데 1990년대 대규모 택지개발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성라피크닉장 아래는 2008년부터 4년간 고양시에서 태어난 ‘고양둥이’의 출생을 기념해 심은 벚나무들이 자라서 봄이면 아이들과 함께 꽃놀이 나온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지역 명소가 됐다.
지렁산 정상 부근에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표지판이 없다면 걸터앉아 쉬어가기 좋은 너럭바위처럼 보인다. 원래는 훨씬 많았는데 인근 골프장과 군부대 건설 때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렁산과 성라산은 다행히 창릉신도시 개발 예정지에서 살짝 비켜나 있지만 서울문산고속도로 건설과 같이 산을 훼손하는 개발계획이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몰라 늘 위태로운 상태다.
서울문산고속도로가 성라산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다.
그 많던 다람쥐는 어디로 갔을까
도시로 둘러싸인 성라산과 지렁산은 다른 산줄기와 연결성이 없고, 진입로와 등산로가 많아 생물다양성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성라산에서 가장 흔한 포유류는 청설모다. 탐방로 주변에서만 잠깐 사이에 무려 10마리 이상이 관찰됐다.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다람쥐도 많았는데 산에 고양이가 많아지면서 다람쥐는 거의 사라졌고 새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먹이자원은 비슷하지만, 청설모는 주로 나무 위에서 살고, 다람쥐는 땅 위에서 서식한다는 점이 다르다. 청설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먹이 경쟁자인 다람쥐가 고양이의 공격으로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렁산에서 관찰된 때까치.
9월 산에서는 어린새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데, 성라산에서는 어린새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이는 새의 알을 먹기 좋아하는 청설모가 조류의 번식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원 조류 조사원(삼육대 동물자원과학과 3)은 “성라산의 고양이들은 직접 새를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다람쥐를 없앰으로써 또다시 간접적으로 새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상황이다. 성라산에서의 조류 생태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고양이들의 관리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라산과 지렁산에서는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적어 등산로 주변에서도 잘 서식하는 참새, 박새, 오목눈이 등 흔한 조류들을 중심으로 14과 21종이 관찰됐다. 또 나그네새인 밀화부리 무리와 겨울철새인 상모솔새도 관찰돼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취재도움=사회적 협동조합 한강 고양시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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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만 전문기자 birdingdmz@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