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진벽옹비 铁器时代 · 晋辟雍碑
출처: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 진벽옹비, 진황실과 낙양성 남벽옹이 세운 큰 비. 함녕 4년(278)립. 1931년 봄 허난성 옌스현 둥다자오촌 북쪽의 한진피옹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이곳은 낙양한위 고성 남쪽 교외 개양문 밖 어도 동쪽에 있으며, 현재 이 비는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비문에는 진 무제 사마염과 황태자 사마충이 직접 벽옹을 시찰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벽옹비라고 불립니다. 이 비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진비 중 가장 크고 온전한 비석입니다.
▲ 낙양한위고성벽옹비는 복두형 비좌에 높이 3.22m, 폭 1.1m, 두께 약 0.3m의 돌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첫머리는 전체 비석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양쪽에 번룡이 새겨져 있으며 전면 비석에는 '대진 용흥황제 삼림벽옹황태자재왕지성덕륭희지송'이라는 글이 4줄로 나누어져 있으며 위진의 8분체 예서입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총 30줄, 1500여 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 진벽옹비 탁편 비문에는 진황제가 벽옹에 가서 예를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마씨의 출세의 역사와 무공문략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진나라 무제 사마염이 제위에 오른 후 조서를 반포하고 학관을 설립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학도들이 '근면하게 공부하고 예의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불과 4년 사이에 세 번이나 벽옹에 가서 강연을 순시하고, 학생들의 '덕행'과 '통예'를 고찰하여 태학생들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비문에서 "태학을 널리 알리고, 많은 학생을 널리 연연하며,… 동월에서 바다, 서에서 유사까지 모이면 만여 명이 모입니다. "서진 초 태학의 성황을 볼 수 있습니다.
▲ 진벽옹비에는 음분 10줄에 학관박사, 예생제자 등의 직종, 본관, 성명을 차례로 새겨넣어 총 400여 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서진 왕조의 15개 주, 70개 이상의 현에서 왔습니다. 이 제목들은 역사적 기록의 부족을 보완하고 당시 태학생의 분포를 반영합니다.
분류:고고 표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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