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정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11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96분)이 같은 날 소개된 화제작 '전, 란'보다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엉뚱한 활극에다 '국뽕'의 향기마저 풍기는 '전, 란'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글을 쓸 것인가 주저주저했는데 이 영화는 모로코가 배경이니 그냥 열 일 제쳐놓고 볼 일이었다.
여행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하기 때문이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말로 시작한다. 여행과 문학,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주인공 캐서린(로라 던)은 모로코의 한적한 휴양지로 떠난다. 최근에 싱글이 된 그녀는 쓰던 소설의 마무리에 전념하기 위해 모로코 여성 작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작가들은 모두 제잘난 맛에 떠들어대고 놀기 바쁘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금융업계 종사자 잭(리암 헴스워스)도 마찬가지다. 뜻밖의 책이 히트해 이제 막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여자친구 릴리를 따라 이곳까지 왔는데 작가들이 영 마뜩치 않다. 매일 밤 작가들과 어울려 놀다 술에 취해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돌아오는 여친도 꼴 보기 싫다.
그렇게 캐서린과 잭은 각자 다른 이유로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갖게 된다. 둘 다 일에 치여 살다 여행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여러 일이 있지만 결국 둘은 진정 찾던 반쪽을 서로에게서 찾아낸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장점은 마라케시를 비롯한 모로코의 이색적인 풍광이다. 사막과 해변, 전통시장, 미소가 아름다운 모로코인들이 둘의 달달한 로맨스의 당도를 확 높인다.
두 번째로는 거의 20년 차이는 나는 것으로 설정된 나이 차, 불륜이나 외도 같은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두 사람이 어떤 감정 선을 그려내는지 주목해 볼 만하다. '쥬라기 공원' 등 오락영화에 곧잘 얼굴을 내밀었던 던은 연하의 남성을 앞두고 고민하고 주저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캐서린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마블 시리즈의 토르로 유명한 크리스 헴스워스의 동생 리암 헴스워스 역시 잭의 따듯한 성격과 아픔, 내면의 불안을 자연스럽게 그려내 둘의 연기 조화가 볼 만하다. 상당히 격한 섹스 신도 나오는데 설득력 있게 연출된 것이 돋보인다. 그는 '헝거게임' 시리즈와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도 얼굴을 비쳤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 작품으로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에린 브로코비치' 각본을 써 오스카 후보에 올랐고, 넷플릭스 영화로 꽤 상찬 받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연출, 각본, 제작, 크리에이터로서 수완을 발휘했던 수잔나 그랜트의 연출력을 맛볼 수 있다. 그녀는 2006년 개봉한 제니퍼 가너 주연의 '캐치 앤 릴리즈' 이후 18년 만에메가폰을 잡아 흠잡을 데 없는 로맨스를 엮어냈다.
아쉬운 점 셋. 하나는 마라케시 근방 카스바 야사합에 있는 작가 수련원에서 촬영했는데 주변 풍광이 스치듯 묘사됐지만 더욱 상세히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작가들의 모임에 치중하느라 어쩔 수 없는 대목이지만 그 풍광을 좀더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둘째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2004)에서 변호사들 사이에 끼지 못해 난감해 하는 여주인공을 보는 듯했다는 것처럼, 공교롭게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가 선정돼 이제 저런 세계적 작가들 모임에 끼워준 것이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들을 마치 괴짜들 모임, 제잘난 맛에 천방지축 나도는 존재로 그린 것 같은 점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 작가라도 방에 조용히 들어가 어떤 침잠의 시간을 보내는지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여튼 이번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까지 50일 동안 모로코 바로 윗동네까지만 다녀오고 다음 기회를 별러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제목이 왜 '론리 플래닛'인지 알 듯 모를 듯하다. 위키피디아 등을 찾아 헤맸는데도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모두들 외로운 행성처럼 떠돌다 쾅 하고 부딪쳤다는 얘기인가 보다. 그냥 편의적으로 갖다 붙인 제목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