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경험과 증거
우리 교회의 전반적인 현실은 아직도 영적인 변화와 증거에 대해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이론적이고 학구적인 영성이 우대되고 경험과 감성의 영성은 낮은 것이거나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와 증거에 대해서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의 카페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그래도 적극적인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더 많습니다.
등대 없는 망망한 대양에서 홀로 항해하는 작은 배에 탄 선원의 마음 같을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일자로 늘어선 수평선 밖에는 없는 그런 공간에 있을 때 느끼는 막막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상태가 됩니다. 영적 경험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이 자신만이 겪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나 다 경험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더욱 답답합니다.
이런 저런 소문들은 많이 있지만 그런 정보들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고, 어떤 체계나 질서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사용하는 용어들이 너무도 세속적이어서 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이지만 ‘입신’이니 하는 단어 등이 그렇습니다. 신학적 용어는 ‘임재’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 용어보다는 속칭으로 굳어진 단어들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은 우리 신학이 그만큼 발이 느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제가 청년기를 살았던 70년대 초에 등산에 관심을 가지고 암벽등반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 있습니다. 장비도 별로 없고 전문 용어도 없었던 시절에 일부 산악인들은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와 몇몇 친구들이 전문 서적을 구입했습니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등산전문 잡지와 서적들을 어렵게 구입해서 전문용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단 한 권뿐인 산악전문지인 ‘월간 산’에 기고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로 바꿨고, 그렇지 않은 것은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암벽 등반이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기에 용어를 만들어내고 전문지에 기고함으로써 많은 등반인들이 사용하게 되어 속칭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지금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요즘 젊은 등반인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즐거움이 있습니다. 영성에 관한 용어도 전문 용어들이 바르게 사용될 수 있어야 혼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신학적으로도 검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용어들이 신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속칭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만큼 영성 부분에 있어서 정리해야 할 요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용어란 많은 검증을 통해서 정의되는 것인데, 그런 과정의 고민과 연구를 거치지 않은 비전문가들은 그저 단순하게 떠오르는 대로 적당히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불교적 영성에서 만들어진 용어를 채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문화는 오랜 세월동안 불교와 유교의 영성 아래서 형성된 것이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이 두 문화로부터 파생한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깊은 관찰과 연구가 없이 단순히 이미 있는 단어라고 해서 채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데, 우리 신학은 이 부분에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주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임의로 깊은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단어를 끌어다 썼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적 경험과 증거를 얻는 성도들은 혼란스러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영적 변화와 증거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은 쉬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각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며 개별적으로 그리고 특수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연구가 없이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넓은 안목으로 전체를 보면서 판단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나타나심은 개별적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일대일 비교를 하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례를 동원해서 공통점을 찾는 일을 쉽지만 단순 비교는 이 점이 어렵습니다. 많은 경험이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개별성 때문에 오해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적은 사례만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많은 경험이 쌓이고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여 비교하고 분석하여야 오차가 적은 분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의 연구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부분에 있어서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자원하여 연구하겠다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영적 경험들은 주님과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치르게 되는 경험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이며, 은밀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교회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헌신은 배려에서 나오는데, 그 배려는 곧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태도와는 전혀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목회자도 자신의 삶을 위해서 교회를 돌봅니다. 말로는 주께 헌신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유익이 우선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가면서 목회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할 사람도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런 이기적인 태도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보다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깊은 친밀함이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감격적인 만남이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내 가진 것 모두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 정신이 들어오면 가족이 걱정되고, 미래가 걱정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내 것을 챙기기 시작합니다. 더 많은 보수를 기대하게 되고, 더 많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전대 하나도 없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정신이 나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평생을 제 정신을 빼놓고 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날마다 성령에게 취해서 산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마 19:26, 막 10:27)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닐 때입니다. 미쳐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오며, 그것이 바로 영적 경험과 증거들입니다. 이런 경험과 증거들을 통해서 점점 깊은 곳으로 인도되며, 주님과의 영적 친교가 이루어져 비로소 자신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입으로만 하는 겉치레 헌신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예수의 영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독특한 선교의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바가 자매된 아내를 동반했을 때 바울 역시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독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영적 경험 때문입니다. 그가 삼층천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적 경험을 하는 까닭은 이런 주님의 요구를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각 사람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의 자기 헌신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은 독특한 영적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개별적이므로 비교될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의 몫을 다할 뿐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 이렇게 각각 다르며, 그에 따른 영적 경험 또한 다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독특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달란트를 묻어둔 어리석은 사람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이 내재된 영적 경험들이지만 이를 올바르게 지도할 지도자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이 무시하거나 방치하거나 외면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쌓여진 지식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진전되어 나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그것을 자각하고 바르게 헌신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하 하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글쓴이:장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