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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시를 겁나게 잘 아는 친구 얘기 외 / 조영관
동산 추천 0 조회 17 15.09.14 07:1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시를 겁나게 잘 아는 친구 얘기 / 조영관

 

 

어쩌다 곰장어 포실하게 익어 가는 포장마차에서
몇 자 끼적거리다가 들키는 바람에
시 이야기가 나왔는데 친구 왈
가슴을 때리면 때리는 것이지
때릴까 말까 그렇게 재는 것도 시냐고
저 푸른 풀밭 거시기 하면서 끝나면 되는 것을
뭐 좋은 말 있을까 없을까 겁나게 재쌓는다고
그런 것도 시냐고
친구는 심심한 입으로 깐죽거리며 얘기했는데

 

유행가 가사처럼
자기 깐에 흥얼흥얼 불러제낄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업어치고 뒤집어 쳐서 깐 콩깍지인지 안 깐 콩깍지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가게 써 놓은 것도 시냐고
툭 터진 입으로 잘도 나불대다가는 
거울에 달라붙은 묵은 때를
걸레로 박박 문대 닦아내드끼
우리같이 못 배운 사람들 머리에도
훤하게 쏙쏙 들어오게 고렇게만 쓰면 될 것이지
기깔나게 멋만 부려쌓는다고
그런 것도 시냐라고 친구는 겁나게
싸갈탱이 없이 얘기를 했는데

 

곰곰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니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다 해 놓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천장만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래 짜샤 나도 안다 알어 그 정도가 될라면
얼마나 지지고 볶고 엎어치고 뒤집어치고
대가리를 얼마나 질끈질끈 우려먹어야 되는지 나도 안단 말이다
허지만 요즘 같이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그런 고민을 해쌓다니
정말 신통방통허다면서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소리를 주절거리다가는
달랜답시고 어깨를 툭툭 치며 술까지 채워줬는데

 

그래 죽도 밥도 안 되는 시
고것도 사치라고 말하면 할말이 없다마는 하고
서두를 떼어놓고도
시가
유행가 가사처럼 술술 그렇게 흘러나오기가
쉽냐 임마 하고 말하려다가
술잔만 빙빙 돌리며 고개를 팍 수그리고 찌그러져 있었는데
한심하다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친구는 입맛을 츳츳 다시며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더라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흔적을 남기는
우리 인생살이 같이
농담 같으면서도 농담 같지 않고
욕 같으면서도 욕이 되지는 않는
망치로 때리는 것 같지만서도 호미로 가슴을 긁는 시가 될라면
졸나게 쉬우면서도 생각할수록 어려운 시가 될라면
얼매나 깊은 터널을 지나야 하는지 니가 어떻게 알겄냐 자식아, 라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도
웬일로 한숨 같은 기침만 터져 나오는지
연기 자우룩하게 곰장어는 익다 못해 타고 있었는데

 

 

 

 

 

제비꽃 / 조영관

 

 

너는 귀뚜라미처럼 풀숲에 숨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날 때마다
굴리고 굴려서 마르고 또 말라서
실핏줄이 터져 우는 소리가 다 들린다.
숨어서 우는 바람소린들 이보다 더 슬프랴.

 

그 누가 사랑을 두려워하랴 했건만
너무 아뜩해서 두려운 강물은
역시 더 푸르러
숨어 있다고 다 가릴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몸부림치며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는 것은 사실 나더라. 
그래서 뒤돌아 서 있어도
환히 보이는 너.

 

반디처럼 불을 뿜어내는 너에게
다가서는 것이 너무 아뜩하기만 해서
행여
네 곁에 가면 네 꿈이 다칠까봐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웅크리고 그저 바라만 보는
나는,
삶이란 얼마나 엉터리 농담인가

 

 

 

 

 

 

시화의 달 / 조영관

 

 

당신은 꼭 8시 반경이면 우리 공장

담벼락에 자전거를 쉰다.


우즈베키스탄 태생, 무하메드, 27세, 도금공장 노동자.


콧수염이 인상적인 당신은 고향에 세 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다 했다.


내가 길모퉁이에 세워둔 자동차로 다가갈 때면

당신은 반갑게 휙 휘파람을 분다.

옆 전자공장은 주야교대라 불빛이 휘황한데

담벼락 밑은 늘 어둡고 침침하다.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쑥 내밀고 옆 공장을 내다보는

당신의 긴 그림자를 볼 때마다

내 명치끝은 찌이 하며 아파온다.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이곳 밤공기는 참 독하다.

눈보라치는 겨울과

오늘 같이 플라타너스 낙엽이 으스스 몰려다니며

온통 거리를 덮어버리는 가을에는

특히 그렇다.

그래도 당신은 거의

담밑에서 기다리기를 거른 적이 없다.


이윽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당신이 등뒤에 그 ‘귀여운 여인’을 태우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부르릉 시동을 건다.


당신은 내 차 옆을 지나며 억센 입으로

또 한 번 길게 휘리릭 휘파람을 분다.

숨가쁘게 따라오는 당신을 보며

나는 음악을 쿵쾅쿵쾅 울리며 신이 나버린다.


이렇게 나란히 달리는 것은 정말 유쾌하다.


32세, 몽고 여자, 두 아이의 엄마.


댕기머리를 한,

통통하면서도 까무스레한

그 ‘귀여운 여인’이

킥킥거리며 나에게 손을 흔들 때

나는,

한달 월급 90만원 돈으로는 닿을 수 없는,

도금칠로도 덧칠할 수 없는,

사랑이란 저렇게 등을 붙잡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다가


4블록을 지나

검은 물 흐르는 둑길을 지나

안산역으로 꺾어드는 언덕배기를

당신이 까치처럼 뒤꽁무니를 까댁거리며

가볍게 올라채는 것을 보며

사랑이란 저렇게 서로 킥킥거리며 언덕을 올라채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당신들의 등뒤 굴뚝 저편에 늙은 호박처럼 떠 있는

달이,

그 달빛이 히야, 밝구나 하면서


떠오르는 한마디 말은,

아하 나의 사랑은 너무 무거웠구나.

 

 

 

 

 

거름의 시인 / 문동만

 

- 故 조영관 시인 영전에

 

 

긴 술자리를 마지막까지 지키던 석가여래좌상이었다 해도

술자리를 먼저 터는 것을 비겁하게 여겼던

어처구니 없는 한 사내였다 하여도

스스로 정수리에 깊은 말뚝을 꽂고 다 떠나간 현장을 지키던

무모한 노동자라 하여도

이 따위 유고시집이나 남기고 가는 몹쓸 시인이라 하여도

드디어 그대 홀로 눕던 빈방을 닫고 가는가

깊은 강에 자책의 돌덩이를 던지며 저무는 햇살 속이 아니라

해뜨는 낯선 새벽 속으로 표표히 떠나던 유랑의 한 사내

참 사람 좋은 한 사람,

누구 뜻대로 가시는가

영근이형 죽던 날

왜 저리 아프다 아프다 죽냐고 목놓아 울던

하 그 붉은 눈물자국이 당신의 짧은 꽃길이구나

노동이란 저마다의 진실인데 어찌 높이가

비굴과 구차가 있는가

등허리 굽혀 지키던 외로운 불꽃들 사그러지고

당신 오랜 시의 저장고였던 숙명의 지지대였던 철골이

무너지고 산소통은 텅 비고

용접선은 널브러져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한꺼번에 울지 않은 울음은 나눠서 생을 두고 울겠지만

당신 전생의 발자국이 묵음으로 아프구나

 

이 위대한 노동의 숨결 위에 쏟아져 내리는

갯비린내 위에 아련히 저며오는 저 귀한 소금땀 냄새

그래 나는 돌아가야 하리라던

당신 그래 평안히 돌아가시라

너와 나를

인간을 땅을 바다를 하늘을 섬기는 운동

아니 그걸 홀딱 넘어서버리는

가만히 거름이 되어버리는 운동 그 숙명을

이제 탈고하고 흰 백지만 있는 곳

운동도 공동체도 아픔도 이별도 없는 곳

다 없으되 좋은 것만 있는 곳

몇 발짝 더 먼저 가시라

그 거름 위에 봄꽃이 피고

보리밭 푸르게 넘실대고

우리는 당신의 시같은 긴 노래를 함께 부를 때

당신은 파안으로 다가와 어깨를 걸고

밤새 추임새를 넣으리

술같은 건 없어도 환장하게 취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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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의 죽음

 

노동자시인 조영관 1주기를 추모하며 / 송경동 시인

 

 

- 조영관 시인을 묻고 돌아온 날 밤, 민족문학작가회의

   게시판에 쓴 글 

 

대부분 회원들이 잘 모르는 분일텐데, 조영관이라는 선배 시인이

돌아가셔서 한 삼일 영안실을 지키다 돌아 왔습니다.

 

알고 보니 박영근 선배와는 1980년 초반 철산동 자취방에 살며

함께 학습하고, 술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추던 일생의 벗이며,

형이었다고 합니다.

박영근 선배가 부르면 다 오지 않아도 꼭 와서 며칠씩 술만

먹는 박영근에게 숟가락으로 밥 떠서 먹였던 선배라고 합니다.

어젠 들어보니 김형수 선배와도 인천에서 함께 학습모임하고

그랬었다고….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인연을 가진 선배이건만 2002년에야

실천문학으로 늦깎이 등단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 당시 등단작품들을 보며 너무 좋았습니다.

아, 아직도 노동현장의 언어로 정직한 방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곤 몇 해 만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귀가 부처님 귀처럼 큰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은 무슨 하회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나 노동자밖에 못 될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손톱 밑에 현장의 때가 시커멓게 끼어 있었습니다.

손등은 상처투성이였고, 손아귀괭이가 박혀 있었습니다.

후배가 뭐라고, 만나면 그 굵어진 손으로 얼마나 반갑게

두 손을 따뜻이 잡고 놀 줄 모르던지, 미안했습니다.

 

강원도 어디 건설 현장에 와 있다던 전화 받고는 한참 잊어

좋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10월 형이 간암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보신각 앞에서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30일간의 거리예술제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런 씨팔!”
왜 되져야 하는 새끼들은 멀쩡하고, 저 높다는
하늘은 착하게만

살아온 사람만 데려가려 하는지…. 싫었습니다. 그런 삶들이.

늘 변방이고, 늘 고통이고, 늘 술인 삶이. 실제적인 사회 변화는

이루지 못한 채 모두가 개인의 방 안에서 아프게 살아가야

하는 삶들이….

 

일이 끊긴 작년 겨울엔 러시아 소설을 다 보았다고 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순정이 참 깊었던 선배였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런 착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쉽게 쓰면 안 된다. 먼저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런 선배였습니다.

함께 20여년 살아 온 그의 후배들이 그러더군요. 그 형은

그렇게 문학을 좋아했다고….

 

전남 함평 어느 골짜기에서 태어났더군요.

생가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대나무 밭 밑에 조그만 집. 서른 가구도 되지 않을 성 싶은

작은 마을.

함평뜰이 있고, 영산강이 흐르는 참 따뜻한 고장이었습니다.

형은 평생 후배들에게 무엇은 안 된다 라는 말을 한번도

안 했다는데, 그 까닭이 그 너른 들과 깊은 강을 보며 살아와서

였을 거라고 모두들 유추하더군요.

 

술자리에서 들어보니, 한편의 사람들은 형은 운동은 했으

과학적, 조직적 운동은 안 했다 라고 평가하더군요.

또 한편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라.

그럼 영관이 형이 운동을 안했으면 우리 중에 누가 운동을 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냐고 하더군요.

 

전 후자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운동을 했다는 그 동문들은 과거 모두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미안하지만, 소수를 빼놓고는 지금은 모두 웬만큼사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무슨 CEO고 무슨 무슨 장이고, 누구는 민노당

지역위원장이고, 누구는 국무총리실에 있고, 누구는 청와대에

있고, 누구는 정치조직의 리더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명함 하나쯤 씩은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연히 동승하게 된 형의 한참 후배의 차도 중대형차여서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영관이 형은 운동은 안 했으되 노동자로 끝까지

살아 버렸습니다.

마지막에도 강원도 어느 곳에 교각을 놓는 공사현장에서

90도 교각을 오르다 떨어져 병원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과거의 기억을 통해 과학적, 조직적

이야기를 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형이 주는 술을 한 이틀 연짱 받아먹었습니다.

사실 장지까지는 따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 내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아마도 괜시리 눈물이 더 났던가 봅니다.

생가 앞에 노제를 차리고 그 앞에 영정을 갔다 두는 데,

한 사람의 삶이란 뭔가 하는 슬픔이 몰려 왔습니다.

엄마 하며 이 길을 뛰어 왔을 작은 아이 하나가, 배고파

왔는데 엄마는 들에 나가고 없는 집에서 두려움에 떨었

작은 아이 하나가, 저 들녘을 넘어 서울로 가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이젠 외로운 유골 한 상자가 되어

맨 처음 출발했던 그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뭘까 하는 생각에 사무쳤습니다.

 

산다는 게 무섭고 싫었습니다.

민족이 뭔지, 계급이 뭔지. 그 작은 아이 하나에게

너무도 많은 짐과 술을 부과했을 이 세상이 싫었습니다.

 

영산강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이젠 모두 오십 줄에 가까

옛 벗들이, 저기 배에 실려 가는 유골함을 보며 노래

부르자고 했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고 모두가 일어섰습니다.

저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구절도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냥 눈물만 주룩주룩 흘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씨팔 왜 이렇게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왜 자꾸 이 시대는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생전에 시집이라도 하나 묶어야 하는 것 아니냐

김해자, 백무산, 성효숙 선배, 그리고 실천문학에서

애를 써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모두가 바라지 않았던 유고 시집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지만, 조만간에 형이 평생 사랑했던 시집 한 권을

보게 될 듯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이젠 아니어서 어떤

평이니 덕담도 모두 덧없겠지만, 그런 한 사람의 시인도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저희 속에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가끔 87년 체재 논쟁을 보게 되는데, 사실은 저희 안에도

이렇듯 끝나지 않은 87년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관이 형은 그 길에서 노동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누구의 삶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범한 삶.

전 그렇게 못 살 것 같습니다.

 

주변 분들과 상의해서 '조영관 노동자 시인장'으로 치러

드렸습니다. 워낙 작가회의 활동 자체를 안했던 선배라

어려웠지만 작가회의 여러 선생님들, 선배님들이 함께

이름 걸어 주셨습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형을 좋아했던 후배의 한 사람으로

마지막까지 선배님 잘 가셨다는 보고 말씀 남깁니다.

 

다음은 조영관 형이 작년 평생의 후배였던 박영근 시인

(2006년 5월 11일, 운명)과의 인연을 남긴 글입니다.

 

 

영근이가 보고 싶다 / 조영관

 

 

영근이가 죽었다. 나의 벗 시인 박영근이가 죽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헛것만 같다. 정리가 되지 않는,

너무 아프고 우울한 밤들이 계속되고 있다. 

 

대학 3학년 말 내 나이 스물여섯인가 일곱에 만났으니

모질게 이어온 인연이다. 영근이로 인해 내 인생은

변했고, 딱 영근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출판사에서, 노동현장으로 삶의 터를 이동하지 않을

없었다. 

 

어쨌든 내 젊은 날, 그 중심에 박영근이 있었다.

아직도 그의 죽음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비틀거리면서 죽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섰기에

더 아프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니, 죽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펼치면서

어느 시가 제일 맘에 드냐,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봄비」라는 시를 짚었다.

「봄비」라는 시는 이렇다.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렛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힘든 네 몸을 그만 내려놓아라’ 라니.

그의 마음의 지경이 이러했으니 늘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같은 거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가슴을 친다.

작년 5월 이맘 였을 것이다.

영근이 나를 불렀다.

세월의 힘을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부평고

그 낡은 쪽방에서 2박 3일을 같이 있었는데 그것은

뭔가라도 그에게 먹이기 위해서였다.

어적어적 먹어대는 내가 부끄럽게 “죽기로 작정했니.” 해도

배달된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술만 찾았다.

밥술을 뜨다가 대책없이 울었고 그가 울면 나도 울었다.

존재의 무거움이, 또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업을

놓지 못하는 시인의 운명이, 이제 내 것이 아닌 사랑이,

5월 햇살의 눈부심이, 초라함이, 비천함이, 팽팽함이,

낯설은 것이, 안타까움이, 그 모든 것이 눈물로 찾아와서

우린 얼굴을 서로 부벼대면서 울고 또 울었다.

같이 가장 많이 울어 보았던 사람이 박영근일 것이다. 

 

울고 나면 이상하게도 밥이 들어갔다. 그리곤 잤다.

자다가 깨어나 보면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3일째 되는 날은 음식을 입에다 억지로 떠먹이는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그릇을 떠먹이고,

“형 가면, 나 죽어.” 했어도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철을 타고 오는데도 “어디야. 형아 돌아와라,

죽을 거야.” 몇 번씩 전화가 왔어도 나는 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나 죽을 거야.” 해서 수원에서 부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간 기억도 있어 죽음이란 그 당시에는 허튼

농담이었다. 

 

그리곤 경기도 광주로 춘천으로 제부도 인근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그를 찾지 못했으니 그때의 말이 딱 현실이

셈이다. 

 

그는 그렇게 몸과 맘을 소진시켜 갔다.

현실과의 먼 거리, 그것이 그의 운명이기도 했다.

시인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그는 대책이 없는 시인으로

자유인으로 살다 갔다. 그런 그가 좋았고, 한편 그런

그가 안타깝고 밉기도 했다.

 

여전히 나는 그의 죽음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여러 날을 이렇게 아플 것 같다.

그는 죽어서 정말 새라도 됐으면 좋겠다.

 

(2006년 5월 어느 날. 조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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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9.15 06:08

    첫댓글 높지도 낫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아 온 시인의 시를 읽으며 눈시울 적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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