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행글라이더 외 2편
황유원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어디까지 날아가나
언제까지 날아가나
바보같이 저렇게
날아가기만 하고 있을 텐가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낮의 행글라이더도 아니고
밤의 산토끼도 아닌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불 모두 꺼진 언덕 위로
혼자 프로펠러를 돌리며 날아가는
고무 동력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방향을 잃고 마는
바보 천치 머저리 등신……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에 올라타 끝없이 펼쳐지는 밤의 언덕 내려다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온 몸과 마음을 맡겨만 본다
내 온 몸과 마음을 맡은 밤의 행글라이더가 아무 말 없이 날아가기만 한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이 비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면 슬프지도 않았을
그러므로 애초에 이 비행은 성립되지도 않았을
밤의 행글라이더는 이제 힘이 다해간다
밤의 행글라이더에 올라탄 나는 그것을 느끼고 밤의 행글라이더를 쓰다듬어준다
숨막히는 행글라이더를 불쌍히 여겨준다 마치 그것이 나인 것처럼
마치 그것의 비행이 나의 비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추락하는 밤의 행글라이더를 내 무덤으로 삼아주고 그것과 함께 추락해준다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오늘밤의 비행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내일 밤은 또 어떤 비행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펼쳐진다
낮에는 있지도 않았을 밤의 행글라이더
밤만 되면 나타나 끝없이 언덕만이 펼쳐지는 지구를 누비며
나를 못살게 구는 행글라이더
행글라이더라는 발음 속에 사는
그러나 행글라이더라는 발음 밖에도 존재하는
밤의 행글라이더
추락하는 밤의 행글라이더
새도 아니면서
새의 뜨거운 심장도 가지고 있질 않으면서
어찌 보면 새처럼 보이는
바람에 빌붙어먹는 더러운 행글라이더
나를 달리게 만들고 기어코 뛰어내리게 만드는 사랑하는 나의
행글라이더
사랑하는 나의 밤의 행글라이더
사랑하는 나의 밤이 지나고 낮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밤의 행글라이더
오르면 잠시 용감해진다
이윽고 슬퍼지는
무한한 나의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
양날개의 균형을 닮은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시키며
나는 그만 이 시를 끝내지만
이 시는 끝나고도 계속 날아가고 있다
밤의 행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 밤의 행글라이더
검고 맑은 잠
창문을 열어놓은 채 홀로 물이나 한잔
따라 마시고 있을 때
그는 꼭 화선지에 칠해진 검은 밤 같다
벼루에 찬물 따르고 먹을 갈면
거기서 풀려나온 새까만 밤이
물속에 고이고
이 밤이 벼루에서 나온 것인지 먹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벼루에 먹을 갈던 손의 움직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물속에 고인 밤은 확실히
깊고
고요하여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여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는 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차고 맑은 바람 스민 글자들 정서해
종이의 온몸에 한기가 들게 만든다
이 차고 맑은 밤이 종이 위로 옮겨가는 만큼
자신의 잠도 차고 맑아질 줄로 믿으며
그는 자신의 밤이 몇 개의 검고 맑은 글자로 고여
계절 속에 서서히
말라가는 걸 본다
문득 잠에서 깨 바라보면
모든 게 예외 없이 말라가고 있고
불을 꺼놓고 잠들었는데도
밤은 또 이토록 생생하고
총림(叢林)
이곳은 어디인가
차가운 돌
어두운 석실
뚫린 창으로 조용한 빗소리 들려오고
저 비의 음량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정확히 그곳을 때리고 있고
나는 너무 사라지지도
너무 있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
졸음 비슷한 삼매에 빠져든다
나 같은 것들을 위해 물은 이렇게 가끔
하늘에서 자신을 떨어뜨리며
우리를 소리의 장벽 속에 한번
가둬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기를 쓰고 들려 해도 들지 못했던 삼매에
이렇게나 쉽게
빠져들게 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저 멀리 들려오는 연두 앵무 울음소리는
보석이 발하는 난연한 빛 같고
이곳은 어쩌면 아잔타 석굴사원의 경내
차가운 돌
쏟아지는 빗소리
다른 승려들은 모두 어디 갔나
소풍 갔나
피안 갔나
나만 혼자 남겨두고
어쩌면 나만 혼자 있을 수 있는 고요를 만들어주기 위해
다들 자리를 피한 건지도 몰라
허나 다시 보면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망해버렸고
석실 밖으로 비는
벌써 이천 년째 내렸다 그쳤다 다시 내리길
반복하고 있고
이제는 거의 돌처럼 굳어버린 나를
지나가던 관광(觀光)객 하나가 망연히 쳐다보다
찰칵, 하고 터뜨리는 빛에
삼매 아닌 그냥 졸음에서
다만 퍼득 깨어날 뿐
― 황유원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 2022)
황유원
서강대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시인이자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2015년 김수영 문학상, 2022년 대한민국예술원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는 『모비 딕』 『오 헨리 단편선』, 『짧은 이야기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바닷가에서』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초자연적 3D 프린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