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가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괴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 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겨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림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르더냐
차알싹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어휘풀이
-알룩조개 : 얼룩 조개
-호개 : 호가(胡歌), 호인(胡人)들의 노랫소리
-흉참(凶慘) : 흉악하고 참혹함
-술막 : 주막, 술집
-방자 : 남이 못 되기를 비는 짓
-눈포래 : 눈보라
-불술기 : 불수레, 즉 태양
(『시학』, 1940.8)
♣해설
이시는 「낡은 집」·「오랑캐꽃」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작품이다. 두만강 ‘무쇠다리 건너온
함경도 사내’인 시적 화자는 그보다 석 달 먼저 건너와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
간도 술막’에서 작부(酌婦)로 전락해 술과 웃음을 팔아 살아가는 ‘전라도 가시내’와 대화를
주고 받는다. 시인은 이를 통해 유이민의 비참한 삶을 보여 주는 한편, 보다 깊어진 현실
인식을 가슴에 품고 모순된 역사 속으로 결연히 뛰어드는 비장함 모스블 그려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눈ㅍ래를 뚫고’ 찾아간 북간도의 어느 술집에서 까무스레한 얼굴의 작부가
‘남실남실 따를 주는 술’을 마시며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랜다. 오랜
세월 가난 속에서 지역 차별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으로 냉대받고 살다가 북간도로 건너온
‘함경도 사내’인 그는 ‘그늘진 숲 속’만큼 어둡게 살아온 그 전라도 가시내의 이야기를 들으
며 그녀에게서 끈끈한 동류의식을 가지게 된다.
‘천리 또 찬리’ 구름처럼 떠돌다 마침내 그 곳 북간도까지 흘러온 전라도 어느 바닷가 마
을 빈농의 딸인 그녀의 불해응ㄹ 자기 것으로 인식하는 시적 화자는 두어 마디 그녀에게서
배운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새 봄이 돌아오면 고향으로 떠나라며 그녀를 따뜻이 위로
한다. 이제 그에게 있어 ‘전라도 가시내’는 하룻밤 알고 지내는 천박한 술집 작부가 아니라,
공동 운명체적 존재올 각인(刻印)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두루미처럼 흐느껴 울며’ 자신의 운명에 절망한다.
그녀의 슬픈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적 화자는 마침내 ‘얼음길’로 상징된 고난의 현실이
끝날 것을 확신하며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인 암울한 역사 현장으로 달려가겠다는 결의를
보여 준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라는 마지막 시행에서 우
리는 투철한 역사 인식으로 무장하고 온몸을 던져 시대고(時代苦)를 허물겠다는 시인의 결연
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용악은 당시대 유이민의 비그겆ㄱ 생활상을 튼튼한 시
사적 구조 아래 섬세한 서정성과 북방 정서를 바탕으로하여 확고한 자기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작가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6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락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1937), 『이용악시전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