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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사학자들의 현재의 “북한의 평양 = 고조선·고구려·낙랑의 중심 평양”이라는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평양의 위치와 고대 한반도 역사의 무대를 기존 통설보다 훨씬 대륙 쪽으로 봐야 한다”
■재야 사학자들은 중국 고대 사서와 지리 기록들을 보면, 전통적으로 알려진 평양 위치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강(江), 거리, 이동 경로, 한사군 위치 등을 따져보면 지금의 북한 평양보다 중국 요동·요서 지역과 더 연결된다고 본다.
▪︎따라서 고대사의 주요 무대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대륙 쪽에 더 넓게 펼쳐졌다는 “대륙사관” 성격의 해석을 제시한다.
▪︎“현재 학계 통설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재야사학계 일각에서 제기하는 '통설(낙랑군 평양설 및 고구려 평양성 대동강 위치설)에 대한 반론'의 핵심 요지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지명 이동설 (평양의 위치 변화)
▪︎주장: 역사 속 고구려의 '평양'과 낙랑군의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정세에 따라 대륙(요동·요서 또는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유: 고대 문헌에 기록된 평양 주변의 지형(강의 흐름, 산의 위치 등)이 현재 북한의 대동강 평양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2. 문헌 사료의 재해석
(요동·하북성 평양설)
▪︎주장: 《삼국사기》, 《중국 정사(24사)》 등의 기록을 정밀히 분석하면, 고구려의 초기·중기 평양이나 낙랑군의 치소는, 현재의 북한 평양성 자리가 아니라 중국 요령성(요동)이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봅니다.
▪︎이유: 문헌에 나오는 국경선(패수)이나 인접 국가와의 거리 계산을 적용했을 때, 한반도 평양보다는 요동 지역이 더 자연스럽다는 논리입니다.
3. 강역(영토) 축소론에 대한 반발
▪︎주장: 주류 사학계(통설)가 일제 식민사학의 '반도사관'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여 고구려와 고조선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스스로 축소시켰다고 비판합니다.
▪︎이유: 대륙에 존재했던 평양의 기록을 한반도 평양에 끼워 맞추다 보니 우리 고대사의 무대가 대폭 좁아졌다는 시각입니다.
■이들의 반론은 "역사 기록 속 진짜 평양(고조선·낙랑·고구려의 중심지)은 원래 대륙(요동·만주 등)에 있었으나, 후대에 지명이 이동했거나 식민사학적 관점에 의해 한반도 대동강 유역으로 축소 고착화된 것"이라는 주장으로 집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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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강단사학)이 주장하는, 고구려 평양의 위치에 대한 이유있는 반론
■역사적으로 한국인에게 가장 큰 자부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나라는 '만주대륙을 호령했다'는 고구려이다.
▪︎그런데 정작 만주대륙에는 고구려가 도읍했다는 자취도 없고 서류상에 등기부도 없는 가건물이라면 실망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고구려는 물론이고 부여의 부여성도 만주 장춘시 농안현에 존재하지 않았다. 발해도 마찬가지로 연변자치주 통화시에는 중경현덕부나 상경용천부 등 발해5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여와 발해조차 만주에 없었다면 반도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대다수 한국인에게 실망을 넘어 절망적이다.
▪︎역사시간에 그렇게 배웠는데 왜 당신은 만주 대륙사의 진실을 부정하느냐고 분노할 수도 있다.
▪︎소위 만주사관에 의해서 만주와 한반도를 무대로 서술된 한국사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워서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이 되었다.
▪︎백두산 천지는 환웅이 하강하고 단군이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역사적인 성지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 백두산마쳐 원래의 태백산이나 장백산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럼 당신이 주장하는 한국사의 무대는 도대체 어디냐고 반문할 것이다.
▪︎가상의 역사를 층층이 쌓아올려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서 굳어진 이런 속설은 한국인들이 막연하게 품고있는 반도역사에 대한 답답함과 대륙고토에 대한 열망을 달래줄 수는 있겠지만 소위 '만주사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화일 뿐이다.
▪︎우리는 곰이 변해서 사람을 낳았다는 식으로 만들어진 신화를 깨어버리고 오로지 사서기록과 유물유적에 의한 실증적인 역사를 다시 써야할 때가 되었다.
▪︎주류학계의 통설이 주장하는 요령성 환인현의 졸본성과 길림성 집안현의 국내성에 궁성터나 왕릉등이 있어줘야 되는데 서기 2세기전에 고구려 도읍지가 있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고고학적인 유물로서 증명이 되지 않고 사서기록에도 부합하지 않는 그야말로 '실증없는 실증사'이다. 잠시 거쳐간 곳도 아니고 수십, 수백년동안 도읍지로 삼았다면 당연히 무수한 유물과 유적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유일한 증거물이 광개토대왕의 비석인데 옆에 당연히 있어줘야할 광개토대왕릉이 없다. 왕릉도 없는데 왜 비석만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지 미스테리이다.
▪︎왕릉과 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은 항상 함께 붙어있는 것이 원칙이다.
▪︎광개토대왕의 호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國罡上)은 대왕릉이 위치한 장소를 의미한다.
▪︎즉 국강상에 묻혔다는 것이다. 비석은 국강상의 왕릉 옆에 있어야 하는데 왕릉이 없다면 누군가 비석을 옮겼다고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요동을 점유하고 고구려 영토로 확보한 광개토대왕은 평양을 중시하여 절을 아홉개나 짓고 백성을 이주시켰다. 아들 장수왕은 부왕의 뜻을 이어 요동땅의 평양으로 천도했다.
▪︎북위는 장수왕을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평양성에 거처했던 마지막 보장왕도 '요동군공' 책봉을 받았다.
▪︎만주 압록강변에 위치한 집안현은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하북의 요동'이 아니며 대동강 평양 역시 요동군이 된적이 없다.
▪︎고구려 평양성에 왔던 북위의 책봉사신은 돌아가서 이렇게 보고했다.
"고구려는 요동남쪽 천리에 떨어져 있으며, 동으로는 책성, 남으로는 소해에 닿고 북으로는 부여에 이릅니다. 민호는 옛 위나라때 보다 세배이며 동서로는 2천리, 남쪽으로는 천리가 넘습니다."
▪︎지금 평안도 평양에서 남쪽 천리면 거의 한반도 남부에 이른다. 고구려가 이땅을 다가졌다면 한수 이남에 있었다는 한성백제는 어디에 있어야할까?
▪︎그리고 남쪽에 소해(작은 바다)가 있다고 했는데 소해는 어디에 있을까? 소해는 수나라 장수 내호아가 고구려 평양을 칠때에 군사를 이끌고 올라갔다는 '창해(발해만)'를 이른다.
▪︎장수왕이 서기 527년에 천도했다는 평양성이 대동강가에 위치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은 서쪽으로 후연을 정벌하고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하북에서 서진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아들 장수왕이 뜬금없이 한반도에서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평안도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설명부터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서쪽으로 중원대륙을 포기하고 당시로는 궁벽한 한강에서 신라, 백제와 사활을 걸고 영토다툼을 벌여야했을 이유가 없다.
▪︎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이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는 기록은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한,당시대의 중국사서에 넘쳐난다.
▪︎정작 한국 사학계에서는 700년, 혹은 부여사까지 포함해서 900년 역사를 지속한 고구려가 도읍했던 평양이 어딘지 논란이 분분하다. 물론 한국주류사학이 가르치는 통설상의 도읍지는 평안도 평양이다.
▪︎고구려 멸망후 500년뒤에 편찬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주장한 이래 일제시대에 일본 식민학자들에 의해서 정설로서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는 주장은 일제시대부터 단재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서 위당 정인보 등 쟁쟁한 민족사학자들이 꾸준하게 제기해 왔다.
▪︎1960년대에는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북한의 리지린 박사가 평양설을 부정하고 고조선의 왕검성, 즉 평양성이 요령성 요양설에 있다는 만주 요동설을 제기하였다.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은 동일한 곳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양설을 부정해왔던 민족사학의 대가들도 딱부러지게 평양이 어디라고 특정하지는 못했다.
▪︎평양의 위치비정에 결정적인 평주(平州), 패수(浿水)와 요수(遼水), 갈석산(碣石山)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수의 동쪽에 평양이 있다고 했는데 패수(浿水)는 한반도의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부터 요령성과 하북성에 있는 요하, 대릉하, 난하, 조백하등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요수(遼水)도 마찬가지이었다. 불과 최근까지도 하북성 북부의 진황도시를 지나가는 난하가 요수라는 주장이 대세이었다. 지금도 진황도시에 갈석산이 있고 요수가 흐른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일부 저명한 학자들도 있다.
▪︎역사문외한인 일반인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대학에서 수십년동안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를 업으로 삼고 먹고살았다는 자들도 대동강 평양에서부터 만주 요령성 요양시까지 여러가지 주장을 마구 쏟아내고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역사를 공부했는지 수준이 의문스럽다.
■평양의 위치에 대한 학설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대동강 평양 - 주류학계의 변함없는 통설이다.
▪︎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지만 평양에는 고구려 성곽이나 왕릉, 궁궐터, 왕족의 무덤 등 일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마디로 유령 평양이다.
▪︎국사시간에 고구려 평양이 대동강에 있었다고 못이 박히도록 배워서 선입관이 박힌 자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유물과 기록이 없는 가짜 평양이다.
2. 만주 요령성 요양시 -
▪︎<요사지리지>에서 고구려 평양이라고 한 요양을 현재 만주 요령성 요양시에서 찾고자하는 강단의 일부 비주류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요수(遼水)를 지금 요하(遼河)로 보았기 때문인데 요하(遼河)상류에는 요수(遼水)의 발원지로 지목되는 갈석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갈석산과 요수는 평양과 패수처럼 항상 쌍으로 붙어다니는 지명이다. 갈석산이 없는 요수는 있을 수 없다.
▪︎만주요양설 역시 명백한 오류이다. 중국은 발해 비닷가의 하북성 진황도시에 갈석산을 옮겨 놓있다.
3,. 하북 평주설 - 사서기록과 일치하는 정답이다.
▪︎중국 사서기록에 근거하여 평주 노룡현, 혹은 창려현에 고구려 평양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곳에 고구려 평양을 증명하는 평주, 갈석산과 요수, 패수기 위치한다.
▪︎이와 관련한 중국사서 기록을 살펴보자. 지면관계상 부연설명은 생략하고 사료중심으로 원문과 번역문만 인용한다.
◇원위(元魏, 즉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즉 고구려)이 거주하는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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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라고도 한다.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 輝罕州即 故 平壤城也 號 中京顯徳府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 시기의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通鑑地理通釋』 권 10
▪︎안동대도호부, 순임금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로 삼고 목(牧)을 두었으니 마땅히 요수의 동쪽이 이곳이다.
▪︎춘추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연(燕)에 속하였고 진(秦)과 전, 후한(漢)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진(晉)이 인습하였고 겸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때에 고구려가 그 땅에 도읍하였다. 安東大都護府, 舜分靑州爲營州 置牧 宜遼水之東是也 春秋及戰國 竝屬燕 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 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通典』 권 180, '州郡'
▪︎고구려 평양이 평주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평주는 어디에 있었나? 유주에서 분리하여 최초로 평주를 설치한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조 기록을 보자.
▪︎"함녕(咸寧) 2년(276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진서(晉書)>는 중국 삼국시대에 사마씨가 건국한 진나라(晉, 265년 ~ 420년)의 기록을 담은 역사서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명으로 648년에 방현령·이연수· 배행검(裴行儉) 등 20여 명의 학자가 편찬한 책으로, 서진(西晉, 265년 ~ 316년)과 동진(東晉, 317년 ~ 418년)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는 중국 24사 정사의 하나이다.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평주는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국(周)에서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한국(漢)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국(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이에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로 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1] 2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
▪︎평주(平州)는 처음에 설치하여 모용외(慕容廆)가 자사(刺史)가 되었다가, 드디어 속하였다.
▪︎영가(永嘉)의 난에 모용외는 무리에 의하여 추앙되었다. 그 손자 모용준(儁)에 이르러 계(薊)로 도읍을 옮겼다.
▪︎그 후에 모용수(慕容垂)의 아들 모용보(寳)는 또한 화룡(和龍)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유주(幽州)로부터 여부진(廬溥鎮) 남쪽의 땅이 위(魏)로 편입됐다.
▪︎모용희(慕容熙)는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鎮)를 영지(令支)에, 청주자사진(青州刺史鎮)을 신성(新城)에,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鎭)을 범성(凡城)에, 영주자사진(營州刺史鎮)을 숙군(宿軍)에, 기주자사진(冀州刺史鎮)을 비여(肥如)로 하였다.
▪︎고운(髙雲)은 유주목진(幽州牧鎮)와 기주목진(冀州牧鎮)을 비여(肥如)에,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鎮)을 백랑(白狼)으로 하였고 후에. 후에 풍발(馮䟦)이 빼앗고 풍발은 화룡(和龍)에서 참람되이 불렸는데 이것이 후연(後燕)이며 위(魏)에 멸망당하였다.
平州初置, 以慕容廆為刺史, 遂屬永嘉之亂, 廆為衆所推. 及其孫儁移都於薊. 其後慕容垂子寳又遷于和龍, 自幽州至於廬溥鎮以南地入於魏. 慕容熙以幽州刺史鎮令支, 青州刺史鎮新城, 并州刺史鎭凡城, 營州刺史鎮宿軍, 冀州刺史鎮肥如. 髙雲以幽 冀 二州牧鎮肥如, 并州刺史鎮白狼. 後為馮䟦所簒, 䟦僭號於和龍, 是為後燕, 卒滅於魏.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
■고구려 평양은 고조선이 도읍했던 평양이다.
▪︎요동군 험독현,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의 임금 위만이 도읍한 곳이다.
▪︎물의 험한 것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하였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험독은 그냥 험독이다. 師古가 말하기를 臣瓉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遼東郡 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前漢書』 권 28下 '地理志'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길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이며 또 옛부터 말하기를 조선의 땅이라 한다 하였다. 括地志云 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史記』'朝鮮列傳' 正義 註
▪︎현덕부(顯德府)는 본래 조선의 땅으로 곧 평양성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봉하고, 한(漢) 말에 공손탁(公孫度)의 거점이 되었고, 진(晉)때에 고구려에 점령되었고, 당(唐)이 안동도호(安東都護)를 두었고, 대(大)씨의 소유가 되었다. 중종때에 이름을 홀한주(忽汗州)라 명하였다. 顯德府 本朝鮮之地 卽平壤城 周武王以封箕子 漢末爲公孫度所據 晉時陷於高句麗 唐置安東都護 爲大氏所有 中宗時賜名忽汗州
『渤海考』
●평양성은 패수 하구로부터 60리 거리
▪︎요동의 전쟁에 (내)호아(護兒)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滄海)로 가서 패수(浿水)에 진입하니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였다. 遼東之役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隋書』권 64, '來護兒'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수백리에 달하는 강회(江淮) 수군의 선단을 이끌고 나아가 바다를 통하여 먼저 패수(浿水)에 진입하니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였다.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삼국사기』권 20, 고구려본기 '영양왕 嬰陽王'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有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 水多蓒芋之草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패수(浿水)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계조하(鷄爪河)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有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 水多蓒芋之草
『遼史』'地理志', '東京遼陽府'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 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 漢初 燕人滿王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朝鮮 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역수(易水)가 또 동쪽으로 진행하면서 니수(埿水)가 (역수로) 흘러든다. (역)수는 위로(북쪽으로)부터 용성현(容城縣) 동남쪽의 두 못을 연결하는데, 대니정(大埿淀)과 소니정(小埿淀)이라 일컫는다. 그 하천(埿水)이 남쪽으로 역수에 흘러드는 곳을 니동구(埿洞口)라 일컫는다. 하천의 곁에 혼니성(渾埿城)이 있으며 역수가 그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구수(滱水)와 합류한다. 易水又東 埿水注之 水上承二陂于容城縣東南 謂之大埿淀 小埿淀 其水南流注易水 謂之埿洞口 水側有渾埿城 易水逕其南 東合滱水
『水經注』권11, '易水'
▪︎남역수(南易水)는 (용성容城)현의 남쪽에 있다. 영주(瀛州) 고양현(高陽縣)의 경내로 흘러들어 구수(滱水)와 합류한다. 폐현성(廢縣城)이 (웅雄)주의 서북쪽 50리에 있다. 대니정(大泥淀)이 (용성)현 남쪽 30리에 있다. 《水經》에 주석하여 이르기를 역수(易水)가 동쪽으로 용성(容城)의 대니정(大泥淀)에 흘러드는 곳을 가리켜 니동구(泥同口)라고 한다 하였다. 南易水在縣南 流入瀛州高陽縣界 與滱水合流 廢縣城在州西北五十里 大泥淀在縣南三十里 注水經云 易水東流容城 大泥淀注之 泥同口之謂也
『太平寰宇記』권 67, '雄州' '容城縣'
▪︎계조하(雞爪河) : 역도원의 《水經注(수경주)》에 '범수(范水)'라 칭하였다. 정흥현 고성진(固城鎮) 서북쪽 평지의 계조샘에서 물이 솟아나며 발원한다.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서수현, 용성현, 안신현을 거쳐 흐른다. 雞爪河,酈道元《水經注》稱范水,雞爪泉平地涌水,發源於定興縣固城鎮西北,流經河北省保定市定興縣,徐水縣,容城縣,安新縣。
『바이두 백과』 '雞爪河'
▪︎요양현(遼陽縣)은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 지역이었다. 한(漢)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때에 상락현(常樂縣)이 되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遼陽縣 本渤海國 金徳縣地 漢浿水縣 髙麗改為勾麗縣 渤海為常樂縣 户一千五百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遼史》 '지리지'에 이르기를 한(漢)나라의 본 패수현(浿水縣)은 고구려가 구려현으로 고쳤고 발해가 상락현(常樂縣)으로 고쳤다. 패수는 한나라 낙랑군에 있었다. 지금의 조선의 경계 안쪽이다. 금덕(金徳)과 상락(常樂)은 곧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의 현명이다. 모두 이곳(한반도 조선)에 없었다. 遼志云 本漢浿水縣 高麗改為句麗縣 渤海為常樂縣 浿水在漢樂浪郡 今朝鮮界内 金徳常樂乃渤海中京顯徳府縣名 皆不在此
『欽定盛京通志』 권 100
▪︎조선왕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의 전성기에 비로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던 적이 있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하자 요동(遼東) 밖의 변방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까지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손질하여 복구시키고 경계로 삼아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 爲界 屬燕
『史記』'朝鮮列傳'
●요수와 갈석산에 관 중국사서 기사
▪︎요수(遼水)는 갈석산(碣石山)에서 발원하여 새(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요동의 서부와 만나고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遼水出碣石山 自塞北東流 直遼東之西 南入海
『淮南子』 '墬形訓' 高誘 註
▪︎고구려의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곳에서 발원한다. 句驪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梁書』 권 54
▪︎고구려현,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온다. [《山海經(산해경)》에서 말하기를 요수(遼水)가 백평(白平)의 동쪽에서 나온다 하였다.] 髙句驪 遼山遼水出 [山海經曰 遼水出白平東]
『後漢書』 郡國志 '幽州' '玄菟郡'
▪︎요수(遼水)는 지석산(砥石山)에서 발원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새(塞) 밖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요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의 서부과 만난다(直). 왕망의 장설(長説)이다.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水經注』 권 14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通典』 ‘邊防’ 1
▪︎진수(陳壽)가 말하기를 「한 무제가 현토군을 열어 옥저를 치소로 하였다. 후에 이맥(夷貊)에게 침략당하여 군을 구려현(句驪縣) 서북쪽으로 옮겼다.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遼水)가 그곳에서 발원한다.」 하였다. 陳壽曰漢武帝開玄莵郡, 治沃沮. 後為夷貊所侵, 徙郡句驪縣西北. 有遼山, 遼水所出.
『資治通鑑』 권197, 胡三省 註
▪︎요수는 지금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폭하(瀑河) 남역수(南易水)이다.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는 계조하, 평하, 천하 모두와 합류하여 신안(新安)의 흑룡구(黑龍口)에 이르러 [백양(白洋)]정(淀)에 흘러든다. 瀑河即南易水合雞爪萍泉諸河至新安之黑龍口入淀
『大清一統志』 권 15, 河間府 四角河
▪︎갈석산은 한민족의 백산, 태백산, 장백산, 지금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낭아산이다.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이다. 물이 동북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색이 기러기 머리색을 닯았기 때문에 속되게 부른 이름이다. 요동에서 5백리 떨어져 있다.
▪︎국내성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만나 두 물이 합하여 서남으로 흘러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
▪︎고구려에서 이 강이 제일 크다. 물결이 이는데 푸르고 맑으며, 나루터마다 큰 배가 서 있다. 그 나라에서 이를 천연요새로 여긴다. 강의 너비가 3백보이고, 평양성 서북 450리에 있다. 馬訾水則移反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 入海 高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통전(通典)』 변방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물빛이 기러기의 머리색과 같아 압록수(鴨淥水)로 불린다.
▪︎국내성의 서쪽을 거쳐 염난수(鹽難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안시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 사람들이 건너다니므로 이를 해자로 여긴다.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 西與鹽難水 又西南至安市 入于海 而平壤在鴨淥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
『신당서(新唐書)』고구려
▪︎살펴보건대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다른 이름은 안정홀이니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在遼水之北
『삼국유사』 제3권 興法 제3 순도조려(順道肇麗)
▪︎장백산, 령산 동남쪽 1,000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에는 새와 짐승도 모두 흰빛인데,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한다.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뱀의 해침을 마련하여 놓았다. 흑수가 여기에서 발원하는데, 예전에는 속말수라 하였다가 태종이 진(晉)8을 쳐부수고 혼동강으로 고쳤다. 長白山,在泠山東南千餘里,蓋白衣觀音所居。其山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黑水發源於此,舊云粟末河,太宗破晉,改為混同江。
『契丹國志』 권 26
▪︎오대시기에 거란이 발해의 땅을 모두 취하자 흑수말갈은 거란에 부속하였다. 그 남쪽에 있는 자들은 거란의 호적에 편입되어 숙여직이라 불렀고, 그 북쪽에 있는 자들은 거란의 호적에 편입되지 않아 생여직이라고 불렀다. 생여직의 땅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는데 혼동강은 또 흑룡강 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백산, 흑수’가 이것이다. 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金史』 권 1, 本紀 第1 世紀
○*고구려 평양은 패수(계조하)의 동쪽,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이다. 견고한 성(固城)이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다.
*필자 주, 갈석산, 요수, 평주에 대해서는 이미 수십차례 발제를 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재론하지 않습니다. 역사공부는 본인 스스로 해봐야 실력이 늘어납니다. 위에 예시한 사서기록은 이미 충분하므로 이를 근거로 각자 공부해 보시기를 권유 드리고자 한다. 혹 공부한 후에 성의있는 질문이 있으면 답변을 드릴 것을 약속하지만 기초도 없이 너무 초보적인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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