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잠복기억cryptomnesia
우리가 인지하거나 체험한 것을 잊어버리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또 그 기억이 우리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방식도 다양하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예로서 잠복기억cryptomnesia 또는 ‘숨겨진 기억’을 들 수 있다. 잠복기억이란 과거의 경험이 잊힌 기억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새롭고 독창적인 것으로 착각하며 떠올리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과거에 타인에게 들었던 생각을 다시 회상했을 뿐인데 그 기억이 회상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처음에 세운 계획대로 논의를 진행하고 이야기 줄거리를 발전시키면서 글을 써 나간다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옆길로 새기 시작한다. 아마도 새로운 생각이 났든지,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든지, 아예 새로운 줄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탈선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봐도 저자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전에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내면서도 그는 그런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가 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작품-그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작품-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도 있다.
이처럼 흥미로운 사례를 융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thustra>에서 찾아냈다. 융은 이 작품에서 니체가 1886년 항해일지를 통해 보고된 어떤 사건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말한다. 절묘한 우연의 일치로 융은 1835년, 즉 니체가 이 책을 쓰기 반세기 전에 발행된 이 뱃사람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을 발견했을 때 니체의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문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에 관해 니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융은 아마 니체가 그 오래된 작품을 읽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문제의 항해일지와 니체의 글은 아래와 같다.
J. 케르터의 <프레포르스트의 일지Blatter aus Prevorst> 57쪽 ‘장엄한 의미의 발췌’(1831-37)
“선원 4명과 벨이라는 상인은 스트롬볼리 산이 있는 섬에 다다르자 토끼 사냥을 하려고 상륙했다. 3시가 되어 배에 오르려고 선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은 뜻밖의 광경을 보았다. 두 남자가 허공을 날아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검은 옷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회색 옷을 입었는데, 둘 다 몹시 서두르면서 선원들 바로 옆을 지나갔다. 그들이 무시무시한 스트롬볼리 화산 분화구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자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 두 사람이 런던에 사는 지인知人임을 알았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1장 ‘엄청난 사건’(1883)
“자라투스트라가 지복至福의 섬에 머물 때였다. 어느 날 화산이 있는 그 섬에 배 한 척이 닻을 내렸다. 선원들은 토끼 사냥을 하려고 섬에 상륙했다. 그런데 정오쯤 되어 선장과 선원들이 다시 집합했을 때, 그들은 난데없이 한 남자가 허공을 날아 그들에게 다가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게다가 그 남자가 하는 말도 똑똑히 들었다. ‘때가 왔도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들 코앞에 이르자 그림자처럼 쓱 지나쳐 화산 쪽으로 가버렸다. 그 사람이 자라투스트라임을 알고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보라!’ 늙은 조타수가 말했다. ‘자라투스트라가 지옥을 건너간다.’”
융은 당시 생존해 있던 니체의 누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니체가 11살 때 둘이 함께 J. 케르터의 <프레포르스트의 일지>를 읽었다고 융에게 알려주었다. 융은 전체적으로 볼 때 니체가 그 작품을 일부러 표절하려고 하지는 않은 듯싶다고 말한다. 무려 50년이나 지나서 그 오래된 기억이 불현듯 생생하게 니체의 의식 속에 떠올랐던 것이라고 말한다.
융은 본인이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순수기억’이 바로 그런 예라고 말한다. 비슷한 일이 음악가한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어릴 때 농부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나 유행가를 들으면서 자라난 음악가가 나중에 자신이 작곡하고 있는 교향곡 악장의 테마로 그런 곡들을 무의식중에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즉 생각이나 이미지가 무의식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 이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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