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14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코 7,31-37
내가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정말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에 대해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단지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침을 찍어 그의 혀에 대시며,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분명히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그 대상에게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더욱 신경써 주고 계심을 느끼게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도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면서,
행동과 언어를 결합하여 상대가 체험할 수 있는 사랑을 선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저 “손을 얹어 주십사” 청하였을 뿐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때는 더는 내가 저 사람에게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헤어질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럼 헤어져야 할까요?
영화 ‘아이 엠 샘(I Am Sam)’은 지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 샘이 어린 딸 루시를 키우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샘은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루시가 태어난 직후에 여자는 떠나버립니다.
샘은 자신의 인지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루시를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키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이에게 제공합니다.
그런데 루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를 지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7세가 되자 그녀는 아버지가 다른 성인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만은 일부러 글을 읽지 못하는 척합니다.
샘은 딸과 함께 간 식당에서 어린이처럼 없는 메뉴를 주문하며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는 딸의 입장은 매우 난처합니다.
이런 일이 이어지자 사회 복지 서비스는 샘이 루시를 키울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재판이 열리고 샘은 결국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에게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같이 살고 싶어 하지만, 샘은 루시를 위해 그녀를 좋은 집안으로 입양 보냅니다.
딸은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해갑니다.
샘은 딸을 만나러 갔다가 자신 없이도 잘 지내는 것을 보고는 그냥 돌아옵니다.
그러나 루시는 아빠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그러한 집에서 자라게 해 준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빠와 딸을 키우는 집의 엄마는 마치 공동 육아처럼 서로 협력하여 루시를 키우기 시작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이 영화에서 샘이 딸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딸을 잘 키워줄 누군가에게 딸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가장 잘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받는 일입니다.
한국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역시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어려웠던 엄마는 동물원에서 아이의 손을 일부러 놓아 아이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이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자기 힘만으로 키우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아이가 마라톤을 하려고 하자,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없는 아이가 말아톤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엄마와 아이가 화해하는 때는 엄마가 아이에게 말아톤 코치를 소개해주면서부터입니다.
초원이는 달리는 법을 배우고 행복하게 달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코치에게 보내준 엄마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만이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데려온 그 사람이 치유를 받고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 하지 맙시다. 한계에 부딪힙니다.
주님께 데려가는 사람은 당장은 그 사람을 잃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영원히 그 사람에게 감사받고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4일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에파타!’ 복음을 접할 때마다, 제 지난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솔직히 수도회 입회 전까지만 해도, 저는 도통 말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말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말주변이나 말재주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제 모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꿔다놓은 보리 자루!’
어떤 정소를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저는 조용히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거의 투명 인간처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학창시절 제 생활기록부에 단골로 적혀있던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성격, 남 앞에 나서기를 지극히 꺼려함,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탐...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 몇십년 만에 해후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가 주도한 한 강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뀌어버린, 제 모습에 강의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변화된 제 모습을 보며,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 신앙 여정 안에 ‘에파타!’라고 외치시며 저를 치유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또 다른 깨달음, 또 다른 시야를 지니도록 계속해서 ‘에파타!’ 작업을 지속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놀랍게도 주님께서 힘을 보태주십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한 방향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면 기적이 가능합니다.
제대로 한번 변화되어 보려고, 제대로 한번 눈을 떠보려고, 제대로 한번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리게 하는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되풀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듣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놓치며 살아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동료 이웃들의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목소리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의 징표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말, 꼭 필요한 말, 반드시 해야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주님의 한 말씀,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금요일 강론>
(2025. 2. 14. 금)(마르 7,31-37)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고, 안 듣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1-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37절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신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말이고,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또는 “예수님은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는 이사야서 35장 5절,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에서 온 말이고,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4ㄴ-6).”
메시아 시대는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했던 에덴동산이 원래대로 복구되는 시대.>
2) 예수님께서 다른 장애자를 고쳐 주실 때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동작을 하면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직 믿음이 없는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해서, 또 그가 듣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배려로 ‘눈에 보이는 동작’을 사용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에파타!(열려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몸’을 치료하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고통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의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한 번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몸의 장애를 고치는 일은 이루어졌지만, 영혼 구원의 완성은 아직 미완성 상태이고, 그 완성은
그 사람 자신이 끝까지 노력해야 할 숙제입니다.
3) 장애 때문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들을 수 있는데도 듣지 않고,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잘 듣고 실천하고 증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는,
“침묵은 금이다.” 라는 격언은 맞지 않습니다.
‘말씀’과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죄입니다.
선을 선이라고 말해야 할 때, 또 악을 악이라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침묵도 죄이지만, 들으면 안 되는 ‘악한 말’만 듣는 것, 그리고 그 말을 퍼뜨리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서 가짜 뉴스와 악한 말들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오늘날에도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왜곡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홀리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이비 종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그런 자들이 있어서 신앙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게 속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자신들의 잘못된 신념과 사고방식을 ‘진리’인 것처럼 퍼뜨리는 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더욱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들었으면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에파타!(열려라!)” 라는 명령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열어라!” 라는 명령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