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상의 작품
올해(2008년) 오키나와[沖繩] 문학에 대한 글을 세 편 썼다.
계간『제주문학』(여름호)에 메도루마 슌에 대한 평론, 계간『시평』(여름호)에 가와미츠 신이치의 시 번역과 소개, 학술지『외국문학연구』에 논문「폭력의 기억, 오키나와 문학」을 발표하고, 몇 가지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오키나와 문학을 연구하는 일본문학 연구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오키나와 문학은 일본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 아닌지요."
"취직하려면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피하는 연구 대상이지요."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오키나와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실은 왜 오키나와 문학, 아니 '오키나와'에 왜 다가가고 있는지,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 왜 오키나와 문학을 연구하냐고 물으면, "그냥 재미있어서요"라고 그럴싸하게 말해 왔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오키나와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멀지 않다. 2,3년전부터 나에게는 한국문학이라는 테두리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한국문학이니 일본문학이니 비교문학이니 하는 구별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학계에 있는 사람으로 자기의 전공을 펼쳐 놓는다는 것, 그것은 무장해제를 의미하며, 또는 자해(自害)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무장해제 혹은 자해를 내 스스로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문학'을 연구한다. 요즘 내 전공은 그냥 '문학'이다. 나는 한국문학 연구자나 일본문학 연구자나 그렇다고 재일 디아스포라 연구자나 비교문학 연구자도 아닌 거 같다. 그저 내 전공은 '문학'이다. 그리고 조지 스타이너의 말마따나, 베스트 중의 베스트를 찾아 수도하는 구도자(求道者)로 바뀌고 있다.
"서평가나 문학사가와는 달리, 비평가는 걸작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일차적 기능은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구별하는 일이 아니라
좋은 작품과 최상의 작품을 구별하는 일이다."
(His primary function is to distinguish not between the good and the bad,
but between the good and the best.)
- 조지 스타이너,『안티고네들』(예일대 출판부, 1984)에서 |
평론가는 좋은 작품과 최상의 작품을 구별해야 한다고 조지 스타이너는 말한다.
그런데 그 '최상의 작품'(the best)이란 무엇인가? 어떤 잣대로 최상의 작품을 선정하는가?
조지 스타이너는 최상의 작품을 쓰는 가장 위대한 작가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든다. 그의 논리를 숙독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숙독 이전에 최상의 작품이라고 판단하는 가치관에는 당연히 계급적이거나 정치적 취향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독자 혹은 평론가가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무엇을 먹고 살아 왔는가, 어떤 일을 하며 사는가, 어떤 집에 사는가에 따라, 최상의 작품에 대한 평가도 평론가 혹은 독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연구자로서 나는 최상은커녕 작품인 척 하는 '문건'(文件)도 연구해야 하지만, 평론 대상을 뽑을 때는 나에게 감명을 준 '최상의 작품'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작품'을 선정하는 내 잣대에는 당연히 내가 살아온 모든 기억과 가치관과 문학적 취향이 한꺼번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상의 작품을 찾아가는 내 안테나, 내 더듬이는 왜 오키나와로 자꾸 향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연구자가 주목하지 않는 오키나와 작품에 주목하고 헌 책방에서 오키나와 문학 작품과 교과서를 헛간 뒤지듯 뒤지고 있을까. 왜 오키나와 샤머니즘 세미나를 들으러 멀리 찾아가고, 오키나와 미술전을 보러 가고, 1903년 오사카에서 오키나와 사람을 동물처럼 전시했던 '인류관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인류관>을 보고, 오키나와 사람(우치난츄)라면 반갑기만 하고, 오키나와 식당을 찾아가 그 맛 없는 보리밥을 훔쳐 먹듯 먹기 좋아하고, 왜 오키나와 노래「하나」(꽃, 아래 동영상)를 흥얼거리곤 할까. 왜 내 서가에 오키나와 책이 늘어가고 있을까?
까만 밤하늘 저 멀리 아령칙하게 빛 나는 별을 본다. 몇 억 광년 저편에서 전달되는 저 빛이 왜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맞은 편 건물의 전등빛이 내 눈에 도달한다.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오키나와에서 발신되는 그 빛은 어떻게 내 눈에 도달하는가. 오키나와 문학, 그 눈에는 어떤 눈부처가 누워 있는가.
(아래 노래를 클릭하면 오키나와 노래가 나옵니다. 한 노래 끝나고 나서 화면 아래 작은 화면을 누루면 또다른 오키나와 노래가 나옵니다.)
2. 오키나와, 제주도, 대만
어제(12월 11일) 오키나와 미술전을 보러 갔었다.
제주도에 가면 4,3 평화박물관에 전시된 강요배 등의 작품처럼, 오키나와 미술에는 눈아린 산호초의 아름다움과 지뢰·콘돔·휴지가 범벅된 비극적 영상이 대비된다.
방문교수로 오신 선생님과 우리말로 말하는데,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다가왔다. 얼굴이 작고 동그란 할머니였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네,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할머니는 가만히 다가와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한마디 물었다.
"어떻게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의아하게 올려다 보는 표정 앞에 나는 생각없이 답했다.
"오키나와 문제가 다른 나라 문제가 아니라, 오키나와 문제는 우리나라 어딘가랑 비슷하거든요."
나는 그저 뻔한 얘기를 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눈물빛을 반짝이는 것이다. 너무도 갑작스러워 나는 조금 당황했다.
"고마워요. 오키나와 역사를 후손에게 한국 사람에게도 꼭 가르쳐 주세요. 꼭 아시아 사람들이 이 오키나와 역사를 알아야 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일본군에게 속아 전쟁에 나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어요. 그리고 미군에게 너무 많이 시달렸어요."
갑작스럽게 흥분하는 할머니 손을 살짝 잡아 드렸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의 본토 상륙을 겁낸 일본은 오키나와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군보다는 오키나와 사람을 방패 삼아 대리전을 삼았던 것이다. 농사만 짓던 아버지가 수류탄을 들고 미군 탱크 밑에 기어들어가는 훈련을 받았다. 동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옥쇄를 강요 받아야 했다. 3살 4살 짜리 아이가 울면 미군에게 들린다고 젖병에 독약을 넣어 죽이라고 부모에게 지시했다. 동굴에서 나가면 여자들은 미군이 강간하고, 남자들은 탱크로 밀어 죽인다고 거짓 강요하여, 자결을 강요했던 것이다.마지막에는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으라고, 죽으면 "신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는 말을 들으며 자결을 명령받았다.
1945년 6월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 시작되고, 3개월 동안 오키나와 주민의 1/4인 12만명이 이런 식으로 '강요된 자결'을 했다. 비슷한 시기의 제주도 4.3 사건과 유사한 엄청난 주민 학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947년 2월 28일 장개석이 섬으로 상륙하면서 3만명의 타이완 원주민을 학살하는 '2.28 타이완 원주민 학살사건'이 있었다. 오키나와, 제주도, 대만은 본토인에게, 바둑으로 말하면 '버려진 돌'이었다. 옛날 일이 아니라 아직도 제주도, 오키나와, 대만은 미군의 영향 아래 있는 후기 식민지다. 제주도, 오키나와, 대만은 본토와 외세라는 '두 겹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이 적용되는 신식민지 섬이다.
언젠가 보았던 오키나와 지도가 생각났다. 붉은 색으로 색칠된 지역이 미군부대 지역이었다. 오키나와 섬의 20%가 미군 기지다. 일본 내 미군 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들어서 있다.
오키나와에는 동북아 최대 미군기지인 가데나 공군기지(Kadena Air Base)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MCAS Futenma)가 있다.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기지를 철수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눈시울을 닦아낸 할머니는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었을 때 우리는 일본에 속았어요. 우리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 미군도 철수하고, 핵무기도 떠날 줄 알았어요. 근데 그 밀약 아시죠? 일본이 미군과 핵무기가 남아도 된다고 하고, 자기들은 오키나와를 먹은 거에요. '우치난츄'(오키나와인이라는 오키나와 말)는 속았어요. 그때 우리는 반환운동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어야 했어요. 밀약해서 오키나와 땅을 미군에게 넘기고, 일본 총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어요."
사토 에이사쿠 (佐藤榮作, 1901-1975), 당시 일본 총리는 오키나와 반환협정을 성사시켰다는 이유로 197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유사 시에 오키나와에 핵을 반입한다’는 내용을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가 극비리에 논의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토 총리는 오키나와의 일본 본토반환 협상에 서 미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데 합의하는 한편, 유사시에는 핵의 긴급반입과 저장을 일본이 인정한다는 `밀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미군과 핵무기를 몰아내려던 우치난츄들 입장에서는 지배자만 미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던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스스로를 '우치난츄'라고 하지,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데 머뭇거린다. 아름다운 평화의 섬이 일본 최대의 이혼율, 최대의 실업률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다.
"오키나와에서 한국 분이 많이 죽은 거 알고 계세요?"
"네, 알고 있지요."
"맞아요. 한국 사람들을 조센징이라고 하고, 전쟁에 몰아 놓고, 또 일본말을 잘 못하면 미국 스파이라고 해서 한 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했어요."
미술관 안이라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면서 우리는 명함을 주고 받았다. 그녀의 명함에는 '가나가와 평화 유족회 대표'라고 써 있었다.
"아, 유족회 분이세요?"
"그래요......내 남편은 일본군의 징용에 징발되어 죽었고, 이후 나는 오키나와 방송국 아나운서 일을 했어요. 지금은 유족회 대표로 일하고 있어요..... 아, 학교 선생님이시네요. 너무 고마워요. 학생들에게 오키나와 현장을 꼭 알려주세요."
어디선가 본 사진이 떠올랐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한국인들을 위령하기 위해, 한국 팔도에서 가져온 돌을 두루고, 높이 4미터의 한국식 봉문을 쌓아올린 한국인 위령탑.
그리고 오키나와 소설, 시, 연극을 보다 보면 가끔 한번씩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우치난츄에게, 일본군은 유우군[友軍]이 아니라, 적군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200여점의 그림과 영상과 도자기와 사진을 보았다. 이날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이 아니라, 이 할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이 할머니가 잠깐 보였던 아주 작은 눈망울에서 반짝 빛났던 눈물 한방울이었다. 그 한방울 눈물 속에 오키나와에서 죽은 남편이 눈부처로 잠시 누워 있다가 사라졌다.
3. 재일 디아스포라
다음날(12월 12일) 학생들과 패밀리 레스토랑 식사 자리가 있었다.
내 곁에는 늘 활발한 케이코가 앉았다. 어느 자리에 있든 게이코는 늘 삽시간에 웃음과 긍정적인 생각을 전염시키는 은근한 힘의 발산지다. 지난주에 『재일(在日)』이라는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나는 게이코를 볼 때마다 느꼈던 생각을 농담처럼 건넸다.
"게이코, 연극 잘 했어요? 내가 못 가서 미안해."
"맞아요. 선생님 안 오셔서 섭섭했어요."
"연극에 나간 것도 그렇고 게이코는 정말 잘 산다.나는 게이코가 이 세상을 이겨나가는 거 보면 기뻐."
그러자, 게이코가 내 말이 끝내자마자, 훅,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어떤 덩어리가 터지듯 흐르는 눈물에 지워진 눈화장이 지워져 뺨을 시꺼멓게 적셨다. 나도 옆자리에 있던 친구들도 당황했다.
게이코가 왜 울었는지를 알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게이코가 내 수업에 들어온 것은 3년전 대학교 1학년 때다. 나는 한국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때로는 일본이나 한국 정치를 심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단 1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리고 3주간 지났을까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나간 뒤에 게이코가 단상 앞에 다가왔다.
"선생님, 저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고, 아버지는 일본 사람이에요."
이 말에 나는 멈칫 했다. 자기가 한국인과의 혼혈아라는 밝히는 것은 여기서 대단한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극도로 차갑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인의 피가 섞인 학생들은 1년 정도 지나야 나에게 비밀이라며 자기 가계를 밝히곤 했다. 그런데 3주만에 자기 존재를 밝히는 학생은 처음이었다.
그후 게이코는 존재의 뿌리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연세대학교에 1년 동안 유학 갔다 온 뒤, 완전한 바이링구얼이 되었다. 게이코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어떤 문제도 없이, 자기 존재 있는 그대로 모든 일을 더불어 해나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이제 게이코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 자기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그걸 갖고 가만히 있지 못하지. 자기와 비슷한 아픔을 찾아가기 마련이야. 게이코는 그래서 재일 디아스포라에 다가가는 거지?"
게이코는 눈물을 닦고 이제는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맞아요. 선생님 말이 맞아요. 그렇죠!"
"그래, 살아온 과거는 벗어날 수도 없고, 그냥 축복으로 알고 그렇게 살면 돼."
"맞아요. 맞아요. 선생님 말이 맞아요."
"선생님이 게이코를 좋아하는 것은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 했기 때문이야. 정면돌파!"
눈화장이 지워져 까맣게 흘러내린 뺨을 깨끗하게 지운 게이코는 함박웃음을 웃으며, 맞아요, 맞아요, 연신 반복했다.
4. 눈부처
연구실 창밖 도쿄의 밤하늘이 차갑게 느껴진다.
하늘 어디에 세상 모든 아픈 사람들이 눈부처로 쉬고 있을까?
하늘의 눈동자를 찾아 습관처럼 까만 하늘을 멀리 멀리 까마득히 멀리 쳐다본다.
이 글 맨 앞에 썼던 조지 스타이너는 위 책 2판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문학비평은 사랑을 빚진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Literary criticism should arise out of a debt of love.) |
내가 연구해온 오키나와 문학,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은 나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었기에 내가 그리로 다가가고 있는가. 그 책들이 내 삶에 지진을 일으켰던 위대한 영혼이었던가. 내 신념을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했던가. 내 정신의 녹슨 엔진을 정비라도 해주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