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는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신다.
팔정도란 무엇인가?
왜 팔정도를 따라서 살면 괴로움이 사라지는가?
이미 앞선 글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인생을 경험한 자로 판단하고 있다고 했으며
세존께서는 이것을 분석적으로 해체하여 오취온이라고 알려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오취온이 나라는 견해를 갖고 살면 그것이 곧 괴로움이라고
즉 괴로움이란 오음성고라고 설명을 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다고 보아야 한다.
괴로움이란 '나'라는 개념을 세우고 사는 것이니
이 나라는 개념을 뛰어 넘고,
그런 견해의 기반위에서 신구의로 생활을 하고
세존께서 알려주신
오온이 내가 아님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도록 해 주는 것이 팔정도이다.
즉 팔정도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정견 -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견해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 신구의로 정견을 생활화 함 (신행)
정정진, 정념, 정정 - 세존께서 말씀해 주신 것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는 작업.
이러한 견해는 제 개인적인 견해로 기존에 팔정도를 계정혜로 분석하는 것과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본 오온에 대한 이해,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맞다면,
팔정도도 저와 같이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팔정도란
무엇인가?
팔정도란 자아(attā)라는 개념은
잘못된 견해라고 알려주시고(정견), 자아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방법을 신구의로 알려주시고(정사유-정어-정업-정명),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정정진-정념-정정). 만약 정견~정명까지만
알려주셨다면 이것은 철학(하나의 생각, 가설)일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실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음을 ‘정정진-정념-정정’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래서
팔정도는 성스러운 진리(magga ariya sacca, 도성제)이다.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사성제를 아는 것. (나라는 것을 세우고 사는 삶이 잘못된
것이다!)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o ): 탐을 여읜 사유(nekkhammasaṅkappo 출리), 진을 여읜 사유. (abyāpāasaṅkappo) , 폭력을 여읜 사유( avihiṃsāsaṅkappo)
정어(正語, sammāvācā):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대는
말(기어, 망어, 악구, 양설) 하지 않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o): 살도음을 하지 않는 것.
정명(正名, sammāājīvo):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올바른 생계로 생활을 유지한다.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o): 사정근 (단단 斷斷, 율의단 律儀斷, 수호단 隨護斷, 수단 修斷).
정념(正念, sammāsati): 사념처(신수심법)의
마음챙김.
정정(正定, sammāsamādhi): 사선정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정견이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나라는 것을 세우고 사는) 인생이 괴로움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운 이유는 '나'를 오온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온이 내가 아님을 아는 것이 정견입니다.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이란
이전에 내가 오온인줄 알고 살 때의 버릇(탐욕과 화냄의 신구의)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내게 이롭게 하려던 사유를 멈추고 (정사유)
내게 이롭게 하려던 말들을 멈추고 (정어)
내게 이롭게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정업)
여법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명)
여기 까지는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의 윤리적인 신구의의 행위입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직접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나를 가정하면 우리의 주의(mano 意)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려고
아무 것에나 주의를 주게 됩니다.
이 부분을 교정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정념은 마음을 챙겨서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알아차리라는 말씀이고
선정을 통해서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여 해탈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왜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셨나?
여법한 삶이란 지금 이순간의 삶이다. 생각이 끊어진 삶이다. 집착함, 치우침이 없는 삶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majjhimā paṭipadā(중도)라고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경험하는 나의 자아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있는 줄 알고
‘나’라는 잘못된 환상을 세우고 사는데
그 잘못된 견해의 결과가 집착, 치우침(오취온)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한 삶이자 존재의 실상에 여법한 삶을 (팔정도)
'치우치지 않은 삶'인 중도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attā(자아)의 삶이 괴로운 이유는 나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유리하게 살려다 보니 신구의로 십악업을 짓게 되어서 윤회하고 과보를 받게 된다.
세존께서는 자아(attā)는 잘못된 환상이고 눈병이며 anattā(무아)가 실상이라고 알려주셨다.
이 anattā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견이다.
따라서 anattā의 삶을 신구의로 사는 것이 ‘정사유-정어-정업-정명’에 해당하겠지요.
anattā 임을 알면 당연히 그렇게 살수 밖에 없겠지요.
즉 anattā를 알기 이전의 신구의는
모두 자아(attā)를 기반으로 하며 (나, 나의 것, 나의 자아)
따라서 나에게 유리하게 생각되는 것으로 신구의를 실행하게 되겠죠.
그러나 anattā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면,
이제는 신구의가 소위 ‘정사유-정어-정업-정명’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바뀌겠죠.
그리고 anattā임을 체험하는 것이
수행인 ‘정정진-정념-정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세존께서는
anattā란 일단의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이고
확인 가능하다고 알려주시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8정도의 삶을 살게 되면 이제는 외부 경계에 대해서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이 회광반조이다. 이것이 치우치지 않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중도 즉 majjhimā paṭipadā 이다. 나라는 개념에 몰입되어서 살지 않는 방법이 중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중생은 느낌에서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봐야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를 반대로 추구하는 일단의 고행주의자가 나타난다. 어찌 보면 고행주의는 단순히 즐거움 추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고통 속에서 마음이 고통에 휩쓸리지 않게 간수할 수 있는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았지만 고행주의자들은 몸만 힘들게 했을 뿐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다. 세존께서 보살로서 고행하셨을 때와 같이…
이러한 두 태도의 문제는 즐거움, 괴로움이라는 느낌에 대해서 그것을
아는 주체인 ‘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즉 느낌이란
'나라는 존재의 기반 위에서 나타나는 태도'이기 때문에 여전히 attā(자아)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나’라는
집착인 오취온에 기반한 것이므로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고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기 때문에 느낌에 대해서 나라는 관점이 살아있는 한 쪽으로 치우친 관점이기
때문에 두 의견 모두 중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세존의 가르침이 즐거움도 취하지 않고 괴로움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중간 어디에 쯤 있어서 중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라는 관점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식이 머물지 않으셨기 때문에) 중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라는 자아'에 대한 문제 역시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즉 우문에 majjhimā paṭipadā 로 대응하신 것이다.
그런데 앙굿따라 니까야 A6:55 소나 경에서 보면 vina란 악기의 조율이 너무 팽팽해도
안되며 너무 느슨해도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세존께서 사용한 단어는 중도가 아닌 조화로운이란
뜻인 samata를 쓰셨다. 즉 이 경우는 중도가 아니다.
A6:55소나 경중에서
소나여, 그와 같이 지나치게 열심인 정진은 들뜸으로 인도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정진은 나태함으로 인도한다. 소나여, 그러므로 그대는 정진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의 균등함(조화로움)을 꿰뚫어야 하고 거기서 표상을 취해야 한다.
“Evamevaṃ kho, soṇa, accāraddhavīriyaṃ uddhaccāya saṃvattati, atisithilavīriyaṃ kosajjāya saṃvattati. Tasmātiha tvaṃ, soṇa, vīriyasamathaṃ adhiṭṭhaha, indriyānañca samataṃ paṭivijjha, tattha ca nimittaṃ gaṇhāhī”ti.
accāraddha : [ati + āraddha] exerting oneself
very or too much, with great exertion 極精勤
saṃvattati : : [saṃ + vat + a] exists; leads
to
atisithila
: [ati + sithila] very loose, shaky or weak
kosajjāya : [nt.] idleness; indolence
tasmā : [ind.] therefore
adhiṭṭhahati: [adhi + ṭhā + a]
stands firmly; determines; fixes one's attention on 確立, 決意, 執持
samatā : [f.] equality; evenness; normal state
paṭivijjha : [abs. of paṭivijjhati] having
penetrated; having comprehended 看穿적,了解적
gaṇhāti :
[gah + ṇhā] takes; holds of; seizes 拿,持,抓,取
첫댓글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영감충만한 글입니다. 무아를 보기 위해서는 오온이 찰라생멸하는 실체없음을 관찰하는 것이 선행되야 합니다. 수행은 그런 목적이죠.
그러려면 색과 식(심)과 심소(수상행)이 매순간 찰라생멸하는 무상을 관하는 연기관계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무상하고 실체없지만 업짓게 하므로 괴로움이고 따라서 무아입니다.
된장 ㅡ ㅡ;;; 정견 이것을 단순히 나가 아니라는견해? 법을 향하는 것은 아에 없구먼(나가 아니라는 견해도 법이라구 우길려나) 오취온과 오온을 동일시? 아에 눈을 파버리지 그래 그러면 눈으로 보는 온따위는 없을건데. 도대체 대가리에 든것이 작동하고 씨부리고 있다는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다시말해서 관념에 사로 잡혀서 씨부리고 있다는것도 모르는 머저리가 불교 공부한다고? 지랄 그만하세요. 그 쉬운 초선도 경험하지 못하고 대가리에 든것을 작동시키면서 지가 먼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알아차림"? 젖도 아닌 초선만 경험해도 니처럼 주접 안떤다(순간이나마 무지를 경험하니까) 어디서 쳐 들은것을 꼴에 씨부리기느니.
된장 ㅜㅜ 오취온은 오온을 통과 한것을 다시 말해서 백지를 생각해봐 백지위에 그림이든 글이든 그려지거든 이것을 오온을 통과한 어떤것 이라 하구 다른 말로 하면 인식가능한 융기(일어나다)거든 이것을 취작 하는것을 오취온 이라구해 인식은 이런 것이 없이 불가능해 이것을 식이라구하고 다시말해서 식은 오온이 없으면 성립이 안되요. 그리고 "나" 이것은 이런 오취온이 작동하지만 단순히 오취온만을 생각하면 안되요. 언어(좀 생각좀 해라 ㅜㅜ) 이것이 없으면 아주 달라져요. 동물에게서 자기를 생각하는 것과 인간에게서 자기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달라요.
@기억속에 그리고 언어 (생각좀하자!) 이것은 인간에게 지배적 양식이거든. <천개의 고원> 이것을 예로 든다면 두가지 판이 있어 하나는 초월적인 판(쉽게 말해서 언어에 고유한 판 그러나 결코 스스로 있을 수 없는 판) 또 하나는 내재성의 판 선정은 내재성의 판으로 향하는거고 언어는 초월적인 판이거든 여기서 언어의 초월적인 판이 여러가지를 만들어 내는대 너처럼 그런 전개의 판이기도 하거든 이런 전개의 판이 "나"를 합리화 하고 강화 하거든 요기서 우,열 유비등이 작동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의 그물망(인드라망 이것도 그중에 하나임)을 만들어내요. 이것을 절단하는것이 내재성의 판으로 향하는 선정이거든.판 하니까 불성 어쩌구하면 안되요
정견: 나라는 것이 잘못된 개념이라는 견해. 따라서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함.
스스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전혀 이해와 설득력이 없는 글에 어떻게 답을 해 주어야 할지 난감하게 하는 댓글입니다. 본인 스스로 정리가 되도록 기다릴 밖에요^^. 그런데 그 쉬운 초선이란 말에는 심한 거부감이 드네요. 초선이 쉽다하니 참으로 수행자들이 다 바보인가 아니면 말씀 하신 분이 이상한 사람인가??? 전 인복이 없어 그런가 초선정을 경험했다는 분을 거의 보지 못해서요. 그래서 제가 간화선에도 사선정이 있냐고 물은 겁니다. 그런데 초선이 뭔지 알기는 하는 겁니까? 표현이나 이해의 수준은 전혀 아닌 듯 한데
초선 난 여럿 봤는데. 그들은 특별한 경험이라 기억에 각인되여 있지만 조심스러워서 말을 안하는데 또 말하므로서 위험을 초래하니까 더더욱 조심하거든. 그런걸 알아 차리지 못하니 당연하게 이런 소리 하겠지만 ㅋ(한가지 말해주자면 사고의 폭이라든가 유연성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강렬한 행복감도 있어서 마치 모두를 사랑하리 왜치는 것같은 경헙적 상태를 암.) 요론거 모르지. 하기야 듣고 싶은것만 원하니 위 댓글이 멀 말하는지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겠지 있는거라고 비난. 이것만 유일하게 반응하는 대단한 인간. 삶을 빼버린 8정도? 많이 하세요.
@기억속에 이거 말하면 틀림없이 정신병이 어쩌구 할건데. ㅋ 어짜피 못알아 들으니까.오이디프스를 살짝 비틀어서 언어의세계 이것을 상징 어떻구 은유가 어쩌구 하는것에 연결 시켜서 분석하면 정신병 환자도 왜 그렇게 되였나가 파악됨.ㅋ 관념놀이 하는 이들이 이런것 필요 없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자기 우물 속에서 자기 견해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른 정견이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이곳에 글을 올리는 것은 공유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생각이 아닌 함께 생각해 보자는 거죠.
따라서 자기 글이지만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억속에 님 글은.. 내용은 덮어놓고.. 상대를 험구하고 있어요. 그와 같은 비방은 삼가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내용이 머죠? 누구나 아는 그런 것이 내용? 험구?
@기억속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구 하더라도 반복하면 호,불이 나타나요. 특히 저런 내용의 글이라면 더욱 스스로의 관념을 강화하는 용도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상태에서 경계를 만들어요. 일반적으로는 이런것이 문제가 안되지만, 불교공부 특히 선으로 향해야 하는이가 전런 상태를 반복하여 강화한다면 관념 놀음에 빠질 뿐이에요. 어떤글이든 자신의 실질적인 체험이 나와야되고 체험을 향해가야해요.저글에서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면 관념놀이에 매몰된자 이거나 교양을 원하는 이거나 둘중에 하나겠죠.
(출세간의) 정견은 한마디로 무아 anatt?로.. 5온이 내가 아니다 라는 견해라 한 것.. 기억속에 님은 딴 소리하지만..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요..ㅎㅎㅎ^^
단 <잡아함경>에서 정견은 4성제대로 아는 견해라 했으니.. 4성제가 고집과 고멸임을 알면..
무명이 있으면 고가 집하는 것으로..
무명이 멸하면 고가 멸하는 것으로.. 아는 견해를 정견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출세간? 정견은 무아다? (단순하게?) 오온이 내가 아니다? 대단한 생각이십니다 그려 ㅎㅎㅎ 밥은 드시는지 물은 호흡은 하시는지? 여기서 멀로 말하고 보고 글을 쓰는지. 내가 아닌 가아가 그렇게 하심 ㅋ 한마디만 할게요 공 버리고 생주이멸 이것을 보세요. 최소한 저항이먼지 존재가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언제부터 불교가 관념론이 된겨. ㅋ
@기억속에 생노병사,생주이멸 하는 나는 없는겨? 그럼 나를 나라구 하지 어라구 해야함? 오온으로 보고듣는데 이것을 나의 눈이 본다라고 하는데 오온없는 나가 있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 생각 난다. ㅜㅜ
오온없이 님이 할 수 있는걸 나열해 보시요? ㅋ 재미있는 관념놀이 ㅋ
더 재미있는 놀이 다양한 아트만에 대해 논해보시요? 배경의식 이것을 무의식이라구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에서 어떤 형태로 어떤 모습으로 변하며 포획하는지.ㅋ 아는거라곤 누군가 말한 것을 블라블라 하겠지만 그러나 미안 하지만 누군가 블라블라 할때 아트만도 변신을 한데요. (무아도 아트만이됨)
기엇속에 이 친구는 말투부터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는 쓰레기통이 아니예요. 지 맘에 안든다고 아무렇게나 ㅋㅋ 거리면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