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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
저주 받은 돈도 축복이 되게 하시는 분
복권이 당첨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우리나라 돈으로 3억 원 상당의 복권에 당첨된 사나이의 가족이 벌이던 자축 파티가 살인극으로
돌변하여 일가족이 패가망신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93년 9월 25일 스페인에서 있었습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경찰은 이날 현지의 한 청년이 복권이 당첨돼 4천 9백만 페세타(약 3억 원)를
타게 되자 지난 23일 가족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즐기던 중 가족에게 나눠 줄 액수를 놓고 17세의 여동생과 심하게 말다툼하다가 그만 칼로 동생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형에게 자신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말해달라고 청합니다.
유산이라면 형제에게 모두 주었을 테지만 형이 모두 가로채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전혀 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예수님은 돈이 공평하게 분배되게 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돈보다는 사랑에 신경 쓰도록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불행은 돈 때문에 깨지는 관계 때문입니다.
월간잡지 'MONEY'의 통계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82%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돈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미국인의 53%가 최고로 걱정하는 것도 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돈보다 관계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유태인 세 명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파묻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몰래 그곳에
되돌아와서 돈을 꺼내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세 사람은 현자로 알려져 있던 솔로몬왕에게 가서, 세 사람 중에서 누가 돈을 가져갔는가를 알아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왕은 “당신들 세 분은 매우 현명한 분들이니까 우선 내가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당신들 세 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한 남자와 결혼하기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아가씨는 다른 남자와 사랑하게 되어, 처음의 남자를 만나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위자료도 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위자료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파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노인에게 유괴되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결혼할 것을 약속했었던 남자에게 파혼하자고 요구했는데도 위자료도 내지 않고
허락받았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돈을 빼앗지 않고 그녀를 그냥 놓아주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칭찬받을 사람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첫째 번 남자는 “그녀와의 파혼을 허락해 주면서도 위자료를 받지 않았던 남자가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도 첫 번째 남자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남자는 “이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첫째, 유괴라고 하는 것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짓인데, 돈도 받지 않고 놓아주었다는 것은
조리가 없는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큰소리로, “그대가 돈을 훔친 범인이렷다!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이나 처녀와 약혼자 사이의 인간관계, 혹은 그사이의 긴장에 주목하는데, 그대는 오로지 돈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대가 범인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면 돈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복권 당첨금 때문에 형제끼리 싸울 때 부모가 마음 아파함을 느꼈다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남매에게 부모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부모가 있다면 형제는 싸우지 못합니다.
그러면 돈이 관계를 깨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진다면 이는 예수님의 현존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만 대면 다 금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신화는 좋은 의미의 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다스라는 왕이 신으로부터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축복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어버렸고 음식도 그래서 먹을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외동딸도 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신이 인간이 황금을 제어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면 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역할을 하려고 하십니다.
돈을 나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지는 일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며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는 마지막 말을 하듯,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그래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신학자 팀 켈러(Tim Keller)는 “진정한 자유는 ‘구속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구속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 멍에를 메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멍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돈과 관계의 행복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제어할 능력과 그릇이 된다면 하느님은 얼마든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2,13-21
돈 외에도 소중한 가치들이 참 많답니다!
연피정 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을 일주일 내내 동반해드리고 왔습니다.
수도회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걸어가는 형제들이라 남 같지 않았습니다.
때로 존경스럽기도 하고, 때로 측은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약한 수도자로서, 이 어려운 시대 어떻게 가난을 살수 있겠는지?
이토록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가난의 가치를 어떻게 세상에 설명할 것인지 고민도 참 많이 했습니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의 인생 전체가 일관되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가 싶습니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그리고 공생활 기간 내내 가난하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는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가난의 끝판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표현을 하시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유랑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 그리고 가진 바가 없어 나눌게 없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저 너머 세상, 하느님 나라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는 몇천 배, 몇만 배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부자들을 멀리해서도 안됩니다.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재물이 여러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영적으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됩니다. 감동을 줘서 많이 내어놓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입니다.
부자는 크게 두 가지 부자로 나눠집니다. 안하무인의 부자들과 착한 부자들로 나눠집니다.
절대로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경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평생 땀흘리고 정직하게 모아서 일어선 부자들, 박수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한 구원의 길을 선포하도록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
탐욕을 조심하여라.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지금 이 상황은, 형제간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생겨서 예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듣는 앞에서 ‘탐욕’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죽은 이들의 다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다툼을 해결하는 것도 ‘죽은 이들’이 할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희의 탐욕을 채워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도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3) 뒤의 말씀을(탐욕에 관한 가르침을) 그 사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즉 형제간의 다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에 관한 다툼이 생긴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에, 둘 다 탐욕을 버리면, 또는 한쪽이라도 탐욕을 버리면 그 다툼은 바로 해결됩니다.
(만일에 둘 다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그 다툼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생명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선행과 사랑 실천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선도 없고 사랑도 없이 돈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그 돈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더 유리하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어떤 부자가 진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빈손’이 될 것이고, ‘빈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돈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사람이 많지만, ‘부자인 채로’ 생을 마친 사람은 없습니다.
탐욕에 관한 가르침 뒤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많이 가진 자들이 잘난 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고, 어리석은 탐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가 모은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의 목숨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만물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산도, 목숨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이웃에게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죄 - ‘탐욕’입니다.
또 그는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죄 - ‘방탕’입니다.
또 그는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죄 - 교만입니다.
여기서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구의 차지도 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에게 몇 시간의 여유는 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