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黃昏)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두러운 손을 힘께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5월의 병상(病床)에서
(『신조선』, 1935.12)
♣해설
이 시는 육사의 실질적인 등단작으로, ‘골방’에 있는 화자가 청자인 ‘황혼’에게 말을
건네는 독특한 화법으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화자가 처해 있는 ‘골방’과 ‘황혼’의 함축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골방’은 1920년대 초 『백조』 동인으로 대표되는 감상적 낭만주의 시인들이 일률적으로
추구하던 밀실과 같은 현실 도피의 공간이 아니다. 이 ‘골방’은 화자인 시인이 번민과 고
뇌의 비극적 자기 인식을 하게 되는 공간이며, ‘황혼’은 식민지 현실 상화의 화자에게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세계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커튼을 걷으며 외부와 차단된 고
독감 속에서 안식과 평화의 황혼을 맞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시의 형태는 5연 20행에, 각 연이 4행씩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형적 형식을 보
인다. 이로 미루어 육사의 시 의식이 한시나 시조와 같은 전통적인 시 형태를 현대적으로
수용하는 제서 출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연의 시 형태를 시상에 따라 나누면 다
음과 같이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연으로 전체 부분에 해당하며 화자의 독백
형태로 되어 있다. 2단락은 2·3·4연으로 황혼이라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소망을 기원문 형
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본문 부분이다. 3단락은 5연으로 다시 화자의 독백 형태로
되어 있으며 해결 부분에 해당한다.
1연에서는 이 시의 핵심적인 이미지인 ‘골방’과 ‘황혼’의 대립적 관계를 보여 준다. ‘커튼’
은 황혼의 우주와 골방의 중간 위치에 존재하며 ‘걷고’ ‘맞아들이는’ 화자의 행위에 의해
외부 세계를 그의 내면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통로 구실을 한다. 이에 따라 온 세상으로 번
지고 스며들어 끝없이 확대되는 ‘황혼’이 ‘골방’으로 비쳐 들어오게 됨으로써 ‘골방’의 폐쇄
성은 황혼이 펼쳐진 우주로 개방, 확장된다.
2연에서는 존재의 외로움을 인식한 화자가 ‘황혼’의 손에 입을 맞추던 소극적 행위에서
‘황혼’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게 / 나의 입술을 부내’는 적극적 행위로 변모한다. 이로써
화자는 골방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황혼만큼 확대된다. 그 모든 것이란 바로 3연에서의 ‘별’·
‘수녀’·‘수인’과, 4연에서의 ‘행상대’·‘토인들’, 2연에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들이 3·4연에 이르면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분명해진다. 이것들은 모두 버림받은 것, 쓸쓸한 것, 외로운
것들로 화자는 그들을 부드럽게 안아 뜨거운 입맞춤을 보낸다. 한편 전체의 움직임에 따라
지구의 반쪽이 낮이면 다른 반쪽이 밤이므로, 화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의 뜨거운 태양 볕을
모았다가 곧 어둠을 맞게 되는 지구의 반쪽에 놓여 있는 모든 고통의 대상을 위무(慰撫)해
주고자 한다. 따라서 화자는 황혼을 맞는 것이 즐겁고 보람찬 일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
지구의 반쪽’이라는 구절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놓여 있는 모든 피지배 민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자아의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육사를 조
국의 광복을 위한 처절한 역사 현장 속으로 뛰어들게 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5연에서 화자는, 황혼이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찾아와 주리라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한편
으로 황혼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
를’것 같다는 우려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자가 자신이 추구하려는 안식과 평
화의 세계를 단지 자신에게만 실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외로운 인간들에게까지 확대
시키고자 함에 따라, 그것을 평화와 안식의 세계로 향하려는 적극적인 저항 의지로 발전시
킴으로써 후일 「절정」 · 「광야」로 대표되는 항일 저항문학의 정수를 펼쳐 보이게 되는 것
이다.
[작가소개]
이육사(李陸史)
본명 : 이원록(李元祿), 원삼(源三), 활(活)
1904년 : 경북 안동 출생
1915년 예안 보문의숙에서 수학
1925년 형 원기(源祺),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
1926년 북경 행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 형무소에 3년간 투옥됨
이 때의 수인(囚人) 번호(264)를 자신의 아호로 삼음
1932년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입교
1933년 조선군관학교 졸업 후 귀국, 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하에 체포와 구금생활 반복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1943년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사망
시집 : 『육사시집』(유고시집,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