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12: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 요 12: 18 표적을 행하심
요 12: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이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1]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종려나무(Tamar)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중요한 식물 중의 하나다. 그러나 성경에 종려나무로 지칭된 것은 실은 대추야자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종려나무와 대추야자는 식물학적으로는 별개의 식물이다.
대추야자는 학명을 phoenix dactylifera L. 이라고 한다. 그리고 히브리명은 tamar, 그리스명은 phoinix, 영명은 date palm, 독일명은 Dattelpalme라 하는데, 대추같은 열매가 달리는 야자나무이기 때문에 대추야자라 한다.
마라를 떠나 엘림에 진을 쳤다. 엘림에는 열 두 샘이 있고 종려나무가 일흔 그루나 있었다(민 33: 9).
* 겔 41: 18-20 – 18 널판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각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19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라. 이쪽 종려나무를 향하였고 하나는 어린 사자의 얼굴이라. 저쪽 종려나무를 향하였으며 온 성전 사방이 다 그러하여 20 땅에서부터 문 통로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엘림에는 아래로 흐르는 물과 위로 자라는 나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흐른 다음, 우리 안으로부터 자라나는 부활 생명에 대한 그림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단물뿐만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씁쓸함에서 달콤함으로 바뀌어진 물과 엘림에 있는 열두 샘으로부터 흐르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을 가지려면 십자가의 체험인 마라로부터 부활의 체험인엘림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라에서 엘림으로 전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치료하는 나무에서 자라 번성하는 종려나무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라에서 지체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엘림으로 나아가 거기에서 그분의 군대로 강화되기를 요구하신다.
마라에는 농장이 없고 씁쓸함을 달게 바꾸는 것밖에 없기에 성장이 없다. 그러나 엘림에서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풍성과 하나님의 온전한 승리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농장과 종려나무 숲을 누린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씁쓸함에서 달콤함으로 바뀐 물 안에서, 그 물에 의해, 그 물과 함께 종려나무들처럼 자라야 한다. 그럴 때 그 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과 완전한 승리를 표현하는 흐르는 물이 될 것이다.
* 아 7: 7 -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와 늘 푸른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영존하는 승리를 뜻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과 영광을 지키는 문지기이시다. 그리스도는 견디시며, 감당하시며, 지속하시며, 널리 세력을 펴시며, 영존하시는 승리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소생시키고 살리시는 영이시다.
* 고전 15: 45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번성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또한 생명의 만족, 환난에 대한 승리 안에서의 즐거움을 상징한다.
마태복음 21장 8절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이들은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나무 가지들은 종려나무 가지들로서(요 12: 13), 승리하는 생명과(계 7: 9) 장막절에 의해 예표 된 것처럼(레 23: 40. 느 8: 15) 이 생명의 풍성한 산출을 누리는 만족함을 의미한다.
무리들은 겸비하신 왕의 오심을 축하하기 위해 그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들을 사용했다. 종려나무는 감춰진 샘물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하늘로 높이 치솟아 자라난다. 그들의 어떠함으로 온유하신 왕을 존귀케 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분이 승리하는 생명이 있는 그런 분임을 인식했다.
7절과 8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옷’은 사람의 행위에 속한 인간의 미덕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그분이 탈 수 있도록 나귀 위에 그들의 옷을 얹어놓아 구주를 존귀케 했으며, 무리들은 그분이 통과할 수 있도록 그들의 옷을 길에 폄으로 그분을 존귀케 했다.
2]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호산나(Hosanna)"란 것은 히브리 말(*)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무리들이 외친 환호성이다.
* 마 21: 9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특히 시 118: 25에 나타나는 이 말은 초막절에 제사장들이 제단 주위를 돌면서 암송하던 구절이기도 하다.
* 시 118: 25 -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초막절 의식에서 제단에 물을 부을 때 레위인들은 시편 118편을 찬양했으며 제사장들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를 외쳤다.
3]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편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다.
시편 118: 22-25는 이렇게 말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이것은 메시아 예언시이다.
4]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많은 이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었던 것 같다.
요 12: 14 어린 나귀 -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카일(Keil)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낮아지심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 의견도 평화의 뜻을 제외함이 아니다(Grosheide).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어린 나귀를 타시고 백성들의 환호행렬에 참가하신 것은 예수님의 지상 공생에 사역의 절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왕이나 장군의 입성으로 축하행렬에 기꺼이 참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죄와 죽음을 정복한 왕이요 메시야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고대에 나귀나 노새는 종종 성읍의 방백이나 지도자들이 타던 짐승이었다.
* 삿 10: 4 -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 왕상 1: 33 -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왕은 위풍당당한 말을 탔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는 스스로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함과 온유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 12: 15 나귀 새끼 -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그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야의 영광 얻으실 것을 예표하는 행동 설교이다.
그가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만민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바리새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예언하였다. 곧, 19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라고 하였다.
1]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본문에 인용된 예언은 슥 9: 9의 말씀이다.
* 슥 9: 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온 딸"이란 말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메시야께서 평화를 가지고 오실 터인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것 없다.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도 그 소망(메시아가 장차 오실 소망)중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부탁 받았으니, 그가 오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욱 평안을 가져야 할 것인가?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한 나귀 새끼를 빌려오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나귀 한 마리도 없으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참 소유주이시다.
2]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은 이런 무의식적 예언을 흥미 있게 취급하였다. 그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의식적 예언에도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
요한복음의 특색 중 하나는, 표적의 책(book of signs) 곧, 신령한 뜻을 나타내는 이적들과 상징적 행동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은, 바리새인들의 말(19절)을 인용한 뒤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다(20-22).
그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뒤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세계적 복음 전파)을 표적으로 말함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해설하셨다(23-32)
요 12: 16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의 주(主)되신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예수님의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그 일이 슥 9: 9의 성취하였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1]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다.
후에 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때까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는 과정이 단순치 않은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시련의 고개를 넘은 뒤에 비로소 일찍부터 움직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뻐하게 된다.
* 시 119: 71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2]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그는 지금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제자들은 처음에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께 대한 것임을 알지 못했으나 그가 영광을 얻으신 후에 즉 그가 부활하신 후에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다.
3]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곧, 현재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 모르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 알게 되기 위하여 그동안에 파란곡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요 12: 17 죽은 자 가운데서 -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
여기서는 그 무리가 예수님을 성대히 영접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들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신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들은 까닭이었다.
그 사실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한 자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
1]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들은 계속 증언했고 이런 까닭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맞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이 표적 행하셨음, 즉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 행하셨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영접하였고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증언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환영을 받으신 것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추가적 증언이었다.
요 12: 18 표적을 행하심 -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고 그 사실을 본 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환영하고 그를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
1]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죄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인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한다.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알수 없는 내일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질수 있는것 같아요. 오늘 하루도 즐거운 행복한 하루 되세요.💖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