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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보혜사 - 성령
김희성 /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신약학)
Ⅰ. 들어가는 말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은 매우 급박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의 실재성, 지금 여기에 있는 하나님과 역사적 예수의 현존, 바로 이것을 가장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상황속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은 더욱 더 시급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성령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많아 부흥회, 철야기도 등을 통하여 성령의 세례, 성령의 충만, 성령으로 거듭남을 매우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에 편승해서 일어난 성령운동은 여러가지 기현상을 포함하여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지어 그것은 극도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성령에 대한 성서적인 심오한 이해의 부족때문에 구속사를 주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적 활동과는 거리가 먼 표피적이고 지엽적인 은사위주의 신비적이고 무속적인 성령운동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표피적인 성령운동이 야기시키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현존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염두에 두지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이 엄청나게 호도되고 있다! 이제 성령의 체험과 성령의 운동도 기독교의 신앙은 성경을 기초로 하기때문에 그것의 진실성이 성경을 근거로 검증되어져야 한다. 이처럼 지금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신약적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신약저서들을 살펴보면 바울서신들(예,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과 누가복음 -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이 성령을 특별히 강조함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신약에서 성령신학의 절정에 해당하며 성령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요한복음의 성령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령에 관한 말씀들의 정돈과 관찰
요한복음의 성령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령에 관한 말씀들이 요한복음에 어떻게 정돈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33-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써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3:5-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하는 말씀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찌니라.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보혜사 - 성령에 관한 말씀)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5:26-2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16:7-11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6:12-15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의 성령에 관한 말씀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임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라는 언급으로 시작하고 이 언급에 걸맞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방으라고 말하시며 숨을 내쉬므로 성령세례를 주셨다는 묘사로 끝맺는다. 그럼으로써 이 두 진술은 요한복음 안에 있는 모든 성령에 관한 진술들의 틀을 만들어주며 기독공동체에는 이미 성령의 세례가 성취됨을 전제하고 있다.
이 틀 안에 있는 성령에 관한 진술들을 개론적으로 정리해보면;
1)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예수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신 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성령은 여기서 말씀선포와 연결된다.
2) 사람은 성령으로 새롭게 나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령을 받아야한다. 성령은 여기서 거듭남과 연결된다.
3) 육의 영역과 영의 영역은 엄격히 분리된다. 영은 유일한 생명가능성으로 육에 정반대이다. 육의 영역에서 영의 영역으로 향한 모든 질문과 시도는 헛 것이다. 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가능케하는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주어지게 된다.
5) 5개의 보혜사 - 성령에 관한 말씀에선 진리에로 안내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부각된다.
개괄적인 고찰에 의하면 우선 성령은 기적이나 눈에 띄는 심리적 현상을 야기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공동체에 있어서 진리에의 인식과 말씀선포의 주체이며 원동력이다.
이런 큰 틀안에서 두 동심원의 내부 핵심원처럼 눈에 띄게 또 하나의 작은 틀을 이루는 것은 보혜사에 관한 5개의 언급들이다. 이것들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진술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영광을 부어주시는 묘사 사이에서 앞뒤에 있는 바로 이들 진술들과 상당한 간격을 두고 고별설교(13:31-16:33)의 중심부에 밀집해있다. 바로 이 내부의 작은 틀안에 있는 보혜사에 관한 5개의 언급들이 요한복음의 성령이해에 열쇠가 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독특하고도 중요한 부분에서 성령은 특이하게도 보혜사로 불리어지고 있다. 성령을 παρακλητοS라는 독특한 용어로 묘사한 것은 신약성서 가운데 요한문헌 뿐이다. 그렇다면 왜 제 4복음서 기자는 성령을 보혜사라는 언어로 기술했으며 그것을 특별히 고별설교 안에서만 집중적으로 사용했는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보혜사를 사용한 요한복음서 저자의 성령이해는 어떠한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보혜사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연구를 보혜사에 대한 연구사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2. 보혜사에 대한 연구사
2.1 문헌비평 연구사
보혜사에 관한 말씀들이 이런 작은 틀에 들어가 있는 특성때문에 학계에선 그 말씀들의 문헌적인 출처가 어디인가에 대해 견해가 갈린다. 빈디쉬 (H.Windisch)는 다섯개의 보혜사 말씀들은 원래 고별설교의 한 부분에 속했던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집필 전에 이미 존재했었는데 요한복음서 기자에 의해 고별설교의 문맥안으로 삽입되어졌다; 그것들은 고별설교의 문맥에 틈을 만들지 않고 꺼집어 낼 수 있고 꺼집어 내면 오히려 문맥의 관련성은 더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하워드 (W. F. Howard)는 이에 동조하면서 “빈디쉬의 특별한 공헌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다섯 가지의 보혜사 말씀들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들에 반하여 쉬나켄부르그 (R. Schnackenburg)는 이 말씀들이 잘 다듬어진 돌처럼 고별설교의 구조안으로 삽입되어졌다는 유포되어진 견해에 대항하여 그들은 각각 그들의 위치에서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기능을 행사한다는 것이 확정된다고 생각한다. 이 말씀들이 문맥에 이질물이라는 견해와 그들이 문맥과 결합되어 있다는 견해는 서로 정반대가 된다.
이런 견해의 차이에 직면하여 레벨 (W. Rebell)은 정당하게 문헌비평 자체에 대하여 신중한 입장을 표명한다: 문헌비평은 극도로 절약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문헌비평에선 잘못하면 성서적 본문들이 잘게 나누어지고 우리의 논리에 맞게 개별적인 부분으로 분리되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문들의 결집성에서 더 강하게 출발해야 하고 그들을 동시적인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 본문은 그것이 거기에 서 있는대로가 의미가 있고 그 자신의 논리를 갖는다. 특히 요한복음에선 과도한 문헌비평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저자에 의해 의도된 근사치안에서의 정확성이 그것을 통하여 여지없이 파괴된다.
이런 입장으로 그는 “사람들은 쉬나켄부르그와 함께 복음서 기자가 미리 발견하고 보혜사들에 대한 말로 표현한 하나의 보혜사 전승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거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레벨의 입장이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처럼 보인다.
2.2 종교비평 연구사
종교비평은 성서본문의 이해를 위하여 그 본문의 병행들, 예를 들면 구약의 병행들, 유대교 문헌의 병행들과 헬라세계의 병행들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보헤사에대한 종교비평 연구는 여러가지 다른 해결 가능성을 제시한다.
2.2.1 구약의 배경
2.2.1.1 후계자의 개념
브라운 (Brown)은 보혜사의 배경을 이별하는 상황에서 전임자가 후임자를 택해서 자기의 일을 완성토록 하는 구약의 예에서 찾는다. 예를 들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가 이별의 상황에서 예수와 보혜사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즉 모세가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을 마치고 떠나가면서 여호수아에게 책임을 맡기는 입장이 마치 예수가 이별하면서 보혜사를 보내어 자기의 책임을 다하게 하는 입장과 비슷하다고 본다. 브라운은 보혜사를 선구자의 일을 완성하는 후계자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2.2.1.2 변호자 개념
모빈켈 (S. Mowinckel)은 구약적인 변호자에서 보혜사의 표상을 찾는다. 구약적인 변호자 개념은 다양하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이 변호자로 등장하고 천사도 변호자로 나타나고 성령도 변호자의 기능을 떠맡는다.
2.2.2.1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배경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인자사상이 나오는데 슐츠 (S. Schulz)는 이 후기 유대교의 인자사상을 요한적인 보혜사의 표상으로 본다.
2.2.2.2 쿰란 문서의 배경
베츠 (O. Betz)는 쿰란문서에 나오는 천사장 미카엘과의 관계안에서 요한복음의 보혜사 표상을 연구했다. 미가엘은 천상과 지상에서의 두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두 역할이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보혜사에게로 각각 나누어져 전자는 “천상의 역할을, 후자는 지상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병행이 된다는 것이다. 이 천사장은 또한 쿰란에서 선택된 자를 인도하며 깨우치게하는 “진리의 영”과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동일시되었다는 전제는 베츠로 하여금 요한복음에 있는 보혜사의 지상에서의 사역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그러므로 쿰란문서의 천사장 미카엘이 요한적 보혜사 형태의 배후에 서 있다고 본다.
2.2.3 영지주의 배경
불트만 (R. Bultmann)은 보헤사란 단어가 영지주의적인 배경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는 영지주의는 사람들을 그들의 인식의 과정에 도움을 주는 수많은 돕는 자의 형태들을 알고있기 때문에 이 “영지주의적 돕는 자 상”의 개념적 범위가 요한의 보혜사 개념의 배후라고 추론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종교사적인 해석시도들은 모두 매우 불안정한 이론체계들이다. 사람들은 종교사적 병행들이 확실히 요한적인 보혜사 표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떤 영향인지 더이상 잘 규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마 많고 다양한 영향들이었고, 제 4복음서 기자가 그것들을 융합하고 나중에 더이상 서로 분리되거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게 개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요한적인 보혜사 형태의 단선적인 종교비평적인 도출은 학계에서 점점 더 거부되어진다. 종교사적인 배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요한복음의 보혜사-말씀들의 해석을 위해 사람들이 아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만약 우리가 요한적인 보혜사-형태가 원래 어디에서 따왔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거기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확실히 우리는 보혜사의 이해에 진일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종교사적인 개념범주로부터 어떤 바른 선을 요한의 사상세계로 끌어낼 수 없다! 요한기자는 보혜사를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진술의도들을 섬기도록 채용했다. 그리고 이 진술의도들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사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은 그 때는 다만 하나의 여백적인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첨예화해서 이야기하자면, 밝혀내야 하는 것은 보혜사가 무엇을 행하는가, 즉 요한의 신학 구조안에 있는 그의 기능이다. 그의 출처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3. 보혜사 말씀들의 자리인 보혜사 - 성령
3.1 작별인사의 문학적인 장르
만약 우리가 보혜사가 언급되는 거시 문맥을, 즉 요한복음의 고별인사 부분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요한적인 보혜사의 기능에 접근하게 된다. 유형적으로 이 고별인사는 초대교회의 주변세계에 널리 퍼져있던 문학적인 유언의 장르에 속한다.
이 장르는 헬라적-로마적 고대에서 잘 파악될 수 있고, 더 많은 의미를 물론 구약-유대적인 전승영역에서 획득했다.
문학적인 유언에서 남은 자들을 위해서 당연히 죽어가는 자의 매우 중요한 마지막 말이 나온다. 그러한 표현들은 일련의 집필수단들을 통하여 커다란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확대된다. 예를들면 죽는 자의 마지막 말씀이 삶의 공동체를 본 뜨거나 제의적인 의미를 갖는 마지막 만찬때에 행해진다. 죽어가는 자의 이 마지막 말씀이 그것을 통하여 특별히 품위있는 특성을 갖는다. 문학적인 유언은 거의 항상 남아있는 공동체의 안녕을 목적한다. 유언의 청취자들은 기도나 축복행동들과 죽어가는 자의 교훈을 통하여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의미있는 미래의 전망을 깨닫도록 준비되어진다. 그들은 죽는 자가 생전에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행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지불한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도록 의무를 지게된다.
요한적인 작별인사에서 요한적 공동체는 제 4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예수의 죽음 후의 구속사적 상황안으로 지시되어진다. 이제 요한복음에 있어서 성령이 작별인사에서만 “보혜사”로 언급된다면, 이 표시는 작별인사에서 미리 상정된 상황과 어느정도 관계가 있다고 추측된다. 사실로 보혜사 칭호를 통하여 성령은 어느정도 인격화되고 그것을 통하여 예수의 후계자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별하는 자의 후계자 형태는 작별인사에서 좋은 의미가 생긴다 : 후계자를 통하여 작별하는 사람의 사역이 계속되어진다. 여기서 계속성이 고려된다.
3.2 예수와 보혜사 사이의 연속성
예수의 죽음후에 구속사적인 상황에서 소위 보혜사는 예수의 과제를 떠맡는다. 사실예수의 과업과 보혜사의 어떤 과제들은 요한복음서에서는 동일하다. 예를들면;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 보혜사도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 안에 거한다.
예수가 가르친다(7:14ff;8:20등등). 보혜사도 가르친다(14:26).
예수가 증언한다(5:31ff;7:7등등). 보혜사도 증언한다(15:26).
예수가 진리로 인도하거나 진리에 보혜사도 진리로 인도한다(16:13).
대하여 증언한다(18:37;비교1:17;14:6)
예수와 보혜사 사이의 (이별하는 자와 그의 후계자 사이의) 계속성이 요한복음의 작별인사에서 더욱이 예수가 14:16에서 간접적으로 자기를 보혜사라고 칭함을 통하여 (그러나 성령-보혜사는 여기서 다른 보혜사로 표시되어진다) 형성된다.
공동체는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 후에 홀로 내버려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예수를 대치한 보혜사가 활동한다.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자신도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개별적으로 신자들 안에서 (요 14:18,23;17:23) 역사한다. 이 진술들은 예수가 떠나가다(16:7)란 진술과 뚜렷이 대조된다. 예수는 떠나간다. 그리고도 거기에 있다. 그는 하나의 후계자를 갖고, 그리고 이것은 아주 굉장하다.
이 상반된 진술들을 조직적으로 - 신학적으로 고르게 하려는 것은 무익하다. 제 4복음서 기자는 “신적인 인격들”과 그들 서로의 관계와 그들의 기능들에 대한 어떤 철저한 반성된 교리를 제공하지 않고 그의 신학으로 경험들을 반사한다: 예수가 떠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애타게 그리워하는 경험, 예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계속해서 현재적이라는 경험, 성령이 기독교인들 하에서 대단한 작용을 하고 예수의 사역을 (지상적 예수가 성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을 기뻐해야만 하는 점증된 방법안에서 - 그밖의 다른 경우라면 지금의 넘치는 구원 경험들에게로 올 수 없었을텐데) 계속하는 경험.
예수와 보혜사 사이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다음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 예수는 보혜사 안에서 현재적이다. 예수는 영으로 그의 사람들에게 온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스스로 이런 결론을 명백하게 내리지 않는다. 그에겐 매끄러운 진술체계가 분명히 우리들보다도 훨씬 덜 중요하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 경험을 반사하고 그것과 함께 매우 기본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이다.
인간적인 경험들과 특히 종교적인 경험들은 항상 긴장이 풍부하다. 그것들은 서로 복잡하게 놓여있다. 경험들에게 놓여져 있는 개념체계 (신학도 이와 다르지 않는데) 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경험들을 매끄럽게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신학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그것은 더 많은 긴장들을 (물론 그 때 서로 깨뜨림이 없이) 그안에 포함할 수 있다. 요한적인 신학은 여하튼 매우 긴장이 풍부하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은 오늘의 신앙경험들을 위한 충만한 동일화 가능성을 제공한다. 역시 요한복음은 그것이 영적인 경험의 모형들을 건드리고 표현함을 통해서 열광케한다.
3.3 예수와 보혜사 사이의 불연속성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에수의 사역과 보혜사의 사역사이의 계속성을 이끌어냈다면 이제는 보충적으로 여기엔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덧붙여야한다. 이 불연속은 보혜사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을 능가함에 있다: 보혜사가 비로소 신자들을 전체적인 진리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무엇이 예수의 사역을 능가하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추론되어졌다. 그것이 다음처럼 이해되어질 때에만 바른 의미를 갖게 된다: 내용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넘어가는 것은 다만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 지금 이 예수의 가르침안으로 편입된다는 이 한가지이다. 신학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능가하는 것은 예수가 가지고 온 계시는 가르침의 합계도 아니고 종료된 사건도 아니라 항구적인 새로운 사건이 되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발생하는 곳에 성령의 활동이 존재한다. 만약 성령이 예수가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한다면, 이 기억은 역사적 재생안에 있는 현재화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발생의 현재화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사역을 능가하는 보혜사 사역이 놓여있다. 요한이 16:13에서 열어논 인식은 다음처럼 표현될 수 있다. 성령이 없이는 기독론이 전개될 수 없다: 기독론적인 진술체게의 형성은 가장 깊은 성령적인 발생이다. 성령의 영향하에서 비로소 예수는 그리스도로 된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향하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당한 발생이다. 16:7이 참고가 된다: 예수의 떠남이 제자들에겐 좋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성령이 오고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기 때문이다. 15:26도 부활절 이후의 기독론에 근거하여 해석되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부활절 이후의 전망에서 형성되어졌고 예수시대에 비하여 엄청난 인식의 증대와 공동체를 처음으로 구성하는 기독론의 획득을 드러내고 있다.
성령의 선물은 초대 기독교에서는 동시에 기독론의 탄생시간이었다. 성령의 영향하에서야 비로소 그 기독론적인 진술체계가, 예수를 하나의 인간적인 인물로서보다 더 그리스도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때 사람들은 그의 영향하에서 이런 진술들이 만들게 한 성령은 정말 승천한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에 의식적이었다 - 그리고 그것으로 한 인식의 고리가 완성된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여기서 그를 추적하는 자들이 기반을 잃어버릴 정도로 어지러운 순환으로 들어간다. 성령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케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이 나오고 성령은 예수의 후계자가 되고 또 그를 능가한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의 것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이런 순환의 체계가 외부에선 증명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 증명적이고 복음서 안에서 그려보인 자기 명증성 고리의 항상 새로운 운행안에서 순환적으로 증명된다.
16:13에서 복음서 기자는 동시에 거대한, 즉 스스로 보혜사를 통하여 전체적인 진리안으로 안내되어졌다는 주장을 보도한다. 그것으로 보혜사-성령론은 중요하게 역시 제 4복음서의 신학적인 전체체계를 정당화하고 비판자들 혹은 거짓선생들에 대하여 그것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에 사용된다.
성령에 의하여 전체적인 진리안으로 인도된 자로써 복음서 기자는 그의 편에서 그의 복음서로 그의 독자들을 전체적인 진리안으로 인도한다. 그는 그들에게 전승자료를 그의 심층차원에로 경건한 재해석을 해서 제공한다. 도처에서 그는 예수의 전승에 하나의 “더 많음”을, 바로 이 “전체적인 진리”를 덧붙인다. 그는 그것이 방금나온 곳인 예수 전승안으로 기독론을 끌어들인다.
복음서 기자는 예를 들면 계시의 말씀의 형성때에 그가 여기서 무엇을 만드는지를 정확하게 의식했다: 그는 단순하게 지상적인 예수가 말하게끔 하지 않았다. 재차 하나의 순환이 완성된다: 예수의 입안에 있는 보혜사의 예고를 포함한 작별인사조차도 역사적인 사실성에 대한 하나의 “더 많음”이다. 다시 복음서 기자가 그안에서 움직이는 순환성 앞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가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져서 스스로 근거가 없어져서 자기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자신을 맡겨버렸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다만 이해할 수 있고 그만을 따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제 4복음서 기자는 확실히 성령에 감동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이 요한적인 작별인사의 영 진술들은 전체 요한복음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져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어느 정도로 네째 복음서는 보혜사 자체에 의하여 집필되어져서 성령의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의 요구에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요한복음은 그 자체가 보혜사의 메시지이고 보혜사의 메시지는 네째 복음서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위험성에 대한 인식
네째 복음서 기자는 충만한 영적인 경험들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그 고만성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분명히 교회 역사의 진행에서,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리스마적인 운동안에서 계속 나타나는 위험에 직면했었다: 즉 성령경험들이 자신의 역동성을 발전시켜서 성령-경건성이 지상적인 예수와 그의 구속사역에서 떠나서 점점 더 특별계시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에는 역사로부터의 분리와 종말론적인 완성을 열광적으로 선취하려고 시도하는 도치된 환상적인 실존투영이 일어나기 쉽다.
* 영과 역사와의 관계
요한적인 보혜사-성령의 주제 중의 하나는 그런고로 영과 역사와의 관계이다. 성령이 예수시대와 그의 가르침에로 데리고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확고하게 결합된다는 것이 그렇게 분명하다 (14:26;16:14f;성령은 예수의 것에서 취하고 아무것도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3.4 성령의 예수에의 재귀결합
성령의 예수에로의 재귀결합은 요한적인 신학을 영지주의의 신학형태와 오늘날의 영지주의의 신학형태로부터 구분한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역시 기독교적-영지주의적 사상들과 곳곳에서 맞부딪힌다. 예를들면 뵐러 (H. Woller)의 “그리스도의 꿈. 혼에서 태어나 영으로 인식된”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는 역사적인 그리스도 계시가 개별적 인간의 혼안에 있는 그리스도-계시에 근거해 과격하게 해체된다. 그리스도 신앙의 자리에 자기 자신의 그리고 자기됨의 전형적인 종교가 들어선다; 예수는 자기 경험을 위한 암호가 된다.
요한은 그의 보혜사 성령론에서 두 가지를 서로 묶으려고 한다: 역사적인 그리스도-계시와 후의 신자들의 영-경험들을 (여기서 우리는 현대적인 표현방법으로 “영-경험”대신에 “자기-경험”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요한은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하나의 경험할만한 원칙만이 아니고, 실존의 영적인 등귀를 위한 표상만이 아니고 (그것은 물론 그렇다!), 그리스도는 역시 나사렛 예수다. 내적인 그리스도는 이 나사렛 예수와 영속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영원한 역설이다. 이 요한적인 보혜사-성령론은 이 역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역설과 요한과의 교류를 다시금 묘사해보자: 작별인사의 보혜사-성령론안에서 성령은 우선 말하는 자로 된다. 보혜사는 말씀이다.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고 증언하고 확신시키고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제 그 말씀은 더이상 예수에게서가 아니라 성령에게서 나온다. 신적인 말씀이 “거하는 장소”는 어느정도 제한되지 않는다. 더이상 구체적인 인격 예수가 여기에 언급될 수 없다. 성령으로 인도되고 성령을 가진 자로써 제자들이 직접적으로 계시 관련성 안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윤곽이 그렇게 매혹적인만큼 그렇게 그것은 역시 위험하다. 요한이 이 위험성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 안에서 펼쳐지는, 그리고 말씀에로 진술되는 영-계시의 지식을 “육신이 된” 그 말씀에 결합하려고 한다. 이런 결합안에서만 그 성령-계시의 지식은 그의 구조적인 목적을 성취한다. 요한복음의 해석사에서 이 결합은 종종 경시되어졌다. 그래서 신앙을 위한다지만 파괴적인 결과가 생긴다: 2세기의 영지주의로 시작해서 요한복음은 자유한 “성령 기독교”를 위해 잘못 사용되어졌다.
현재에 다가오는 이런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령-계시의 지식은 언제나 “육신이 된” 그 말씀, 즉 성령은 언제나 지상적 예수에게로 돌아가 결합되게 하여야한다.
3.5 보혜사-성령의 개별적인 과제들
이제 보혜사의 개별적인 과제들을 어느정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보혜사 말씀들은 현재를 성령의 시대로, 그리고 그와 함께 구원의 기대로 규정하는 진술들의 스스로 결합된 체계를 형성한다. 요한에게서도 교회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고 성령은 교회에서 과제들의 충만함을 인지한다.
3.5.1 예수의 후계자로 성도와 함께 계심
맨 먼저 언급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성령-보혜사의 과제는 단순히 신자들곁에 그것도 영원히 (14:16) 있는 것이다. 이 보증의 역사적 배경은 예수의 죽음이후 성도들의 넘겨짐이고 지연되는 주의 재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의 실존은 예수의 육적인 부재때에도 보혜사에 의하여 더이상 고독한 실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신자들속에 거하심으로.
3.5.2 진리의 영으로 진리를 인식케 함
14:17a는 보혜사를 성령의 소유를 신자들을 세상에서 구별하는 특징으로써 영향을 주도록 진리의 영과 동일시한다. 진리는 여기서 이 세상이 받을 수 없는 그리스도 계시의 총괄개념이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이 그리스도 계시를 항상 새로이 유효하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세상에 항상 새로이 구렁을 파는 그 영이다.
영은 요한에게 있어서는 세상과의 이별성과 어느정도 관계를 갖고있고, 영은 그것만이 아니라 요한이 세상에서 떨어져서 그의 도움으로 세상을 (그가 그들의 영 부재성을 탄핵함으로) 비판하는 투쟁개념이다.
14:17b는 인식론을, 자세히 말하자면 신화적인 구조를 제시하는 인식이론을 포함한다. 영은 신자들에 의해 인식되고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 - 그가 신자들안에 거함으로- 인식의 원칙이다; 영은 소위 스스로를 인식한다. 동시에 영은 그가 신자들의 고유한 주체로써 나타남으로서 신자들을 직접적으로 이 인식의 순환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학문적인 인식의 파라다임(범례)을 의미하는 주체-객체의 분리가 (그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 사이의 분리다) 지양된다.
이 인식의 순환은 개개의 영 경험에 특징적이고 영을 가진 자 (pneumatiker) 오늘날에도 카리스마적인 그룹들 안에서 관찰되는 저 대단한 확신을 준다: 영을 가진 자는 그의 인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갖고 외부에서 어떤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이 인식의 순환은 신앙의 인식순환이다; 신앙은 자기의 대상을 객관화할 수 있는 외적인 것에서 갖지 않고 (하나님은 객관화될 수 없다!), 신앙의 인식은 믿는 주체안에서 이루어지고 이 명증성에 대해서만 증명할 수 있는 독특한 명증성이다. 그러나 신앙의 명증성은 역사 내지는 구속사에 관련하는 케리그마 (kerygma)를 통하여 불러일으켜진다.
신앙은 역사나 구속사를 통하여 증명되지 않으나 역시 그것들이 없이는 안된다. 그리고 신앙은 그의 자기 확신성의 고리안에서 고집성과 장애성안에 있는 역사내지는 구속사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신앙을 지속적으로 역사의 지반에 확고히 붙잡아둔다.
그 반대로 영적인 경험에서는 소위 역사가 사라져 없어진다. 영을 가진 자는 역사의 고집성에서 자유하게 느낀다. 그들은 벌써 종말론적인 완성의 상태에 도달한 것같이 느낀다. 그 때 신앙의 경험은 대단히 강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경험들의 자극을 사소하게 만든다. 바로 여기에 정확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역사는 그의 규정하는 기능을 더이상 행사하지 못할 수 있고, 성령가진 자는 소위 표류하기 시작한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그런고로 이 경험들을 거부함이 없이 - 그 반대로 이것들은 허용이 되어져야만 하고 촉진되어져야 한다! - 성령의 경험을 역사에 묶는 거기에 있다. 요한은 그의 보혜사 성령론에서 이 과제를 탁월하게 수행했다. 그는 14:17b에서 성령을 인식의 원칙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신자들에게 주체-객체 분리의 저편에서 해명되어지는 매혹적인, 그러나 위험한 영적인 인식순환을 지정하는 영에 대해 진술했다면 14:26과 15:26에선 영적인 인식을 구속사에, 예수 자체에 묶음에 대해 진술한다.
또 한가지 요한적인 신학에서 나타나는 불명료성은 14:26에서 영을 보내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나 (14:16도), 15:26에서는 예수라는 (16:7도) 이중적 진술에 있다. 이 불명료함도 그러나 다시금 유효하다. 왜냐하면 요한은 “신적인 인격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어떤 균형잡힌 교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에게는 다만 영의 경험을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도 또한 예수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영에게 보혜사의 형태로 인격적인 특성을 부여했다는 것을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발아적 삼위일체의 생각이 요한에게 새겨진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3.5.3 성령을 통한 예수의 대체
지상적인 예수가 떠나고 성령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지금의 넘치는 구원의 경험으로 오기때문에 좋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한 에수의 대치는 역시 성령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기때문에 좋다(기독론의 발전은 영으로 인도되는 부활절 이후의 과정이다).
제 4복음서 기자는 이러한 대체를 통하여 예수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를 구분하는 구속사적인 구조를 제공한다. 그 때 그에게는 영의 시대가 더 충만하게 유익한 시간이다. 그가 이 구속사적인 구조를 임의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다. 이 구조는 전승적인 것이고 신앙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보아야만 한다.
영적인 능력의 충만에 영감되고 감동되어서,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기독론의 상징체계 안으로 이끌어 넣어져서 그들의 시대는 예수의 시대에 비하여 더 유익한 시대로 신자들에게 나타난다. 초대 기독교가 그들의 기독론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들의 성령론을 예수시대 안으로 소급투사해서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예수시대를 그들 자신의 시대에 동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시대는 서로 경계그어질 수 있다고 여기게한다.
제 4복음서 기자는 왜 성령이 예수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올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는 숙고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사실로 감수하고 교회의 시대가 제공하는 것과같은 영의 현상을 예수의 시대가 제공한다고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성령은 예수가 떠난 후에 비로소 있다는 것을 사실로써 감수한다.
3.5.4 세상에 대한 법정적인 책망
16:8-11에서 보혜사의 활동은 법정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보혜사는 요한에게서 하등의 조화의 영은 아니다! 보혜사는 그리스도 신앙의 테두리밖에 놓여있는 각각의 실존이해를 가차없이 공격한다. 그것을 죄로 낙인찍고 그것에 대한 심판을 이끌고 온다. 그러므로 요한적인 영 이해는 조화로 새겨진 새 시대적인 영 이해에 강력히 맞서있다. 생각해 볼 것은 현대의 영 이해 가운데 New-Age 영 이해이다. New-Age를 대표하는 G. Bateson이나 F. Capra같은 사상가는 스스로 자기 조직화하는 우주적 영에서 출발한다. 그 영은 소위 우주적인 세계 발생의 내면이다. 그것의 외면은 물질이다. 전통적인 하나님사상을 떼어놓은 이 영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결합한다: 그는 이 다양한 사실성의 영역을 서로 결합하고 그들을 조화시킨다. 아무것도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전체의 체계안으로 파고드는 인간은 우주와 그리고 자신과 조화를 이룬다.
요한기자에 의하면 신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전체 사실성과 조화안에 있지 못하다. 그는 적대적인 세상과의 투쟁안에 서있고 이 투쟁을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그 때 그를 돕는다. 부분만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
여기 “책망하다”는 헬라어 원어로 ελεγχειν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어떤 사람에게 진리를 보여주어 그로하여금 그것이 진리임을 알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결과를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ελεγχειν 이란 말은 비슷한 두 개의 단어인 책망함과 깨닫게함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혜사 성령은 우선 죄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신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다.” 죄는 계시에 대한 불신과 폐쇄성이다. 곧 계시자에 대한 불신앙이다. 예수에 직면한 세상의 행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세상의 확신, 즉 “어두움에 머물러 있음”인데 이것이 바로 죄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때 그때 감행되는 개별적인 나쁜 행위가 아니다. 죄는 도덕적 과실같은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불신앙에서 흘러나오는 행동, 즉 불신앙으로 성격화된 세상의 전체적인 행위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믿지않는 불신앙과 불신앙으로 성격화된 세상의 전체적 행위를 책망하신다.
보혜사 성령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다.” 이 애매한 표현에서 “의”는 분명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의 것도 아니고 또 믿음을 통한 바울적인 칭의도 아니라 예수의 의이고 그것은 아버지께로 감으로 획득된다.
아버지께로 감은 예수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의 세상에 대한 승리이며 아버지에게서 영광을 되찾음이다. 예수의 의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승리와 하나님의 영광안에 있는 의”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예수는 그가 세상에서 승리하고 아버지의 영광안에 있는 한 의인으로 인정된다. 보혜사는 예수를 신자들의 양심 앞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간 자로써 증명함으로 그는 세상이 불의에 있다는 새로운 증거를 가져온다.
보혜사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다.” 심판은 종말론적인 신의 심판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세상은 이 심판을 가까운, 또는 먼 미래의 우주적 사건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 심판을 위한 척도들을 “죄”와 “의”의 개념들 중에서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이 세상의 지배자 마귀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 그러므로 세상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 바로 세상 자체를, 그의 척도들과 이상들로 보이는 것을 고수하려는 점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에 의한 신의 계시가 인식되는 한 심판은 세상에서 일어난다. 보혜사가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오로지 믿는 자들에게만 보여줄지라도 그의 “책망”은, 역시 그것이 공동체의 선포에서 수행되기 때문에 세상에 적중한다.
3.5.5 모든 진리로 인도하고 예수의 영광을 나타냄
이 보혜사의 사역은 다섯번째 보혜사에 관한 말씀에 나타난다. 여기서 보혜사가 신자들을 인도해가는 “모든 진리”는 어떤 보충적인 “특별계시”나 “특별가르침”이 아니라 (보혜사는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 사건의 깊은 차원에로의 들여다 봄이다. 그것은 보혜사가 신자들을 예수의 지상적인 사역때에는 아직은 없던 기독론적인 상징체계 안으로 이끌어들임을 뜻한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주에 대한 종말론적인 전망도 기독론에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보혜사가 “오시는 자”도 선포할 것이라는 주장도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종말론도 역시 기독론처럼 부활절 이후의 영이 역사한 인식관계이다 : 초기 기독교인의 종말론적인 지식도 영이 역사한 계시지식이다. 그러므로 이젠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독론적으로 종말론적인 지식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된 셈이다.
기독론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신화(神話)이고 예수의 “영광”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6:14). 영이 이 영광을 드러낼 때 그는 아무것도 불법적인 것, 아무것도 자의적인 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사실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오로지 이것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적으로 계시의 지식에 참여했고 그가 이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포한 것은 예수의 것에서 취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가 가진 것이다. 영은 신적인 충만함에서 퍼내 그의 계시활동을 전개한다.
영 보혜사가 예수의 것에서 취한다는 진술은 다음처럼 해석할 수 있다: 영 보혜사는 예수가 원래 표시했던 것에 결합한다 (그의 파송, 그의 존엄의식, 그의 특별한 하나님에 대한 관계 [내포적인 기독론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적인 - 고양된 형태 안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유효하게 한다. 그는 내포적인 기독론에서 외연적인 기독론을 만든다.
3.5.5 보혜사 사역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보혜사 성령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그는 한편으론 공동체의 내부영역을 목표로하고, 다른 편으론 세상 내지 세상에 대한 공동체의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 그는 신자의 전 신앙 실존에 관계함으로써 세상에 관계를 갖는다. 그는 신자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명확히 깨닫게 한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선포하게 한다. 이 깨달음,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절대 생명경험이기 때문에 선포 안할 수 없게된다. 요 15:26-27의 보혜사 성령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고 너희도 증거한다는 말씀처럼. 이 말씀은 성령에 의해 선사된 그리스도-인식이 선포안에서 생생하게 되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선포안에서 그리고 선포를 통해서 그리스도-계시는 그때마다 성령을 통한 사건이 된다. 특히 성령의 세상에 대한 책망안에서 그것이 발생한다. 공동체는 선포를 통하여 세상에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심판인지 보여주어야만 한다. 공동체의 이런 말씀선포 안에서 예수의 오심과 가심안에서 성취된 종말론적인 사건이 계속 수행된다. 공동체의 말씀안에서 예수가 스스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이 책망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이 울리는 곳에서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듣는 사람은 산다 (5:25). 그리고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의 소리를 듣는다 (3:8). 죽은 자를 살리는 종말의 현재적 사건이 바로 선포안에 있는 성령의 사역이다.
보혜사의 기능가운데 독특한 것은 보혜사는 신자들에게 결코 카리스마적인 현상을 방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은 여하튼 거기에 대하여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적인 기독교는 바울서신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낯익은 영의 은사가 없는 기독교인가? 그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최소한 요한복음이 신자들을 권위적인 행동안으로 이끌어 올리는 전권신학을 기적행위 안에서 사용한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행위는 신자들의 영의 은사와 분명히 결합시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의 은사는 요한적인 전권신학을 위한 기독론적인 근거와의 관련성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맺는말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다른 자아로 돕는 자와 위로자이다. 그는 신자들의 변호자가 아니라 세상의 고소자와 심판자이다. 보혜사가 변호자라고는 어디에도 묘사되어 있지 않다.
보혜사는 어떤 특정한 개념정의를 불허한다. 아마도 그것은 요한복음서 기자가 그렇게 원해서 그런 것같다. 보혜사의 이런 특징적인 묘사의 배후에는 중요한 신학적인 진술, 즉 성령은 궁극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그리고 분명하게 정의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진술이 서 있다 : 성령이 우리를 소유한다. 우리가 그를 소유하지 않는다. 성령이 최종적으로 무엇인지 파악될 수 없고 포박될 수 없으나 우리는 그의 영향을 잘 감지할 수 있다. 성령은 그가 역사하는 것이다. 그의 영향안에서 우리는 그를 갖는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포착함의 목적물로써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그의 목적물이 된다. 그에 의해서 우리가 포박된다. 그는 행동의 주체이고 우리안에 거처를 갖고 여기서부터 그의 일을 할 정도로 우리를 마음대로 사용한다. 그는 그의 것을 통하여 우리의 주체됨을 바꾼다. 그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이해해야만 하는지, 우리의 삶이 어때야하는지에 대하여 우리를 규정한다. 우리가 그를 정의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를 규정하는 성령에 포박당하여 예수와 성령의 사역을 수행함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종말론적인 사건이 계속 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