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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14,15-18
복 음 : 요한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4,11)
말씀지기
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성인 가운데 한 분은
힘 있는 설교와 기적으로 유명한 파두아의 안토니오 성인(1195-1231)입니다.
그분은 파두아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는데,
선종했을 때는 그분의 유해를 보려고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난입하려 들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시신을 내어가기 위해 만든 다리를 부수기까지 했지요!
안토니오 성인은 마침내 안장되고 나서 곧바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치유 기적들이 너무도 극적이었기에,
그분은 선종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선종 후에 그분에게 쏠린 과도한 신심은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받은 아첨과 비슷합니다.
리스트라 사람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걷지 못하는 사람을 낫게 한
바오로에게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역시 그들과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으니까요!
바오로나 안토니오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부딪칠 수 있는 비교적 큰 위험의 하나는
이러한 성인들을 지나치게 높이 떠받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은 결코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믿으려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부여 하셨습니다.(1콜로 1,12)
그분은 우리에게 주위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고
성덕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주셨습니다.
똑바로 읽고 아십시오.
하느님은 바오로와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모든 성인들이 지녔던 것과 똑같은 능력을,
곧 부활의 능력을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물론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오늘 직장에 나가 있다면, 자신이 맡아 하는 일이 빛을 발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탁월한 수준으로 해 냄으로써,
당신이 실제로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만일 자녀들을 보살피고 있다면,
그들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병자들을 보살피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간단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당신을 통해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분은 당신을 그만큼 더 많이 쓰실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 주신 은총의 선물들을 되도록 많이 쓰고 싶습니다.
오시어 당신의 빛을 제 안에서 비추십시오!”
내 말을 지켜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
사랑을 사랑 않는 가여운 영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너무 지당한 말씀이기에 그 뜻을 새기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한 번 새겨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유심히 보니 받는다는 말에 뜻을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 사랑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계명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오해치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니 사랑을 가려서 주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주시는 분의 문제가 아니라 받는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우리가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부탁을 받아도 그 부탁을 우리가 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부탁을 하면 거절할 것이고
싫어하는 것을 부탁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계명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
아니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일 겁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사랑은 아무리 준다 해도 우리는 싫어하고,
그러기에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아니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랑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라면 모든 사랑을 다 사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사랑치 않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사랑한다 해도 원치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저희 프란치스칸 성가 중에
“사랑을 사랑 않는 인생을 성부께 전구하소서.”하고
프란치스코에게 기도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정말 사랑을 사랑치 않는 영혼,
특히 인간의 사랑은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사랑치 않는 영혼,
이런 영혼이 있다면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치 않아서 가엽기도 하지만 주시는 사랑을 받지 않아서 가여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가엽다고 하기 전에
내가 그 가여운 신세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우리는 戰士요, 戰友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새벽을 잃으면 하루를 잃는다.’
제 지론입니다.
요즘 일 년 중 가장 꽃도 많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요
새벽 새들 찬미소리도 가장 많은 때입니다.
새벽마다 어김없이 잠을 깨우는 수탉의 기상 종을 대신한 울음소리는
하루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靜中動, 고요한 새벽 같지만 하루의 전쟁을 앞둔 만물이 내적 긴장으로 가득한,
때로 말없는 열기가 온 몸에 스며드는 새벽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전사요 전우입니다.
얼마 전 어느 유명부부(임영웅, 오증자)의
‘전우가 된 부부, 연극하며 산다는 것은 전쟁이니까’라는
제하의 인터뷰 기사 중 다음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그때 임 선생이 ‘혼자서는 연극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전우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임 선생이 결혼식 주례를 설 때 마다 ‘부부는 전우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왜 신랑 신부한테 처음부터 그렇게 극심한 긴장감을 주느냐’고 했더니
‘모든 부부가 그런 정신 무장을 하지 않으면 이런 험한 세상을 살기가 어렵지’라고 하잖아요.
자기가 연극 하는 게 그렇게 힘드니까 그랬나 봐요.-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그대로 영적전쟁이요,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평생 그리스도의 전사로 전우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부부간은 물론이요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우리들 모두가 영원한 현역의 평생 전사요 전우입니다.
‘구십, 아직은 젊다’(2005.11.12-2006.1.18)라는 신작전을 가졌던
통영의 전혁림 화백의 일화도 감동이었습니다.
90세 넘어서까지 그림을 그리며 평생전사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화가였습니다.
그의 아들 전 영근 화가의 고백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림 많이만 그리면 뭐하느냐, 좋은 그림 하나만 그리면 되지 한다.
하지만 만개를 그려야 그 중에 하나 좋은 그림 나오는 것이다.
대가라 해서 그리는 것마다 명작이 나오는 것이지 아니지 않은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천재 화가들도 하루에 열점 이상씩 그렸다.
정열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그림을 그렸다.-
참 장엄한 죽음입니다. 戰死해야 戰士입니다.
할 수 있다면 事故死나 客死, 病死가 아닌 전사(戰死),
기도나 노동, 공부의 영적전투 중에 전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전 혁림 화백은 돌아가시기 전날 까지 그림을 그렸으니 그대로 전사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시에나의 카타리나 역시 33세에
치열한 영적전쟁 중에 전사한 그리스도의 탁월한 전사였고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역시
그리스도의 전사요 전우로 맹활약하다 전사한 순교사도들입니다.
평생 영적전쟁의 승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전사들이 필히 지녀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영적전쟁의 총사령관인 예수님께 절대적인 복종이요,
복음 선포라는 분명한 목표요, 하느님을 향한 샘솟는 열정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요,
세상 악과 이기적 나라는 적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좋은 지혜와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요,
겸손과 말씀과 기도의 무기요, 평생 영적훈련에, 전우애(戰友愛)입니다.
이 조건을 갖춰야 평생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방심이나 태만이나 교만은 금물입니다. 늘 깨어 경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는
위의 조건을 다 지닌 그리스도의 전사의, 전우의 모범입니다.
이들의 영적전쟁의 승리가 참 통쾌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뚜렷한 복음 선포의 목적에 샘솟는
하느님 사랑과 지식을 지닌 겸손으로 무장한 두 전사들임을 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전사들에게 최상, 최고의 준비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전사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킬 때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령은 늘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시니 천하무적, 영적전쟁에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완전 무장(武裝)시켜 주시어
당신의 전사(戰士)로 세상 영적전쟁터로 출전시킵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식사시간에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배님들이 드시는 음식이었지요.
글쎄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어서 비벼 먹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유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처럼 아주 신기하기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저것을 먹지?’라는 말과 함께 절대로 못 먹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오히려 제가 즐겨 먹는 음식이 되더군요.
이와 비슷한 체험을 군대에서도 했지요.
자대 배치를 받고서 선임 병들의 라면 먹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글쎄 라면을 끓여먹는 것이 아니라 불려서 먹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 자신이 생각하기에 라면은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버너와 같은 화기를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라면 봉지에 뜨거운 물을 넣어서 라면을 불려 먹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봉지라면’입니다.
우동 면발처럼 퉁퉁 분 것을 어떻게 먹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없어서 못 먹더군요.
살면서 ‘아니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니다’ 싶은 것들이 더 괜찮은 경우도 있더군요.
그러므로 무엇이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쉽게 단죄해서도 안 됩니다.
대신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마음. 특히 여기에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더해진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다투고 싸우는 세상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세상이 분명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가 이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말만 할 뿐, 가장 실천하지 않는 단어가 또 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비싼 학원에 보내거나 비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 주면 잘 크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녀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문제아가
되어 나중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주님의 진정한 언어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을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