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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미칠듯이 보고 싶었던 바다.
왜 자꾸 바다 생각이 계속 났는지 모르겠다.
바다를 가야겠다. 무조건.
국내 여행에 대해선 그다지 언급을 하지않던 내가 갑자기 바다를 가보고 싶다고 하니 주위에서 다들 놀란다.
사람에 대해서 쓸데없는 기대로 마음을 다쳤을 때나
사는 일이 갑자기 시시해고 지칠 때
다른 의욕이나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때..
복잡하고 온갖 욕망들로 어지러운 도시 속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나지만 , 그런 때만큼은 바다가 생각난다.
무한대로 지친 나를 그대로 포용하고 어루만져줄 것 같은 너른 바다..
내 바다의 기준은 항상 하와이의 그 옥빛 바다다.
하나우 마베이의 그 옥빛 바다와 밤새도록 걸었던 깨끗하진 않지만 좋은 추억을 내게 주었던 와이키키 바다.
여행지로 깨끗하고 볼거리 많고 쇼핑거리 많은 도시를 선호하지만, 나락으로 떨어질 땐 항상 바다였다.
그렇게 해서 가 본 바다는..하와이,발리. 괌, 싸이판.빈탄.파타야, 그 중에 아마도 괌은 꽤나 들락거렸던 것 같다. 바다를 보고오면 바다의 기운으로 살아지곤 했다.
올 봄엔 정동진을 거쳐서 경포대를 거쳐서 대포항까지 갔다왔다.
새벽에 출발해서 정동진을 갔다.
그곳에서 수십년전에 보았던 하와이의 그 바다 색깔을 봤다.
나랑 그리 멀지않은 곳에 내가 품고 있던 바다가 있었구나
.
어려서부터 별명이 울보, 눈뚱그렁이였다. 소처럼 커다랗게 순하게 처진 눈을 가지고 눈물을 쏟아내면 제일 당황하던 사람은 아버지였다.
문제는 별다른 이유없이 항상 눈물을 흘린다는 거였다.
책을 보다가, 티비를 보다가 , 엄마한테 혼나면
점점 커가면서 울고 싶은 이유는 더 가관이었다.
슬픈 노래를 듣다가 느닷없이, 빗소리가 처량 맞아서, 누군가 바이올린 연주를 내 옆에서 들려주면 백발백중, 잠에 깨어서 첼로 소리 들었을 때, 돋보기를 쓰시고 책을 읽어가시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볼 때, 바람 소리 세차게 불어대면, 좋은 사람이랑 함께 할 때, 좋은 사람이 내 마음 몰라줄 때, 싫은 사람이 계속 귀찮게 할 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계속 눈물을 달고 다니는 내가 그래도 시를 보고는 요즘은 울지않는다.
그리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남들 앞에선 안 운다.
감정이 팍팍해졌는지, 아니면 내가 강해졌는지 정서적인 나약함에 대해 늘 스스로에게 불만이었던 내게, 다시 요즘 나를 울린 시는 ..(그러면 그렇지..)
문병란의 바다가 내게 이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내 이 시를 생각했다.
(이 시인이 여자가 아닌 남자란 사실에 나 너무 많이 놀랐었다.)
내 온갖 감정의 찌거기들을 몽땅 다 내려놓고 와서 제법 마음이 개운해진 듯하다.
바다가 내게 –문 경란
내 생애의 고독한 정오에
세 번째의 열망을 만났을 때
나는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빈 바닷가
머리 풀고 흐느껴 우는
안타까운 파도의 울음소리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마침내 못다한 가슴을 안고
우리는 왜 서로 헤어져야 하는가
작은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
어느 절벽 끝에 서면
인간을 외로운 고아.
… 중략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은 뜨겁게 포옹하라
바다는 내게 속삭이며
마지막까지 구석까지 체우고 싶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밀려오고 있었다.
두울--내가 본 영화들
(사랑을 부르는 ,파리)—세드릭 클래피쉬 감독,줄리엣 비노쉬, 로망 뒤리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과 쥴리엣 비노쉬가 나온다는 것으로 영화가 상영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파리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그려내는데, 내용이 다소 산만하기도 한 것 같지만,쉽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서 긴장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주축은 쥴리엣 비노쉬와 그의 남동생을 중심으로 해서 그려지는데, 물랑루즈의 댄서로 일하는 남동생이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고 그의 이혼한 누나가 한집에 같이 살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남동생은 멋진 사랑이 하고 싶고, 늘 남자에게 기분 좋지않았던 누나도 조금은 외로운 일상에 지쳐서 누군가의 사랑을 원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동정심도 가며 한편으로는 공감도 가는 사람은 노교수 인데, 잘 난 동생에 대한 시기심으로 자책하는 장면도 꽤 아프기도 하고, 나이어린 젊은 제자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면서 겪는 심정 변화가 참 재미나다.
젊은 제자를 향한 사랑은 젊은 날의 그 열정과 똑같으며,그래서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뜨거운 문자를 보내게 되고 나중엔 연인으로 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자유로운 젊은 애인은 이별을 고하게 되고..
이건 사실 다 예견되어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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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리따운 여인을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해피엔드로 가기엔, 사람의 감정이란 늘 위태롭고 ,내일을 기약하기도 어렵고, 거기다가 또래의 싱싱함을 무엇으로 보상해줄 수 있을까.
이성적인 노교수라면 모든 것을 이미 알아차렸을 것 같음에도 ,상처를 받을 것이 너무 뻔함에도 질주할 수 밖에 없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희열이란 금지를 넘어섬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고통스런 쾌락이라고 말한 자컁의 말이 공감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금지란 사회 문화적으로 암암리에 이루어진 일종의 법과 같은 구속력을 지님과 동시에 세뇌 당한 모든 일련의 절차들이 아닐까 한다.
쾌락원칙이 부과한 한계선을 넘어 금지된 대상을
지향하는 욕망을 라캉은 프로이트를 따라서 죽음 충동이라 부른다.
안전한 쾌락이 아닌 고통스런 희열의 공간,그 희열을 위해 사회적인 위협과 처벌과 본인 스스로도 자책 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어느 정도는 예견 되었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최선을 다했던 노교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예전엔 그냥 너무도 주책맞은 할아버지라고 흉을 봤으리라..
그 노교수의 감정을 받아들인 그 젊은 여인도 쉽게 바람둥이라고 비난하기 보다는, 남의 감정을 진실로 받아들일 줄 아는 감성 풍부한 아가씨 내지 여러 가지 사회저인 제약에 아랑곳하지않은 당돌한 여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의 형태와 나타나는 상황은 실로 다양해서 어느 한가지로 해석을 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인듯 싶다.
이런 영화를 보노라면 기존의 주입된 가치관과 새로 이해하는 장면들 속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게 되는데,이건 마치 이해 안되는 현대 미술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는 과정과 비슷하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받으려고 태어난 삶은 아니니까,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겠지.
남들의 삶에 끼여들어서 ,내 잣대로 누군가를 폄하하고, 간섭하고, 지시하고, 내가 조종하려 하고.. 이런 영화를 보면서 시야가 더욱 더 넓어지고 폭이 확대됨으로써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다.
감독이 대부분의 인간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파리에 있는듯하게 화면을 잡아냄으로써, 그 옆에서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는데,아쉬운 점은 은근 드러난 인종편견이 있다.
파리에 갔을 때 박람회 기간이라 호텔값이 비싸서 약간의 외곽인 바스티유 근처에 허름한 호텔에서 일주일 가량을 묵어야 했다. 도착한 날 정말 울고싶었고 서울로 가고싶었다.
호텔에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않아 밤 12시 넘어서 까지 항상 쏘다니고 아침도 안먹고 새벽부터 길을 나서곤 했는데 덕분에 알차게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뛰쳐나오고 싶던 빠리도 가끔씩 그립다.
(나쁜 교육) –페드로 알모도바르--2004년작.스페인 영화
스폰지 하우스에서 하는 칸느전..
나쁜 교육은 순전히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때문에 봤다.
예전에 체게바라를 다른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의 주인공으로 나왔을 때부터 눈여겨봐둬서 그 영화도 몇 번 다시 봤었다.
그당시 체게바라한테 한참 빠져있었고, 남미에 광할한 자연에 취해서,그리고 주인공에게 빠져서 그렇게 영화를 여러 번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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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다시 본 것은 (눈 먼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였는데, 그때 하도 악한 역할로 나와서 분노하면서도 그의 매력에 완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는 물론 남주인공도 멋졌지만,감독에 대해서 알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들도 큰 저항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나자신을 보면서 감독의 역량에 놀랐다.
강가에서 어린 이나시오가 미성으로 부르는 문 리버
평생 기억하고 싶은 명장면으로, 천국일 것만 같은 그 편안함과 화사함에 넋을 빼놓게 한다.
두 소년이 첫눈에 반하는 축구 골대에서의 그 눈빛 교환
공을 차려는 소년과 공을 막아야하는..
같은 동성끼리의 느낌인데도 완전히 관객을 이해시키고 동조하게 만드는 게 감독의 마력이아닌가 싶다..
영화 곳곳에 나오는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이 보는내내 사람을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용이 어른거려,음악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이 영화에서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1인 3역(여자,과거,현재를 넘나들며)을 하는데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옴므 파탈과 연기를 참 깊게 잘 한다고 생각된다.
카톨릭 신학생 시절 서로에게 친구이자, 가슴저린 첫사랑이었던 엔리케와 이나시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사람은 신부였던 마놀로였다.
신부는 카톨릭 학교에서 동성애라는 것을 이유로 정의를 가장해서 엔리케를 퇴학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신부는 어린 이나시오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있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서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신부에게 당한 이후에 이나시오는 종교에 대해 회의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심한 혼란을 겪는 거 같다.
시간이 흘러서 작가겸 배우가 된 이나시오와 영화감독이 된 엔리케가 만나게 된다.
이나시오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시나리오를 들고 엔리케에게 온 것이다.
감독 엔리케는 웬지 어린시절의 이나시오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이나시오는 몇 년 전에 마약중독자로 비참하게 죽었고 지금 눈앞의 이나시오는 그의 동생 후안이다.
어린 시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 가게 되고, 그 이야기 중간에 사실과 상상이 겹쳐지면서, 내용이 복잡해진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나선 권위나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성, 사회악적인 측면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지위를 이용해서 인격적인 품성이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타인을 지배하려 할 때 얼마나 많은 위험한 상황이 도사리는가..
그네들이 말하는 원칙이나 정의는 실상은 그들의 권력 유지나 자신들의 편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조종수단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권력이란 소유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푸코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 속에서 미치는 힘,영향력은 정확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균형을 이룬다. 그 비대칭의 불균형한 힘의 관계가 곧 권력관계인 것이다.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배치하고 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배치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악행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현대의 권력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네거티브 권력이 아니라 포지티브 쪽일 것이다.
말하자면 알아서 기는 것이라고나 할까..
여하튼간에 마놀 신부 때문에 문리버를 너무나 아름답게 부르던 그 아름답던 소년의 일생은 마약에 쪄들어 성적인 혼란을 겪는 추악한 사람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그 신부가 아니었다면, 이나시오의 일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사실 의지가 강하고 굳세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있어서 인생을 보다 강하게 멋지게 살아갈 수도 있었는데 ,의지가 약해서라고 몰아붙이면 할말이 없다.
사람의 일생을 구조적인 측면보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산물이라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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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했기 때문에 그런 벌을 받아도 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도 당연하다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인지 나는 묻고싶다.
그렇게 흠없고 정갈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부러울 뿐이다. 진심으로.
그러나 나는 그렇게 강하지도, 늘 살아있는 모든 것은 흔들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왔기에, 그의 삶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내게 사람은 생각만큼 그렇게 강하게,그렇게 변하지 않는 뚝심으로,늘 고정불변의 것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고, 정의의 편에 늘 서는 ,한번 옳다하면 자신의 고집을 꺾지않고, 늘 도덕적으로 남을 배려하며, 옳지않은 것은 자제하며-- 그런 흠없는 존재라고는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가지 팁~영화 내내 의상이 참 내 맘에 든다고 생각하며 유심히 보았는데,장 폴 고티에 작품이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폴 고티에나,마크 제이콥스,요지 야마모토,알렉산더 맥퀸,뭐..이런 정도의 해체주의 경향의 디자이너 작품들이 매우 좋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홍상수 감독—김태우, 엄 지원,고현정, 정유미,공형진,하정우,유준상)
홍 상수 감독의 영화는 좋아하기는 하지만 보고나면 웬지 마음이 무거웠었다.
이번에 영화는 정말 곳곳에 유머가 넘쳐나서, 7급 공무원보다 더 웃고나온 것 같다.
하도 많이 크게 웃어서 옆에 사람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날카롭고 예민하던 감독의 시선이 나이가 들면서 좀 너그러워지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이 생긴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고현정과 정유미,김태우,하정우에다가 예수정씨까지.. 다들 너무 연기를 잘 한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많이 공감이 되었던 놀라운 대사..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고현정이 김태우에게..)—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인간의 자만심에 대해 한방
왜 이런 영화 만드세요..왜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에요..?
극중 영화감독으로 나오는 김태우에게..학생 관객이 질문한 내용
극중 김태우의 대답—이해가 안가면 안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거겠죠..
홍상수 감독 자신의 답이지 않을 듯 싶은..내겐 완전 명대사다.
가슴이 저렸다. 내 글을 보고 누군가 저런 질문을 많이 해온다. 짧게 줄여달라고, 쉬운 애기로 해달라고, 대중적으로 접근해보라고.. 나는 전문 작가도 아니고, 이 글을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다.그저 난 쓸 뿐이다. 내 목소리를 내고 싶을 뿐이다. 나를 포기하고,내 목소리 감추고 하는 건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 독자를 생각할 여유가 내겐 없다. 아직은 나의 구원의 수단에 머물러있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미안하다.
그래도 이 주절거림에 대해 정성스런 댓글을 써주는 분들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죽는 순간까지,그저 내 자신의 의식지향성을 발휘해야하고,존재 근거를 확보해야 할 뿐이다.
실존의 고뇌가 있을 뿐이다.
--셋 -- 쥴리앙 오피전—국제 갤러리
작년에 에비뉴엘과 흥국 생명 빌딩에서 전시가 되었을 때 눈에 띄던 작가였다.
LCD화면에서 끊임없이 걷고있는 여인의 활기찬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동영상,애니매이션 등의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는 그의 직품을 30여점이나 볼 수 있다니 환상적인 경험이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고조되고 삼큼한 청량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서 , 회사에서 점심 시간에 거의 매일 국제 갤러리를 왔다갔다 한다.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국제 갤러리 빌딩을 보는 것도 매우 유쾌하다.기존의 단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건축물보다, 약간의 파격과 재치로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 느낌이 나서 좋아하는 것 같다..
쥴리앙 오피가 묘사한 여인들의 옷차림이나 액세서리를 꼼곰히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 중의 하나이다. 여인들의 옷차림이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적절한 액세서리와 예쁜 신발들로 인해서 전체적인 느낌이 나에겐 상당히 워너비이다.
한번은 점심 시간에 이곳을 갔는데 백발이 무성한 노교수가 학생들고 함게 이 전시회를 구경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 중에 어느 그림이 가지고 싶냐고 했다. 학생들이 머뭇거리자 교수님을 선뜻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난 저 그림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저 그림 속의 여인은 남의 부인이잖아. 남의 부인이 얼마나 흥분되는지..라고 말씀 하는 걸 듣고 혼자 키득거렸다.
그림이 그렇게 현실 세계에선 위험한 일을 상상으로나마 대리만족을 시켜줄 수 있다면, 참 깜찍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국제 갤러리는 야외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어서 그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어느 날은 유리창을 활짝 열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햇살의 찬란함이 마음 한켠에 스며들었다.
넷--오픈 하우스 (피아노 연주회)
지인이 역삼동 오픈 하우스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한다길래 갔다.
1년에 두번 정도 발표회를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조그만 규모의 스튜디오에서 세명이서 연주회를 한다.
세명의 연주자가 나와서 곡에 대한 설명도 하고 연주회도 하고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였다.
베토벤과 쇼팽의 곡을 연주했는데 ,관객으로 온 사람들이 거의 지인인듯 싶었다.
나라면 이런 기회면,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을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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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듣는 곡들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보지 못한 곡을 연주하면 어떨까..
요즘 새로 나오는 참신하고 새로운 곡들
말하자면 진은숙이 하는 현대음악 같은 거..
왜냐하면 쇼팽이나 베토벤 같은 경우는 라디오를 통해서 씨디를 통해서 정말 기가막히게 잘하는 키신이나 폴리니,브란델,리히터 같은 사람들의 연주를 듣고 있기 때문에 라이브라 하더라도 감동이 씨디 이상 번져나가기가 쉽지않아 보이기도 하고,기왕이면 청중이 적을 경우엔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기가 훨씬 쉽지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차별화 전략이다.
다른 사람들과 확실히 다른 연주 기법과 허밍으로 열광하게 만든 글렌굴드의 경우를 보더라도, 색다름,남들과는 다른 특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카잘스처럼 첼로 무반주 협주곡을 발굴해서 우리에게 즐겨듣는 곡을 선별해 준다면 그것도 얼마나 보람있는 일일까..?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버린 피아 졸라의 곡도 연주를 해주었는데, 많이 알려져서 식상한 리베르탱고보다 망각같이 덜 알려지면서도 매력있는 곡을 들려주는 센스가 있었으면..
요즘에 클래식을 연주하는 사람들,클래식을 듣는 사람들이 권력자인 듯 안일함에 빠져서 새로운 것에 귀닫고 맘닫고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
언제나 무엇이라도 변하지 않고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은 답답하다.
특히나 클래식을 듣는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들이 듣는 음악이 최고라는 편견과 자부심도 불편하게 만든다.
나도 한때는 클래식만을 최고로 알며 다른 음악에 귀를 닫은 적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가슴에 감동을 일렁이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명곡들이 정말 많이 있다.
클래식을 주로 듣는 사람들과의 우아한 사교에 빠져서 내가 정말 좋아하던 가요나 팝송을 완전 부정했다. 그걸 즐겨들었다는 사실조차 감추던 날도 있었다.
6개월 정도 클래식 강좌를 들으면서 선생님한테도 세뇌당했다.
다른 음악들은 몽땅 다 무시하는 발언에 나도 모르게 주입이 되었다.
굿바이 클래식이란 책을 쓴 저자의 마음이 일정 부분 공감이 된다
예술가에겐 적어도 일반인들이 다 가고자 하는 그런 길 이외에,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용기나 지혜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 받겠다는 생각은 던져버리고,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더라도 새로운 시대를 열고갈 수 있는 앞서갈 수 있는 과감한 태도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진은숙이 너무 좋다.
다섯—에릭 클랩톤 이야기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엘튼 존,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잘 부르는 에릭 클랩튼,로이부캐넌..스티브 윈우드,게리 라이트.. 한때는 나의 완전한 꿈이자 우상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그 굴곡많은 인생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을 나는 리요타르가 말하는 숭고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에게서는 고독한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그 힘을 능가하는 어떤 초월적인 자연에서 받는 위대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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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보이드를 사이에 두고 조지 해리슨과 벌였던 그 사랑을 쟁취하기까지의 진실한 과정에 눈물이 나기도 했고,,그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기까지 마약복용등의 일련의 마음상함들이 노래를 통해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냈을 때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어릴 땐 wonderful tonight, layla 같은 노래들이 좋았는데, 요즘엔 마약 복용 이후에 깨달음의 과정이 담겨진듯,담담히 부르는 이 노래가 더 끌린다.
에릭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오며 ,마지막 기타 리프가 압권이다.
한때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stair way to heaven과 비슷한 느낌..
순수한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던 에릭..
에릭도 지미 페이지의 상업화를 욕하는 순수한 마음(근데 지미 페이지 엄청 멋진데..) 과 상업적인 성공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내가 에릭에게 더 끌렸을까...?
내가 보여서..
여섯—그냥 주절거림
요즈음 완전히 나를 흔들어 놓는 것은 싸르트르,니체, 안토니오 그람시, 프랑크 게리,해체주의,비트켄슈타인 등에 관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싸르트르와 니체가 말하는 자유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자유라는 말처럼 그립고 설레이고 아프기도 한 단어가 있을까..
자유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속의 반대의 의미로서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필연과 연관되어진 자유의 의미가 있다.
필연의 반대말로서 자유를 해석한 싸르트르의 경우..인간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지 못하다는 무근거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내가 오늘 생각해보는 자유는 싸르트르의 자유 말고, 구속의 반대의 의미로서의 자유에 관해서이다.
내는 내가 비교적 참 생각도 자유롭고, 생활도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 매여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외의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게 쓰려고 무던히 노력하며, 하고싶은 것, 가고싶은 것,가지고 싶은 것을 경제적인 고민없이 다 실행할 수 있으며, 공부하는 것도 어디 얽매어있지 않기 때문에, 철학책 읽다가 건축책을 보기도 하며, 심리학책 읽다가, 잡지나 만화도 볼 수 있고, 클래식,팝송,가요 가리지 않고 들을 수 있는 무한대로 열려져 있는, 자유와 감성이 자유로움이 마구 넘친다고 생각한다.
20대의 꽃 같은 젊음과 인기가 넘쳐났던 그 시절에 비해서도 지금의 생활에 만족을 할 수 있는 성숙함도, 깨어지며 ,나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깨달음들도 늘 소중하다.
늘 모든 사물에 대해 감탄하는 능력과 호기심 많은 부분에 대해서, 어린아이같고 성숙하지 못하다는 주위의 오해나 편견에 대해서도 당당할 수 있게 나를 응원해주는 지인들과 예술가들에게 또한 감사하다.
극작가 제임스 베리가--- 천부적인 재능이란 무엇인가? 자유자재로운 소년 시대로 되돌아가는 힘이다라고 나를 끊임없이 응원해주고 있지않은가..?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이성과 도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과연 자명하고 확고하게 믿을만한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 생각할 수 있는 나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며 사흘간의 자유와 목숨을 맞바꾼 델마와 루이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단 사흘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나머지 모든 삶은 노예처럼 살더라도 단 사흘만 제왕처럼 누릴 수 있다면..
그들이 누렸던 자유로운 사흘이 죽음과 맞바꿀만큼 중요한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하련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프로그램대로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많은 부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나,발목에 끈이 묶여져 있는 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외롭더라고 끈 풀어진 연이.. 한 몇 달간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발목에 끈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까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파악이 안되었고..
델마와 루이스처럼 난 사흘간의 자유가 아니라 딱 석달만의 완벽한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
내가 완벽한 자유를 누렸던 그 미국에서의 생활을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내년쯤 계획하려 한다.
3개월간의 그 자유를 위해 필요한 돈을 계산하니, 일단 쾌적한 프레지던셜 타워에서 살아야하니 적지않은 돈이다. 거기다가 내가 돈을 벌지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까지 생각하니 결정을 내리기 쉽지않다. 미술관에서, 재즈바에서,블루스 바에서, 클럽에서, 노드스트롬에서 콜한,밀레니엄 파크,리릭 오페라에서 그렇게 놀 생각을 하니 힘이 폴폴 난다.
내년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늘 마음에 품고 있고 ,그것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늘 치열하게 살아간다.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호로비츠의 연주로 월광을 듣다가 숨이 턱 막히게 좋아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뒤이서 몬테사노의 플라멩고 풍의 기타 연주로 같은 곡의 연주가 나왔는데 이 곡 또한 기가막히게 좋아서 정신이 얼얼했다.
오월은 너무 아름다워서 주저앉기엔 너무 아까운 날들이며,어제는 아카시의 향기에 , 오늘은 몬테사노에 홀려서 그렇게 지낸다.
내게 일상은 너무나 매력적이며.
오늘 또 매혹적이고 위대한 나의 일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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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은 그렇게 보고싶었던 짐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를 보고,금요일엔 끼아악~이 승철 콘서트를 보러갑니다. 이승철 콘서트 간다는 생각에 잠을 계속 설쳐댑니다.ㅎㅎ 공연장 가서 따라 부르려고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와 듣고 있나요를 틈틈이 들으며 가사를 외우고 있어요. 공연장 가서 악쓰면서 따라 불러야죠. 근데 가사가 왜이리 안외워진다지..ㅎㅎ
어무나, 콘서트! 좋겠당. 이승철은 잘 모르겄고 그냥 콘서트라는 말이 좋아요. 예전 한 작은 교회에서 음대생들이 콘서트를 연 적 있어요. 그때 '마림바'라는 악기를 처음 보았고 그 소리도 처음 들었는데,, 이런 멋진 세계가 있구나.. 했었지요. 그런 소박한 콘서트 문화가 그리워요./ 저녁에 다시 만나요~~^^
전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이 승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울 회사 젊은 애들도 콘서트 간다해도 하나도 안부러워해서..놀랐어요. ㅎㅎ 으흠,. 그렇구나.. ㅎㅎ 마림바는 몰까요..? 나중에 검색해봐야지..
^^ 홍상수가 칸에서 영화 안의 김태우가 받은 질문을 그대로 받았다고 하네요~. 엊저녁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검색해보니, 그러니까 오늘 새벽 1시 30분에 하는 것이 마지막 방영이더군요.ㅜㅜ '마더' 라도 잊지말고 잘 챙겨야겠어요. 칸에 가더니 우리영화의 품격이 갑자기 높아진 것 같은.ㅎㅎ '나쁜교육'이 알모도바르영화였네요. 그의 영화에서 흐르는 키치적냄새에 끌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보았는데 충격적으로 좋았다고 할까요. 몰랐던 세계를 발견한 낯섦과 함께 큰 비애가 느껴지는 영화였어요. '신경쇠약직전의 여자'라는 영화도 있나본데 순전히 제목만으로도 보고싶은 영화에요.
아..그랬군요. ㅎㅎ 홍상수 영화 어릴 적엔 절절하게 이해가 안갔는데..나이가 들어서일까.? 내가 좀 변했나..? 편안하게 볼 수 있더라구요.. 신경쇠약직전의 여자.. 아..나두 보고싶어요..~ 이 영화 감독 참 독특하더라구요..
저는 오월 들어서서 밋밋한 생활의 연속이어요. 화려한 날은 가버리고 ..오월에 피는 이 꽃들은 웬 뒷북이야, 하는 느낌이랄까.. 원기충천할 비타민이라도 자주 복용해야할까봐요.ㅎㅎ
전 화려한 날은 진즉에 가버렸지요. 이제 내 앞에 오는 모든 시간들을 담담히 받아들일려구 하는데.. 잘 안돼지요.. 잘 안되어서.. ㅎㅎ 오월에 피는 꽃들.. 전 아카시아만 봤어요.. 정말 좀 뒷북이네..ㅎㅎ 향기 하나는 정말 좋던데요.. ~! 좋은 꿈예쁜 꿈 꾸시고 낼 뵈어요..~!
아, 여기서 화려한 날은 삼,사월의 의미였어요. 숨죽이게 하는 목련, 벚꽃, 과수나무들... 그 찬란함... ㅎㅎ 편히 쉬세요~~
이~런..제가 이렇게 독해를 엉망으로 해요. 졸려서 그랬나..? ㅎㅎ 목련이..숨죽이게 한다.. 정말 표현 넘 좋아요.. 벚꽃 지니 정말 화려한 날 다 갔다 싶어요.ㅎㅎ~ 그래도 오월은 완전 초록이던데요.. 사방이.. 싱싱한 기운이 느껴져요..나름의 묘미가 있어요.. ㅎㅎ
일상을 매혹적으로 열정적으로 살아내신다는 표현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ㅎㅎ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살아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않은 일인데...많은 것들과의 충분한 교감과 흡수가 그 원천이 아닐까 싶네요.오늘도 진은숙이라는 좋은 예술가를 얻어갑니다.(검색해보니 진중권씨의 누나라는데...)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의 Chipi Chipi를 검색해서 듣는 중입니다.영화보고 몇 날을 그 흥에 취했었는데..비내는 오늘 에너지가 충전되는듯한~! ^^
시라노님 덕에 저도 이 노래 들어봤어요. 기억이 가물가물..ㅎㅎ축 처지는 음악 듣다가 이 노래 들으니.. 힘이 약간 나려고 해요. 진은숙이 저도 진중권 누나니까 관심 가진 겁니다.제가 진중권님 스토커거든요.ㅎㅎ 처음 그 노래 듣고 기절했어요. 신기하더군요. 진중권님한테 누나 노래 어떻냐고 물어봤더니..잘 이해못한다고 하셨어요. ㅎㅎ 그 집안 참 대단한 집안이에요.~누나분 고생한 얘기도 참 재밌어요..`아마도 진은숙..엄청 연하랑 잘 살고 있던데..그 부분도 참 부~럽더군요..헤헤
시라노님 댓글 두개나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댓글 수 저 정말 좋아하거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