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신파극
기혁
잘못 날아온 눈덩이 하나가
가슴께를 치고 들어온다
둥글었지만 미완이었고
얼어붙었지만
액체의 경험이 기억의 전부였다
수십 개의 눈덩이를 주고받던 아이들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서로의 외상外傷을 별명처럼 늘어놓는다
코피도 머리 혹도
우스꽝스러운 유희가 되어 두 뺨을 붉게 만들 때
속수무책 날아오는 차고 시린 슬픔을
한 번의 고함으로 멈출 수 있을까
사랑이 머물던 자리는 너무 뜨거운 것이 아니라
소심하다는 생각
조심조심 눈덩이를 피해 가다
마주 오는 행인과 부딪치면 참았던 울음을
또다시 속으로 욱여넣는다
지나간 사연들로 들끓는 뒷골목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녹아내린 눈덩이들이
그만큼의 수위水位를 높이면
물에 물을 탄 어떤 고독이라도 마침내 바다가 될 것이다
파도의 가능성을 더 단단하게 뭉치는 아이들을 피해
빙판길로 들어설 무렵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전봇대를 붙들고
귀신에 홀린 듯 씨름하던 취객은
익사溺死를 걱정해야 한다
좀처럼 얼지 않는 동지의 어둠 속
움츠린 품 안에서 배 한 척이 밀려 나온다
눈덩이 하나 어쩌지 못하는 체온으로
서럽게 다른 체온을 부르는
눈사람
움직이는 눈사람을 신파라고 여긴다면 사람의 폐허엔
겨울만이 발 디딜지 모른다
배를 밀다 주저앉은 그날처럼
식어가는 모든 것들의 뒷모습이 닮아간다
― 《문학사상》 (2022 / 2월호)
기혁
경남 진주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0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소피아 로렌의 시간』. 2014년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