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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향을 찾아서
ㅡ임영조 편
장마와 무더위를 이기면서 서늘한 가을까지 수개월을 피는 꽃이 있는가 하면 쉬이 질 것 같지 않았던 붉은 꽃덩이가 어느 날 황망하게도 툭 떨어지는 꽃이 있다. 시인 임영조가 그랬다.
임영조(1943년~2003년), 그는 시가 한껏 무르익어 가던 시기, 60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여 그야말로 그의 물오른 시창작의 저력을 한껏 기대하던 독자와 지인들의 가슴을 황망하게 했다.
11월 중순에 접어든 절기상으론 초겨울이지만 포근한 날씨 때문인지 단풍은 아직도 절정이다. 이른 아침 들판을 감싼 젖빛 안개를 가르며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로 간다. 임영조 시인 살아생전 지척에 살며 가깝게 지냈다는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 시인을 만나 ‘귀로 웃는(耳笑)’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정문 입구부터 예술대학까지 줄지어 늘어선 은행나무, 팔랑팔랑 바람에 나부끼는 황금빛 잎새가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다. 임영조 시인은 나비의 날갯짓을 “천하의 바람둥이” “화려한 춤사위”라 표현하며 “어디에 머문들 정 두지 않고 훨훨 몸 자주 털고 가 일생이 무겁지 않겠구나”라고 부러워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경제적 위기로 고통을 겪고 있는 마음 스산한 이 가을, 시인은 하늘에서 홀가분하게 안식을 취하며 귀로 웃으면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이승하 교수 연구실에서
임영조 시인은 서라벌 예술대학을, 이승하 시인은 중앙대학교 문창과를 나왔으니 이름은 달라도 학교 선후배인 셈이다. 이승하 시인은 이렇게 말문을 텄다.
“저는 원래 안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영조 선배가 과천이 좋다며 이사를 오라고 해서 이사를 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술을 좋아해서 술친구하려고(?) 오라고 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임영조 시인과 함께 술에 취하지만 과천까지 가는 동안 술이 다 깹니다. 그러면 과천에서 2차, 다시 술이 취하고……. 결국 조금 덜 취한 내가 술값을 치르게 되는 거죠.”라며 그는 그때가 싫지 않았던지 하하하 웃는다. 웃는 그 모습에 어떤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귀로 웃는 시인’ 임영조, 그의 본명은 세순(世淳)이며, 1943년 10월 19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 황율리 104번지에서 아버지 풍천 任씨 경재, 어머니 광산 金씨 복순 사이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는 호적상의 나이가 두 살 줄어서 등재된 까닭에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산 중학교 2학년 때는 지리(역사전공) 교사로 부임한 신동엽 선생님으로부터 글 잘 쓰고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총애를 받으며 문학을 동경하게 된다. 아버지의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한다.
그는 재무부 관료였던 외숙의 도움으로 서울의 대동상고에 입학하지만 외숙이 5ㆍ16쿠데타로 실직하는 바람에 다시 학업을 중단, 서울 전신전화국 급사로 일하며 무려 5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어머니의 삯베짜기가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어린 그에게 달라붙은 가난. 하지만 그의 빈곤과 외로움은 오히려 그를 문학의 길로 부추기는 길잡이가 된다. 그런 어려움 중에서도 그는 소월의 시 200여 편과 김광균의 시집 『와사등』과 『기항지』를 완벽하게 외며 시 쓰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 영향으로 “그의 시가 소월의 전통적 민중정서에 기반을 둔 간결한 리듬과, 김광균의 깔끔한 수채화 같은 이미지 구사가 눈에 익는다.”고 한다.
앉은 이 중 가운데가 임영조 시인, 제일 왼쪽 안경 쓴 이가 이동하
그는 서울로 온 신동엽 시인으로부터 본격적인 시작 수업을 받는다. 1965년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서정주ㆍ박목월ㆍ김수영ㆍ함동선 등 한국문단의 거장들 문하에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는다. 1966년 동기였던 이동하가 서울신문에, 김형영이 『문학춘추』로 등단하자 임영조는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품고 자원입대한다. 그는 훈련 중에도 틈틈이 스승 신동엽 시인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얼마나 자주 보냈던지 그는 신동엽으로부터 “너의 소속과 병과를 다 알았으니 보리밥 많이 먹고 훈련이나 열심히 받아둬라.”라는 엽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곤 제대를 3개월 앞둔 1969년 봄, 잠깐 다녀가라는 신동엽 시인의 급한 전보를 받지만 그해 초 김신조 등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인해 찾아뵙지 못하다 며칠 후 그의 부음을 듣는다. 시인은 이를 평생의 회한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대 후 그는 대전 부근의 비래사에서 6개월간 기거하며 본격적인 시 쓰기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곤 7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안타까운 고배를 마신다. 하지만 그해 가을 『월간문학』 신인상에 「출항」으로 당선하고 곧이어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가 중앙일보에 투고한 이유는 당선사례금이 타 신문에 비해 2만원 높은 7만원이었기 때문이었단다. 당시 그는 마포구 도화동 고지대에 2만 5천원 전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다시 톱질을 한다
언젠가 잘려나간 손마디
그 아픈 순간의 기억 잊고
나는 다시 톱질을 한다.
(중략)
자네는 아는가,
대낮에도 허물어진 목수들의 날림 탑.
그때 우리들 피부 위를 적시던
뜨거운 모정의 긴긴 탄식을,
그러나 도처에 숨어 사는 기교는
날마다 허기진 대팻날에 깎여서
설익은 요령들만 빤질빤질하거든.
밖에는 지금
집집이 제 무게로 꺼져가는 밤,
한밤 내 눈은 내리고
드디어 찬 방석에 물러앉은 산
내 꿈의 거대한 산이
흰 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ㅡ「목수의 노래」 중에서
이 시는 49행의 장시다. 하지만 박차고 나가는 긴긴 서술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나를 찾아보기는 좀 힘들다. 당시의 유행(시의 흐름)이 그랬을까. 소시민의 삶을 텍스트로 취하고 있으나 삶 속으로의 접근방법에 있어서는 80년대 이후 쓴 시에 비해 미온적이며 관념적이다.
1973년 8월 30일 그는 아들 진수를 얻는다. 그리고 74년, 몇 군데 잡지사를 전전하던 그는 태평양화학 홍보실로 직장을 옮기고, 지방에서 근무하던 부인이 서울시 순위고사에 합격해 성동중학교의 국어교사로 발령받으면서 합쳐 살게 된다. 취재팀은 부인의 거처를 찾고자 했으나 건강문제로 지금은 미국 친지집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좌로부터 임홍재, 이인해, 임영조, 정대구
이듬해엔 이인해ㆍ정대구ㆍ임홍재 등과 ‘육성’을 결성하여 두 번째 사화집까지 펴내곤 임홍재의 급서로 중단한다. 그 후 약 10여 년 절필하는 대신 시집과 문학서들을 읽으며 자신의 시세계의 체계를 세워 나간다. 1985년엔 등단 후 처음으로 ‘시 원고청탁서’를 받고 감격한 나머지 내친 김에 밀쳐두었던 시작활동을 재개한다.
그해 가을, 그의 첫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를 고려원에서 출간한다. 88년엔 두 번째 시집 『그림자를 지우며』(현대문학사)가 출간되며, 89년엔 제 23회 잡지언론상 기업사보 부문을 수상하고 출판부장으로 승진, 91년엔 『한국문학』에 발표한 시 「환절기」로 제1회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한다. 92년에 세 번째 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세계사)를 출간, 93년 상기 시집으로 제3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禪門)에 들 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여!
(중략)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ㅡ「갈대는 배후가 없다」부분
시인은 현대문학상 수상 후 이때부터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비움을 시작했던지 1994년엔 20여 년 몸담았던 직장(태평양화학)을 사직하고 사당동에 방 한 칸을 세 들어 ‘耳笑堂’이란 택호를 걸고 시작과 독서로 소일한다. 그리곤 그해 한국시인협회 정기총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선임된다. 한편 『문학사상』7월호에 발표한 시 「고도를 위하여」 외 10편으로 제9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수상시집 『고도를 위하여』(문학사상사)를 출간한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 임기를 마치고는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는데 이때 공석인 사무국장 자리를 후배인 이승하 시인이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청하여 이승하 시인이 수락하고 일을 함께하며 더욱 자주 만났다고 한다.
생가가 있던 자리
이승하 시인과의 인터뷰를 마친 취재팀은 충남 보령으로 향한다. 임영조 시인의 고향이며 그의 시비가 있는 곳이다. navigation의 안내로 찾아간 주산면 황율리 104번지 마을 입구. 우연인지 아니면 이 마을이 원래 염소를 기르는 마을인지…! 마치 시인이 내다판 염소가 새끼를 낳아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 것처럼 때마침 추수 끝난 벼논에서 어미 염소가 새끼염소 세 마리를 데리고 새로 돋아난 풀을 뜯고 있다. 고 2때 납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는 시인. 그는 그때의 회상을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내다판 걸 알았다”라고. 가난과 타향살이의 아픈 마음을 그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푸른 대숲을 등진 황토밭에서 이순을 훌쩍 넘었음직한 노부부가 마늘을 심고 있다.
이곳이 임영조 시인이 태어난 곳이냐고 물으니 눈을 깜빡거리며 먹먹한 표정을 짓는다. 박인식 팀장은 얼른 “아, 임세순 시인이 태어난 곳이지요?”라고 묻는다. 마늘을 꽂고 앉았던 남자는 그제야 바지춤을 추키며 일어나 “그류. 맞어유. (대숲과 비닐하우스를 가리키며)바로 여기유. 그런디 집은 오래 전에 허물어서 읎슈.”라고 한다. 임현갑 씨는 임영조 시인과 5촌뻘 되는데 시인이 윗대라고 한다. 시인의 부모님도 여기서 농사를 지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아니유. 아버지가 집안을 잘 돌보지 않았고, 가난해서 (세순의) 어머니가 베(모시)를 짜서 근근이 연명했슈. 그 어머니의 베 짜는 솜씨는 근동에서 다 알아줬슈.”라고 한다. 이곳은 모시의 주산지 한산과 인접한 곳이다. 임영조의 어머니는 삯을 받고 모시를 짜서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쳤다. 그의 섬세한 솜씨는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잠자리 날개와 같다는 한산 세모시, 씨줄 날줄의 정교한 교차! 그 어머니의 솜씨를 닮아 시인의 시적 묘사가 그토록 섬세한 것일까.
시인의 시비는 주산면 동오리 보령댐 청기와휴게공원에 세워져 있다. 2007년 7월 27일에 제막식을 함.
한국시인협회와 한국문협보령지회가 주관하고 보령시, 한국수자원공사가 후원하여 세워졌다. 사실 시비를 세우기 위해 이승하 시인이 모금운동을 벌이며 애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김정원(보령시 시의원) 시인이 적극 주선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령시 의원회관에서 만난 김정원 시인의 전언이다. 시비에는 아래의 시가 적혀 있다. 제자題字 이근배 시인.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 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ㅡ「물」 전문
췌장암 진단을 받고 단 몇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2003년 5월 28일) 임영조 시인. 그의 저서는 앞서 소개한 시집 외에도 제4시집 『귀로 웃는 집』(97년 창비), 제5시집 『지도에도 없는 섬 하나를 안다』(2000년 민음사), 제6시집 『시인의 모자』(2003년 창비)가 있다. 작고 후엔 추모문집 『귀로 웃는 시인 임영조』(2004년 천년의 시작)가 간행되었고, 2008년 5월 30일엔 그의 시전집 『임영조 시전집』1,2권이 간행되어 출판기념회 겸 추모의 밤 행사가 있었다.
취재에 도움을 주신 이승하. 김정원 시인님, 임현갑 님 부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취재팀: 기획: 박인식
사진: 정동희
글: 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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