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로 8월호가 나왔다. 통권 350호의 권두시는 김기림의 ‘나비’. 주요 목차와 시 몇 편을 옮겨 어제 서울 봉원사에서 찍은 연꽃과 함께 올린다.
♧ 주요 목차
□ 권두 에세이 | 나병춘 □ 신작시 23인 選 | 임보 이생진 洪海里 권순자 서량 이문형 마경덕 장성호 박홍 최병암 우정연 안원찬 장유정 채영조 김정인 유수진 임헤라 최연수 박명옥 김지란 윤순호 나영애 이동우 □ 기획 연재 인물詩 | 이인평 □ 신작 소시집 | 유진 □ 테마 소시집 | 호월 □ 신인상 발표 | 정형무 □ 임보의 연시집 일역 | 고정애 □ 시 에세이 | 이동훈 장수철 □ 詩로 만나는 우리 들꽃 | 김승기 □ 나의 대표작 | 백수인 □ 한시한담 | 조영임
♧ [권두시]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 천하 명당明堂 - 임보
명당이 어딘고 하니 지금 앉아 있는 내 집의 식탁 자리
오른편 탁자 위엔 TV가 켜져 있고 왼편 창밖엔 푸른 뜰이 내다보인다
천리 밖 허상虛像과 지척의 진경眞景 두 세상을 아울러 거느린 공간
TV에선 뉴스와 광고전이 치열하고 뜰에선 귤과 백모란이 다투어 꽃을 열고 있다
찾아올 사람도 찾아야 할 사람도 없는 한가로운 5월의 첫머리 오후
저쪽도 기웃 이쪽도 기웃 사바娑婆와 정토淨土를 넘나들며
매실주 한잔 곁에 놓고 <청산별곡> 흥얼거린다.
♧ 아름다운 하루 - 이생진
이 하루를 누구랑 놀지 마당에 조팝꽃 산에 진달래 누구랑 놀지?
그 여인과 놀아 누구?
아침식사 때 밥과 국을 날라다 준 여인 시간이 없을 텐데 그는 그 자리에 있게 하고 영혼만 불러내는 거야 그런 힘이 어데 있는데 시에 있지 자네가 써내려가는 시
내게 밥과 국을 날라다 준 여인 오늘은 그녀와 시 속에서 놀자.
♧ 그런 詩 - 洪海里
누구나 “아, 그 詩!” 하는 그런 詩 한 편 낳고 싶어,
오늘도 꼭두새벽 냉수 한 대접 들이켜노니!
생수 같은 詩 바로 그런 詩!
♧ 천불천탑 - 이문형
옛날 옛적 궁궁弓弓*을 찾아 바람계곡을 갔었네 새 하늘 새 땅을 수줍게 아로새긴 천불천탑 그중에 나는 없었네
저기 천진天眞한 곳에 허물 벗는 가난한 보살* 하나 낳고 싶었네
--- *궁궁弓弓 : 십승지, 일원一圓 또는 태극이라고도 함. *가난한 보살 : 스스로 고난 받은 가난한 보살. 극빈을 헤매는 민초를 위로하는 상처받은 위로자. (김응교)
♧ 가족사진 - 마경덕
길가 담 밑에 버려진 단란한 가족들 널브러진 쓰레기 틈에 먼지 낀 얼굴이 화사하다 발길에 차여도 여전히 웃고 있는 앞자리에 앉은 다정한 중년부부 양쪽 무릎에 매달린 강아지 같은 손자들 등 뒤에는 젊은 부부가 울타리처럼 서 있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가족들 불행은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색색의 조화造花처럼 화려한 대낮 길에서 만난 행복한 표정들 어디에도 그늘 한 점 없는 액자 소에 왠지 낯익은 얼굴들, 마주친 눈이 민망하다 곱게 한복으로 포장한 여덟 명의 가족들,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을까 누군가 혀를 차며 지나가도 가족이란 한 묶음이라고 여전히 한 자리에 묶여있다
♧ 여수의 물빛 - 우정연
사람이 그리울 때 산으로 가듯 외로운 사람들은 바다로 가서 갯내음 흠씬 들이켜 허기진 구석 채워주네 남녘 바다가 동백섬을 품어 휘돌아 굽은 잔등 풀빛처럼 푸르고
여수의 물빛은 풀 물든 섬사람 눈빛처럼 푸르디푸르다
♧ 그네를 타는 저녁 - 최연수
남을까, 갈까,
줄을 나눠 쥔 마음도 두 가닥 왁자한 귀가는 멀어 수없이 불러보는 이름은 솔기가 해지고
확신 없는 그림자가 오후에서 저녁으로 건너간다
허겁지겁 주머니마다 발걸음이 가득한 그때는 한 사람에겐 너무 이르거나 또 한 사람에겐 너무 늦은 시간 손에 쥔 열쇠가 한 곳에만 맞듯 나는 왜 한 명에게만 맞아야했을까
기댈 곳 없는 생각을 발끝 세운 바람이 밀어주는 그네는 가장 편안한 공중의자
납작해진 발아래를 쓰윽 찔러보면 나보다 더 깊숙한 웅덩이가 올려다본다
나를 밀어낸 거리는 꼭 그만큼 너를 되돌려 보내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면 다시 어제로 뒷걸음질 치는데 뭉클한 햇살을 찍어 그림자가 가로쓰기를 한다
허리춤에서 꺼낸 울음과 웃음이 한 행에서 만나듯 같이 깨어있고 같이 저물 수 있을까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것들은 이미 오래도록 흔들린 것들
빈 놀이터가 비닐우산처럼 접혀있다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