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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가 6,20-26)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말씀의 초대 신앙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현세적인 삶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 낡은 인간은 끝났고, 새 인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주님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하신다. 하지만 원인이 ‘주님과 믿음’ 때문이어야 한다. 주님과 무관한 가난이라면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신앙생활과 관계없는 슬픔 역시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인 까닭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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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은 뜻밖입니다. 출발부터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의 우선 조건을 ‘부자’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난감한 표현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자라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 오늘 복음은 행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에 대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부족함을 느끼는 데 행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넉넉하고 넘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을 행복의 첫 조건으로 꼽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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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행복’에 관한 말씀은 루카 복음과 마태오 복음에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불행 선언’은 루카 복음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행 선언’을 말씀하셨음에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사실을 몰랐거나, 편집 과정에서 빠뜨렸을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배부른 것을 찾고, 웃음을 찾으나, 주님께서는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박해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은 부와 배부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찾고 기대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보호자요 배경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청년으로부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채였다고 말하더군요. 정말로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자 친구가 어느 날 헤어지자고 하더랍니다. 자기에게 좋은 남자가 생겼다면서 말이지요.
이 청년은 과연 여자 친구의 새로운 남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미행을 해봤지요. 그런데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키도 작고 볼품도 없더라는 것이지요. 또 친구들을 통해서 알아보니 대학도 형편없는 곳을 다니고 있고, 집안도 그렇게 여유 있지 않더랍니다. 자기와 비교할 때 너무나도 형편없는 사람을 쫓아서 갔던 여자 친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그런 사람 만나려고 나와 헤어진 거야?’ 이러한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문득 이러한 상황이 떠올려지더랍니다. 만약 새로운 남자 친구가 키도 훤칠하고 잘생겼으며, 좋은 학벌과 직장 그리고 집안까지 빵빵하다면 어떨까? 그러면 더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헤어진 것은 자신의 외모가 형편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점점 걱정이 되더랍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어야 할 텐데, 자신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헤어졌다는 그 자체보다도 여자 친구의 새로운 남자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 안에서 더 힘들어지는 자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에 연연하며 사는 것보다는 지금 새로운 마음으로 더욱 더 힘차게 살자는 것으로 결론을 지을 수가 있었답니다. 우리 인간들의 특기는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특기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특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버려야 합니다. 대신 현재에 충실한 새로운 특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먼 훗날에 완성될 행복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완성해야 할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은 그 행복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에서만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마치 먼 훗날의 일인 것처럼, 죽어서 완성되는 곳이 하느님 나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 분명히 완성됩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지금 생각하고 바로 이 자리에서 행동할 때에 행복은 분명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이 바로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되기 위해 오늘도 하느님의 관점에 맞추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공적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침묵은 최고의 칭찬이다(랄프 왈도 에머슨).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 -최성기 신부-
현대 사회를 일컬어 제로섬(zero sum) 사회라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정량을 놓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대립하면서 이들이 갖게 되는 득과 실을 모두 합치면 ‘0’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한 사람의 이익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됩니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이 어렵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내가
허상과 진실 -김석인 신부-
요즘 세상에는 참 많은 소리가 들린다. 또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것이 나에게 유익하고 해로운지….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들이 밀려온다. 홍수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광고 덕분이리라. 때로는 이러한 것들이 참으로 유용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가만히 앉아 세상을 다 알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소유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 하나 없이 정말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다.
불행하지 않은 행복, 행복하지 않은 불행?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행복 선언이고 물질적 가난도 중요하다 -전삼용신부- 로마에서 같이 공부하는 한 신부님이 방학동안 부모님을 초대하여 차를 렌트하여 이태리를 여행하였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려고 좋은 차를 예약했었는데 더 고급 세단이 나와서 너무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게소에 설 때마다 다른 차가 옆에 주차하면서 긁지나 않나 훔쳐가지나 않나 걱정이 되어 차를 떠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다 못한 그 신부님의 어머니께서 “신부님, 그러려면 차라리 싼 차를 빌리지 그랬어요.”라고 하셨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을 갖게 되면 좋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걱정도 하나 늘게 됩니다. 누구나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아니 결혼을 해도, 행복한 마음도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의 사랑을 잃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도 동시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갖는다면 이렇게 잃을 두려움도 동시에 가져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분이, “먹고 살 수 있어야지, 가난한데 어떻게 행복합니까?”라고 막 따지신 분이 계셨는데, 역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진리입니다. 욥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 중의 한 명이었지만 가족과 재산과 자신의 건강까지 다 빼앗기고 맙니다. 이 때 이렇게 말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공동번역; 욥 1,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 물질, 육체, 우리 생명까지도 그분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정말로 모든 것의 주(인)님은 하느님이심을 마음 깊이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부자이면서도 가난할 수 있고 가난하지만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 분 것이니 가난해져서 무엇을 잃을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살게 되지만 동시에 하느님을 얻게 되고 영원한 삶을 약속받게 되니 세상 누구보다도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교구청에 미사가 있어서 갔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내내 차 문을 잠그지 않고 들어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몇 번 차가 털린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미사에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차에 옷을 걸어놨는데 그 옷 안에 지갑을 놓아두었고 지갑에는 상당한 액수의 현금과 카드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주님께서 다 지켜주실 거야!’라고 위안을 하고 잘 지켜 주십사고 기도도 하였지만 마음이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았습니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주차장으로 달려가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로 나와 있지만, 루카 복음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로 나와 있습니다. 루카는 어쩌면 물질적으로도 가난해지지 않으면 그만큼 마음이 평안해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완전해 지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완전해지려면 마음만 가난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까지도 가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과 육체적 욕망과 소유욕이 세포 하나하나마다 존재하고 있어서 이 세 죄의 뿌리로부터 모든 죄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성욕과 소유욕 또한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참 ‘주님’을 버리고 내가 ‘주인님’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소유욕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복음삼덕 중에 가난입니다. 마귀는 온 세상의 영화를 보여주며 예수님께 절을 한 번만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영화는 어쩌면 마귀의 것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자주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참 주인이신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으면 그 분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나라는 나에게 멀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고, 또 부자는 거지 라자로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지 못한 것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시간도 많고 배도 부르고 그만큼 만족하고 있어서 죄를 지을 시간도 그만큼 충분하고, 더군다나 나누지 못하는 죄까지 겹쳐지기 때문에 더 하느님의 평화를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가난만을 강조하면서도 물질적으로는 계속 부자가 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바닥체험> -양승국신부-
살다보면 가끔씩 철저하게도 제 자신이 망가지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다고,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 올바른 지향을 두지 않았기에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는 실패를 체험합니다. 가끔씩 바닥으로 떨어지는 참담함이나 비참함을 절절이 체험하면서 제가 얻은 소중한 진리가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언제인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기를 쓰고 위로만 올라가려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이 정도면 내 인생도 꽤 잘 나가는 편이겠지?"하는 순간, 그것이 농담이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제 잘난척하는 순간 하느님은 어느새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바닥체험을 통해 기고만장하던 우리의 기를 꺾어 놓으십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우리가 한 순간에 "야, 내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었구나!"라고 고백하게 만드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럴 때 물론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싫어집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마다 얻게 되는 소중한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가끔씩은 바닥을 길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줍니다. 참담한 실패, 죽고 싶은 마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다 필설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생의 최저점에 설 때마다 저는 제 자신 본연의 모습, 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똑똑히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떠난 나는 결국 티끌이었구나! 결국 내 생애는 하느님 자비로 이어온 자비의 역사였구나!"하는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제 제게는 하느님 당신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겸손함, 거기서 다시 한번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새 삶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입니다. 결국 우리가 저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축복으로 보십니다. 가난, 질병, 고통, 착취, 시련, 한탄, 원망, 박해, 욕설, 죽음, 십자가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축복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양승국신부- <착한 죽음의 연습> 저희 수도회 오랜 전통 가운데 ‘착한 죽음의 연습’이란 것이 있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당신이 설립한 아이들의 기숙사에서 행해지던 행사였습니다. 저희 집 같은 양성공동체에서는 아직도 그 좋은 습관이 남아있지요. ‘착한 죽음의 연습이란’ 뭔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피정을 한번 하는 것입니다. 월말이 다가오면, 월례피정을 하면서 피정과 동시에 자신의 생활공간과 주변을 깨끗이 한번 정리정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불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공동체 앞에 내어놓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잘 정돈된 모습으로 떠날 수 있도록 외적, 내적인 준비를 한 달에 한번 실시하는 것이지요. 최근 새 학기를 맞이한 저희 공동체에서도 ‘착한 죽음의 연습’을 실시했습니다. 사용하는 침실도 바꾸었습니다. 저도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침실을 바꾸었습니다. 침실을 바꾸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는 형제들, 그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는 형제들을 저는 그냥 두지 못합니다. 인정사정없이 혼냅니다. “수도자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으냐? 달랑 가방 두 개만 양손에 들고 갈 수 있어야지” 그러면서 저는 보란 듯이 폼을 잡지요.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만 이불에 뚤뚤 말아서 어깨에 메고 단 한 번에 침실을 비워버립니다. 뭐든지 모으기 시작하면, 거기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중에는 반드시 애착이 가는 값진 물건도 있겠지요. 그러니 당연히 문단속도 잘 해야 합니다. 어디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것은 절대로 사지 않고, 모으지도 않고 늘 정리하며 살아가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침실을 바꿀 때, 공동체를 바꿀 때, 그렇게 간단할 수 없습니다. 침실 문을, 사무실 문을 언제든지 활짝 열어놓고 살아갑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 실감하며 삽니다. 하느님 나라가 약속된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는지 생각해봅니다. 시편에서는 인간의 능력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하느님은 뒷전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만 신뢰하고 그분께 삶의 마지막 희망을 두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기에,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께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 사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 집착 때문에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할 여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매일 그 소유로 인해 부대낍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영혼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렵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상 천국 체험은 요원합니다. 매일 버리는 사람들, 매일 떠나는 사람들, 매일 정리하는 사람들, 매일 어제와 결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지상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서있는 듯한 감미로운 평화가 친구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양심불의 촉수를 높일수록 -송미영 수녀- 옛날 중국엔 같은 날 한집안에서 출산과 제삿날이 겹치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제자가 근심에 가득 차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방금 제 아들이 태어났는데 오늘이 어머님의 기일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스승이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가서 모친의 제사를 지내게.” 그러자 제자는 환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나갔습니다. 잠시 후 다른 제자가 와서 역시 근심어린 모습으로 물었습니다. “방금 저희 집에 강아지가 태어났는데 오늘이 마침 아버님의 기일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제사를 궐하게나.” 그 제자도 안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서영남 -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가난한 사람이 정말 행복합니까? 정말 가난은 힘겨운 것입니다. 노숙을 해야 하고, 추운 방에서 자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질병으로 고통받고 울어야 합니다. 가난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가난은 참으로 막막한 것이고 슬픈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외롭고 속상한 것이 가난입니다. 하느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주고 사랑하고 정의를 지키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조풍성 신부-
이젠 가을이라는 계절의 이름을 불러도 될 만큼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찾아야 할 참된 행복” -이기양 신부-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새옹(塞翁)이란 새상(塞上:북쪽 국경)에 사는 늙은이란 뜻이지요. 글이 생겨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 -최혜영 수녀-
예수님의 전도 활동 초기에는 군중들의 인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김경희 수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상 논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부자가 되고 싶은데 부자는 불행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말씀이 이제 나이를 먹고 인생 중반을 넘어가니까 조금은 알아듣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얻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얼마나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얻고 싶은 행복은 물질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을 가져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배재근신부- 흔히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이회진신부-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아래 자신들의 자리에서 기다리던 이들이었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루가 복음은 5장-9장까지 설교와 기적 등을 통해 모두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 우리가 듣는 4가지 행복선언과 4가지 불행선언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보다 집약적이며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야 하며,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멸시 받는 이들을 “지금” 가까이 바라볼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아픔, 고통, 슬픔, 멸시, 인간 소외, 질병, 기아, 고독 … 등 인간의 온갖 어려움에 대해 마음을 열어 관심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걱정이 없다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바라보는 데 둔감해지는 것을 예수님을 “불행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활 영역이 좁은 사람들은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고,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관심 혹은 가족에 대한 관심 정도 밖에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세대에 부모님들의 첫 번째 관심은 하나나 둘밖에 없는 자녀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 어려움에 대해 부모들은 이미 알고 있기에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더 많은 지식과 방법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첫 교육부터 대결과 성공 그리고 사랑의 주관적인 면을 무의식중에 가르치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에 대해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사람이 살아갈 동기와 힘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음을 보도록, 그래서 더 많은 동정심이 필요하며 더 많은 형제애와 선행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복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깊은 마음을 지닐수록, 우리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아픔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도 더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이죠.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전하는 4가지 행복과 불행에 관한 선언에서도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외적 만족이나 물적 충족감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말씀으로부터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적 감수성”을 “지금”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길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길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이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금 잠시 눈을 감고 저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이의 마음을 제 마음에 담으며 당신께 기도합니다. 그를 위해 당신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멘.”
사람들은 많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착각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아줌마 : 화장하면 다른 사람 눈에 예뻐 보이는 줄 안다. 연애하는 남녀 : 결혼만 하면 깨가 쏟아질 줄 안다. 시어머니 : 아들이 결혼하고도 부인보다 엄마를 먼저 챙기는 줄 안다. 장인 장모 : 사위들은 처가 집 재산에 관심 없는 줄 안다. 남자들 : 못생긴 여자는 꼬시기 쉬운 줄 안다. 여자들 : 남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면 관심 있어 따라 오는 줄 안다. 부모들 : 자식들이 나이 들면 효도할 줄 안다. 아가씨들 : 지들은 절대 아줌마가 안 될 줄 안다. 회사 사장 : 종업원들을 닦달하면 다 열심히 일하는 줄 안다. 아내 : 자기 남편은 젊고 예쁜 여자에 관심 없는 줄 안다. 남편이 회사에서 적당히 해도 안 잘리고 진급 되는 줄 안다. 꼬마들 : 울고 떼쓰면 다 되는 줄 안다. 엄마들 : 자기애는 머리는 좋은데 열심히 안 해서 공부 못 하는 줄 안다. 대학생들 : 철 다든 줄 안다. 대학만 졸업하면 앞날이 확~ 필줄 안다. 남편 : 살림하는 여자들은 집에서 노는 줄 안다. 혹시 여러분들도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의 부류에 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데 여기에 이러한 착각도 하나 넣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항상 행복해야 한다는 착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불행할지라도 자신만큼은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항상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4개의 행복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동시에 4개의 불행선언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 축복과 재앙, 복과 저주라는 두 상황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기로에 자주 놓이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문제는 이 기로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행복하고, 또 어떤 사람이 불행한지를 말씀하시지요.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면서 살아갈 때 우리 모두 행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의 길은 바로 나눔의 길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굶주리고, 울음을 흘릴지라도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에 반해 불행의 길은 욕심과 이기심의 길입니다. 그래서 배부르고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요? 나눔과 사랑의 길을 선택해서 행복의 길로 들어갑시다.
현재의 행복
그 어떤 것이든!
새벽을 열며 제 컴퓨터에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각종 문서도 많지만, 음악이나 사진 그리고 영화 자료도 상당히 많이 있지요. 그러다보니 제 컴퓨터의 용량은 보통 사람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보니, 지금 가지고 있는 용량도 부족함을 느끼게 되더군요. 그래서 지난 주말에 자료를 저장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를 구입했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 -박상대신부-
한적한 산에서 밤을 새워 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다음날 12제자를 따로 불러 사도로 세우셨다. 예수의 일행이 산을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가르침을 목말라하고, 병고에 허덕이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를 고쳐주셨다.(루가 6,12-19) 이제 예수님의 설교가 시작된다. 청중은 12제자, 다른 제자들, 그리고 모여든 백성들이다.
오늘 복음은 루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6,20-49)의 시작이다. 루가복음의 평지설교는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5-7장)에 비해 그 분량이 매우 적다. 루가의 평지설교는 행복선언(20-23절), 불행선언(24,26),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금지(37-42절),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에 관한 내용이다.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9개의 행복선언"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4개의 행복선언과 4개의 불행선언을 들려준다. 원전(原典)이 되는 예수어록에는 4개의 행복선언이 전해지는데, 마태오는 5개를 추가하여 9개로 편집하였고, 루가는 4개를 충실히 옮겨 쓰면서 4개의 불행선언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행복(불행)선언의 짜임새를 보면, 우선 대상(對象)이 언급되고, 다음에 행복(불행)선언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그 이유가 될만한 보상(補償)이 언급되는 구조를 이룬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이 구조를 따라 선언문을 살펴보자. 마태오복음의 9개 행복선언: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 - 하늘나라, ② 슬퍼하는 사람 - 위로, ③ 온유한 사람 - 땅, ④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만족, ⑤ 자비를 베푸는 사람 - 자비,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하느님 대면, ⑦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 하느님의 아들, ⑧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 하늘나라, ⑨ 예수님 때문에 모욕, 박해, 비난을 받는 사람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행복선언: ① 가난한 사람 - 하늘나라, ② 굶주린 사람 - 배부름, ③ 우는 사람 - 웃음, ④ 예수님 때문에 미움, 추방, 모욕, 누명 받는 사람 - 하늘의 큰 상. 루가복음의 4개 불행선언: ① 부유한 사람 - 위로 끝, ② 배부른 사람 - 굶주림, ③ 웃는 사람 - 슬픔과 울음, ④ 칭찬 받는 사람 - 거짓 예언자와 동급.
예수께서는 지금 가난함, 굶주림, 울음, 미움과 추방, 모욕과 누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선포하셨고,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셨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이런 상태 자체를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좋을 "부정적인 것", 즉 악(惡)의 범주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그 자체를 불행한 것으로 선포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되려 "긍정적인 것", 즉 선(善)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왜 부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로, 긍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불행한 자로 선포되는 것일까? 그것은 각각의 상태가 가지는 수용능력 때문이다. 가난함과 부유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잘 수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세에서 물질의 부유함과 넉넉함을 누리는 사람에게 청빈을 요구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회개의 경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브라질 까마라 대주교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들!(루가 6, 20-26) -유 광수신부-
오늘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인가를 말씀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늘 우리에게 빛이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면 행복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는 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계시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이 밝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는 복음을 알아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반드시 모든 인간이 알아야 할 진리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고, 그 진리의 길을 살아갈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르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앙인들은 이런 새로운 진리를 알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행복한 곳으로 가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고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참된 인생의 길을 안내 해주고 보여주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을 증거하는 증거자들인 것이다.
하느님이 밝혀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전혀 낮선 삶이며 새로운 길을 걷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반인들의 가치관과 행복관은 인간적인 사고, 인간적인 지식과 이 세상에 국한된 사고 안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 행복관은 하느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깨닫게 된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가치관이요, 행복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五福)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관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한다. 요즈음은 도덕을 지키는 유호덕이나 제 명대로 사는 것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사는 삶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아무튼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인생관도 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시한 행복한 이와 불행한 이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큰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한 이들 즉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부유한 이들,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불행하다고 말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또 우리가 기도를 하더라도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위해서, 재물을 풍부히 갖을 수 있도록, 출세를 위해서, 편한 마음으로 오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님이 제시한 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 간단하게나마 예수님은 왜 가난 이들,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 모욕을 받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는가?.
"행복하여라"는 말이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냥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한 이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이 행복한 이들인지를 지적해서 말씀하셨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려면 무엇보다도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란 나약한 사람, 청하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 의탁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것을 청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한다. 부자는 이런 것을 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부르기 때문에 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굶주리는 이들이란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것에 굶주린 사람을 말한다. 우는 이들이란 영적인 것을 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자기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뉘우치고 우는 이를 말한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쫓아냄과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란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편 불행한 사람이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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