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370) 일체분별
본래면목을 가로막는 원흉
모든 생명체들은 제각각 자기의 감각기관이 보여주는대로 보고 실감하고 느끼며 산다. /셔터스톡
평소에 우리는 허공 배경보다 눈에 보이는 형상 모습에, 고요한 침묵 배경보다 귀에 들리는 소리 모양에 더 주의를 기울입니다. 또 느낌 없는 상태보다 촉감 느낌이 일어난 상태에 더 주의를 기울입니다.
살아보면 아무 감정 없는 상태보다 감정이 일어난 상태에, 아무 생각 없는 상태보다 특정한 생각이 일어난 상태에 더 주의가 자동적으로 끌려갑니다. 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보다는 누군가 있든지 무엇이 있는 것에 더 주의가 끌리게 됩니다.
이처럼 눈앞에 세상이 경계없이 확 펼쳐져있는 의식의 한마당에서 이것보다 저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일 때 그것을 [분별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때 반드시 마음은 지적 활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우리는 일어난 분별현상에 자기가 아는 이름과 그 내용의 좋고 나쁨에 대해 거의 자동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마음의 의식활동은 후천적이긴 하지만 이 몸을 갖고 살아가기위해 생겨난 자연스런 습관입니다. 하지만 그럼으로인해서 우리는 모든 존재와 의식 활동 상태의 배경과 근원이 되고있는 처음부터 스스로 있었던 것에 대해 주의를 더 이상 충분히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처음부터 스스로 있었던 것]이란 지금 여기 우리 각자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의식의 장(場)을 말합니다.
우리 각자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의식의 장을 우리는 ‘이 세상’ 흑은 ‘현실세계’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본다면 이 세상은 스스로 있는게 아니라 반드시 내 의식에 의존하여 나타나있는 비추어지고 있는 환영인 영화 장면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상태가 몽롱하거나 혹은 맹인에게는 세상은 지금처럼 생생하게 보이지는 않거나 아예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실세계란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붙여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여 보는 세계일 뿐 실제로 흑백만 보이는 하등동물이나 겹눈을 가진 곤충류 등 다른 생명체들이 보는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그중에 어느 것 하나만이 진짜 실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제각각 자기의 감각기관이 보여주는대로 보고 실감하며 느끼는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한번에 이어진 한 덩어리로 확 보이는 눈앞의 풍광을 제각각 따로 분리되어 있는듯 착각분별해 분리하고 생각한다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과 내몸은 항상 같이 나타나고 밤에 눈감으면 같이 사라지지만 우리는 세상과 내 몸을 분리하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다가 죽으면 혼자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이 만들어 낸 분별의 허상 세계 속에서 사는 한 우리는 눈 앞의 진실된 세계를 보지 못한 채 자기 분별심이 만든 환영 세계 속에서 갇혀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상 속에서 볼 때 마치 수채화가 한 장의 종이나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음에도 그걸 무시한 채 그 한장의 종이 안에서 다양한 경치와 산과 나무, 집과 호수 등을 각각 따로 있는 양 나누고 분별하며 원근감까지 만들어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생명 의식이란 캔버스가 있어야 그다음에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며 감정도 갖고 이러저러한 감정의 활동들을 체험해 볼 수 있음에도 우리는 생명 의식이란 기본 바탕 종이는 없는 듯 망각한 채 그 위에 그려지거나 나타난 모습들만이 각각 따로 분리되어 있는양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래면목에 깨어나려면 일체 분별을 그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별을 하지말란 것보다는 해도 그 속에 빠지거나 갇히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체의 자기 의식 활동 속에 지금 분별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각 정견하란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이 만드는 분별을 철저하게 자각 정견할수록 더 명료하게 깨어날 수 있습니다. 정견한다는 건 이것과 저것 사이에 어느 한 편에 의식을 집중시키다보니 치우쳐서 어느 한쪽만 있다고 믿으면서 다른 한쪽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쪽저쪽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하여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이렇게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상에 대해 분별을 일으켜 이것과 저것 등으로 나누기 이전의 일체가 다 하나인 본래 마음 자리가 반드시 활짝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수채화를 보다가 문득 ‘아하!’하면서 이 모든 것은 다 그림이며 그 바탕에는 본래 하나인 종이나 캔버스가 있다는 진실을 발견하듯이 말입니다.
일체가 나뉘기 이전인 생명 의식 자리 하나만이 살아있어서 삼라만상 일체가 각각 분리되어 보이지 않고 하나의 연결된 평면 사진처럼 걸림이나 막힘없이 보일 때 그 바탕의 생명 의식 자리를 보는 것을 [깨어남의 체험]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나보면 세상은 다 내가 생각으로 이렇고 저렇다고 분별한 환영 세계임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 나타나는 온갖 형상들을 각각 따로 있다고 분별하고 믿지만 실제로 꿈에서 깨어나고보면 그것들은 전부 다 내 마음이 그렇게 투사한 의식활동 단 한 가지에 불과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각몽을 꿀 때에는 아무리 무섭거나 힘든 꿈이라 할지라도 그 위세가 사라져버리고 마치 유희처럼 놀면서 그 꿈을 즐기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자각몽을 꾸면서 우리가 그 꿈에 나오는 모든 형상 이미지들을 다 스스로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음까지 자각한다면 그때에는 꿈에 등장하는 형상 이미지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가질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현실에 적용할 때 우리는 생명의 실상을 보고 현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