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 2023년 3월 04일 “3분의 기적”
(하루 3분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삶에 기적을 체험하세요!)
✔올해 사순절 기간은 2월 22일 ~ 4월 6일입니다. 사순절 기간 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005년 3월 20일
설교제목: 날마다 십자가를 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십자가의 도리를 얼마만큼 알고 계시나요?
십자가에 대해 얼마나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젖고, 그 은혜 속에서 살고 계시나요? 여러분 자신에게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35년이상 신학을 공부하고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살았지만 지금 냉정하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실수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신학적으로 풀어 해석할 수는 있지만
좁은 지성과 얄팍한 깨달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산악인 박정현씨 이야기가 요즘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는 후배와 함께 히말라야 촐라체봉이라는 험한 산을 등정하여 성공했습니다.
자일 하나로 서로의 몸을 묶고 하산할 때의 일입니다. 박정현씨는 앞서고 후배가 뒤에 따라왔는데, 그 후배가 그만 발을 잘못 디뎌 크레바스에 빠졌습니다.
크레바스는 큰 얼음 빙벽 사이에 난 죽음의 골짜기로 거기에 빠지면 살아올 수 없는 곳입니다.
선택은 2가지뿐입니다. 산을 오르느라 힘이 다 빠졌지만 자일에 연결된 건강한 장정을 사투를 벌려 끌어올리는 것과 혼자 살겠다고 끊어 버리고 내려오는 길 두 가지 입니다.
어떤 유명한 세계적인 산악인도 똑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크레바스에 빠진 사람이 그의 친동생이었지만 그는 자일을 자르고 혼자 살아
돌아왔습니다.
둘이 다 죽는 것 보다는 한명이라도 사는 것이 더 좋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현씨는 몇 시간의 사투를 벌여 후배를 살렸습니다. 구출한후 보니 박정현씨의 손가락 8개가 잘려나갔습니다.
30대 후반의 남자에게 손가락이 잘려나갔기에 산악인으로써의 삶은 끝이 났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우리 자식이라면 그 사람의 행동을 잘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 8개 손가락을 자르며 희생한 것도 이해가 안갑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실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십자가에 설 때마다 겸손해야 합니다.
만왕의 왕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은 분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머리로 조금 안다고ᆢ 신앙생활 오래했다고ᆢ 성경 좀 읽었다고ᆢ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고 했습니다.
이 믿음은 눈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보듯이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 중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유대교는 다윗의 별을, 이슬람교는 초승달, 불교는 연꽃으로 상징합니다. 다 기분 좋은 상징물인데 기독교는 생각만 해도 끔직한 사형도구를 벽에 걸고 달고 목에 메고 다닙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잊지 않고 늘 마음에 모시고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가까이 두고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복음과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미국 교회는 고난 주간을 폐지하고 부활주일만 화려하고 요란하게 지킨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박한 신앙생활입니다.
십자가와 멀어질수록 영원한 것보다 세상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나 중심의 신앙생활, 타락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를 내 마음의 중심에 놓고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가까이 가서 보고 놀라운 은혜를 유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으로 날마다 가까이 나가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참 많습니다.
십자가에서 솟아나는 은혜의 샘을 날마다 마셔야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어떤 은혜를 받을까요?
세상을 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세상살기는 정말 힘들고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하루하루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 같아도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더욱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잘살고 안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가질만큼 가지고, 즐길 만큼 즐기고, 기뻐할 만큼 기뻐했으나 그래도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 허무는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여행으로도 해결이 안됩니다. 한 두 번 갈 때나 신기하지 여러 번 가면 볼 것도, 신기한 것도 없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만족이 없고 입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습니다.
세상살기가 힘들고 고달픈 것은 누구에게나 꼭 같습니다.
서민층들도 힘듭니다. 최근에는 부인들이 한 시간에 3,800원 받아가며 하루 종일 일한다고 합니다.
그것이라도 벌어서 남의 자녀보다 뒤지지 않게 키우려고 일한다고 합니다.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하고,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붙들어주고 기댈만한 곳도 없어 결국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사는 힘, 벌떡 일어나는 힘,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 절대로 기죽지 않게 하는 힘,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주는 강한 손,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면서 감사하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놀라운 사랑을 다시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가 바보같고 쓸모없고 어리석고, 경쟁에서 뒤쳐지고 살맛이 안 난다고 말하지? 그러나 나는 너가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단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 매달려 죽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니?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해주는 데 이것 가지고 만족 못하겠니?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나는 너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졌단다. 다 지나가는 거야. 내가 너에게 안겨줄 하늘의 영광은 세상의 어떤 고난과도 비교가 안되.. “
십자가 앞에서 이런 음성을 듣는다면 힘이 안 생길까요?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이구나. 나는 절대 시시하게 인생을 살수 없어..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도 나를 가볍게 취급하시지 않는구나. 나는 소중한 존재야.”
이렇게 자아의식이 회복될 때 힘이 생깁니다. 주님은 오늘은 고생해도
내일 아침에는 춤을 추게 만드실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사랑이 주는 힘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모두 사순절 기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을 사는 힘을 얻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