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그림]단순하기에 더 강하다 2017-06-05 (월)
자유로운 형태·강렬한 색채로
과감하게 표현한 인간의 욕망
즐거워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과감함과 단순함으로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이카루스’다. 강렬하고 파격적인 색채를 사용해 ‘짐승과 같다’는 평을 들으며 ‘야수파’라고 불렸던 마티스. 화려하고 장식적인 무늬가 특징이던 젊은 시절과 비교하면 후기작인 ‘이카루스’의 형태는 극도로 단순하다. 여전히 과감한 색채지만 형태가 간결해지니 느낌은 더더욱 강렬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심을 상징하는 이카루스를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미노아 문명의 왕 미노스는 상반신은 인간이고 나머지 반은 황소인 괴물을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만들게 했다. 그런데 괴물을 달래기 위해 미궁에 먹이로 던져 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괴물을 죽이고 탈출하자 화가 난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미로에 가두어 버렸다.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늘 뿐.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붙여 날개를 만들고 이카루스에게 입혔다. 탈출한 이들을 잡기 위해 미노스 왕의 함대가 출동했고, 이렇게 필사적인 추격전이 벌어졌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루스에게 날개를 붙여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너무 높게 날면 태양빛에 밀랍이 녹아내려 추락하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와 습한 공기를 머금어 날지 못한다. 그러니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아라”
하지만 이카루스는 점점 더 높게 날아갔고, 아버지 말대로 태양빛에 날개가 녹아 끝내 추락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미로에서의 탈출은 날개가 없는 인간이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하는 사면초가 상황이다. 날개를 만들어 탈출을 시도했지만 너무 높게 날아도 낮게 날아도 안 되니 모순으로 가득하다. 지금 이 순간 정상에서 추락하고 있는 어느 인간이 바로 저런 모습일까?
마티스는 이런 스토리를 담은 이카루스의 한없는 추락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카루스의 가슴에는 정신없이 뛰고 있는 빨간 심장이 있다. 주변에는 밀랍으로 붙인 날개 깃털이 노란색 섬광처럼 퍼덕이며 푸른 하늘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다. 이 극적인 장면을 이렇게 단순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다니…. 마티스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미지의 세계, 욕망에 대한 인간의 동경을 상징하는 이카루스. 하지만 너무 높이 날다가 추락하는 이카루스 그림을 보면서도 여전히 많은 이카루스들이 태양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니 인간의 태생적 모순인가 보다.
이제 이카루스를 그린, 정확하게 말하면 종이를 오리고 붙인 마티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노년에 만든 이 작품이 이렇게 단순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마티스는 70세가 넘은 나이에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고 서 있기도 힘들어졌다. 이때 우연히 새 모양을 오려봤는데 힘들지 않을 뿐 아니라 재미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모양, 다른 색깔로 계속 오려 캔버스에 배치해 보았고, 그렇게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었다. 형태가 단순하니 ‘이런 작품은 나도 만들겠다’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함축된 형태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반복된 작업이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인생의 끝자락에 있던 노대가의 순수함과 엄청난 에너지로 꽉 차 있다.
자유로운 형태, 보색 관계를 살린 강렬한 색채, 넓은 색면 등 마티스 작품의 특징은 ‘이카루스’에서도 두드러진다. 피카소는 “마티스는 뱃속에 태양을 품고 있다”며 “화가 중 가장 색을 잘 쓰는 화가”라고 칭찬했다. 또 마티스 작업실의 조수들은 “마티스가 오린 조각은 아주 간단했지만 마티스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오려 붙이기 방식으로 만든 작품은 마티스의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완성됐다. 하지만 마티스는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 속에서 평화와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작품을 안락의자처럼 편안히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우리는 이카루스처럼 무리수를 두고 승승장구할 때의 쾌감도, 무리수를 두다 결국 내 발등을 찍고 마는 절망감도 안다. 이카루스는 감히 태양까지 날아올랐다가 떨어져 신화가 되었지만 사람은 그렇게 신화가 될 리가 없다. 그러니 최악의 순간이 최후가 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 더 떨어질 곳이 없으면 올라갈 길 밖에 없는 것이 그나마 위안일 것이다. 너무 높게 날아서도 낮게 날아서도 안 되는 태생적 한계 속에서 높게, 더 높게 날아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 그것이 갈망, 야망, 욕망, 희망, 소망, 그 어떤 형태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티스가 그린 단순 과감한 이카루스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지현 문화칼럼니스트
출처 / 한국교직원신문 2017-06-05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