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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00년 잠깬
‘고려의 빛’ 군산앞바다서 발굴
발굴된 고려청자 중 연꽃을 파서 새긴 청자 대접.
서해안 바다 속에서 잠자던 신비의 고려
청자 비색(翡色)이 800년 만에 햇빛을 봤
다. 전북 군산시 비안도 근해에서 12세기
후반기의 고려청자가 다량 발굴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2002년 4월 24일 국립문화
재연구소에서 인양한 고려청자 일부를
공개했다.군산 비안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청자 450여점은 고려청자 전성기인
12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그동안 15
차례 있었던 ‘고려청자’ 해저 발굴 사상 가
장 양질의 것으로 밝혀졌다.
한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발견했다고
신고해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문화재
청이 발굴 인양한 고려청자는 454점에
달했으며, 앞으로 정식 발굴조사를 거칠
경우 더 많은 양의 청자가 인양될 예정이다.
발굴된 청자는 대접과 접시, 통 모양 잔 등
다양했으며, 연꽃과 모란을 주로 새겼다.
형태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150점
정도였다.
▶2014년 헌법재판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온 라인 게임을 강제 중지하는 법(섯다운제)에
대해 7대 2로 합헌 판결.
▶2013년 방글라데시 다카 외곽에서
건물 붕괴 사고 발생(최소 250명 사망).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목장에서
광우병 에걸린 소확인.
▶2011년최초로 에베레스트 두 번 오른 셰르파 곰부 별세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등반대의 최연소 셰르파이자,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두 번 등정한 유명 셰르파인 나왕 곰부(79)가 24일 인도에서 별세했다.
곰부는 21살이던 1953년 고(故)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함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숙부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를 따라 힐러리 경의 등반대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정상에 서지 못했으나 10년 후 짐 휘태커가 이끈 첫 미국 등반대를 인도해 최고봉에 올랐고, 다시 2년 뒤 인도 등반대의 안내를 맡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두 번 오른 사람이 됐다.
이후에도 히말라야 일대에서 수십 개의 새 등정로를 개척하는 등 셰르파 집단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1년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지방 도에서 산악회 회원을 태운 관광버스
추락5명 사망, 31명 부상 .
▶ 2010년 천안함의 함수가 침몰 29일
만에 인양 되어 박성균 하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6명은 산 화처리됨.
▶ 2009년 멕시코와 미국 일부 지역에서
신종 바 이러스인 돼지독감이 번지면서
수십명의 사망자 가 발생하였다.
▶2009년 베트남서 세계 최대 천연 동굴
'손동 동굴' 발견.
▶2009년자유형 100m, 47초 벽 깬 베르나르
남자 자유형 100m 세계신기록(46초94)을
세운 알랭 베르나르.
▶2009년 이라크 바그다드의 시아파 사원
인근 에서 여성 2명에 의한 자살폭탄공격
발생(60명 사망,159명부상).
▶2008년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단 '시카
고컵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이어
메이저 리그 사상 2번째로 10000승 달성.
▶2007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차남을 때린 술 집종업원보복 폭행으로파문.
▶2007년 코스피200 지수, 200포인트 돌파.
▶2007년 장동익 대한의사협회 회장,
정치권 로 비 논란으로 사퇴의사표명.
▶2006년 한국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 주교 주교회의에서 대교구로 승격.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미사를 갖고 취임.
▶2004년프랑스 갱스터 영화 감독
호세 지오바니 사망
▶2004년 북한, 용천역 폭발 사고 관련
국제 사 회 지원 공식 요청.
▶2003년베이징, 초·중·고교 사스(SARS)로 임시 휴교
▶2001 년 정몽헌 현 대아산 회장 방북.
▶2000년 핵확산금지조약 회의 뉴욕서 개막.
▶2000년중국최고위 조선족 조남기 정협부주석 62년 만에 조국방문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조남기(74) 정협부주석이 한국 정부 초청으로 2000년 4월 24일부터 5월 3일까지 열흘간 한국을 방문했다. 조 부주석은 방한 기간 중 김대중 대통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났고, 12살 때 떠난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고향땅을 62년 만에 다시 밟았다.
조 부주석은 12살 때인 1938년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를 따라 중국 길림성 영길현으로 이주, 중학을 졸업한 뒤 중국 팔로군에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6·25 당시 후근부 사령관인 홍쉐즈의 통역장교로 근무하며 중국 인민지원군의 군수품 수송에 큰 역할을 한 공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 인민정부 주석과 지린성 성장 등을 지낸 그는 1987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사령관에 임명됐고, 이듬해 중국군 최고 계급인 상장으로 진급했다. 예편 후인 1998년 3월 제9기 전인대에서 정협 부주석에 뽑혔다.
▶1997년노사개혁위원회 설치
▶1996년북한 외교담당 고위대표단,
4자회담 논의 위해 미국 방문
▶1993년박준규 국회의장, 재산공개파동과 관련 의장직사퇴서를 국회에 제출
▶1991년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막,
남북단일팀 출전
탁구 `남북단일팀 코리아`의 현정화(오른쪽)와
북한의 이분희가 복식조를 이뤄 분전하고 있다.
1991년 4월 24일 일본 지바에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개막됐다. 남북한은 남북분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단일팀인 `코리아`팀으로 출전했다.
4월 29일에 치러진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코리아팀은 중국을 3대 2로 꺾고 세계를 제패했다. 2대 2 동점으로 중국과 숨막히는 접전을 벌인 코리아 여자팀은 마지막 단식에서 북한의 유순복이 중국의 가오준에 역전승을 거둠으로써 조국에 감격적인 승전보를 안겨주었다.
우승의 주역인 홍차옥, 유순복, 현정화, 이분희를 비롯해 우리 동포들은 경기장에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단일기가 오르고 단일팀가인 아리랑이 울려퍼지는 순간 남북의 7천만 동포는 그야말로 하나라는 것을 실감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 남북의 선수들은 "내몸 하나보다 코리아팀이 더 중요하다!"는 각오하에 코리아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연습과 경기에 임했고, 그 결과로 단체전 우승을 일구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89년언론인, 작가 송지영 사망
▶1983년오스트리아 총선서 사회당이 과반수 획득
▶1982년영국, 대 아르헨티나전서 남조지아 탈환
▶1981년미국정부,
소련으로 곡물수출 금지조치 해제 발표
▶1980년재경 종합대학교 교수 361명,
교수 재임명 철폐-학원민주화 촉구 등
학원사태에 관한 성명서 발표
▶1979년한국-세네갈, 경제기술 협력 및 문화협정 체결
▶1979년로디지아 총선 흑인정부 수립
▶1978년소련에 강제착륙했던 KAL기 승객 귀국
▶1976년팔당수원지 건설공사 착공
▶1975년에티오피아 토지 국유화
▶1970년중국최초의 인공위성 `중국1호` 궤도진입 성공
▶1968년청원경찰 정식 발족
▶1967년소련 우주선 소유즈 1호 귀환 중 추락,
낙하산 고장으로 코마로프 대령 사망
▶1965년인도네시아 대통령
전국외국인기업체 국유화 선언
▶1964년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 발효
▶1961년영국-소련 공동으로 라오스 휴전
▶1960년이란에 대지진
▶1960년이승만대통령 자유당 총재직 사퇴
▶1957년한국-영국간의 공사를 대사로 승격
▶1957년한미항공협정 조인
▶1956년중국군, 대만의 금문도 포격
▶1955년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 폐막
1955년 4월 18일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 6개국이 모여 '제1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열고 7일간 논의한 반둥회의 결과, 24일 `세계 평화와 국제협력 증진에 관한 선언`이 채택됐다. 회의는 선언을 발표하고 폐막됐다. 이른바 `반둥 10원칙`이라 불리는 이 선언은 비동맹과 중립주의, 상호협력 등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제3세계`라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회의 참가국이 속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대륙 이름을 따 'AA히의'라고도 하고 개최지의 이름을 따서 보통 반둥회의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잇달아 독립한 구 식민지 국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이 회의를 마련한 것은 콜롬보 그룹이라고 불리던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버마(미얀마)의 5개국이었다. 남-북한, 대만, 남아공, 이스라엘 등 어느 한 진영에 현저하게 치우쳤거나 인종차별적인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들이 초청됐다. 29개국의 국기가 휘날리는 회의장에 자리를 함께 한 320명의 사절단은 14억명을 대표했으며 이는 당시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둥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주도되던 국제무대에 많은 새로운 스타들을 탄생시켰다. 개최국의 이점을 십분 활용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중국의 강경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데 탁월한 수완을 보인 주은래 등은 이 회의를 통해 국제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반둥의 회의장에서 드러난 각국의 상이한 이해관계는 곧 이어 발생한 중국-인도 국경분쟁, 중소분쟁 등으로 심화됐고 결국 알제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그러나 반둥회의를 계기로 등장한 `비동맹` 그룹은 점차 세를 더해갔고 이들은 1960, 70년대를 지나면서 국제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다.
▶1953년백두진 제4대 국무총리 취임
▶1952년이윤영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52년서민호 의원, 말다툼 하다 서창선 대위 사살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안했으나 국회가 이를 부결하고 오히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해 이 대통령과 국회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던 때였다.
1952년 4월24일, 서민호(徐珉濠) 민의원이 이튿날 치러질 제1회 지방의회의원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을 찾았다. 오후 8시40분쯤, 서 의원 일행이 한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중 광주에서 출장온 서창선 대위와 사소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격해지자 서 의원은 권총을 발사했고 서 대위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국회가 정당방위를 내세워 살인혐의로 구속된 서 의원을 석방시키긴 했지만 이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던 국회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서 의원이 평소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 이 대통령이 기피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선거도 여당인 자유당이 압승을 거둔 터였다.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정체 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 듯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야당 의원들에게 공공연히 테러를 가했다. 곧 닥쳐올 ‘부산정치파동’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5월 25일 0시를 기해 선포된 계엄령으로 다시 수감된 서 의원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계엄령 해제 후 8년 형이 확정돼 1960년 4·19 때까지 7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1950년대한정치공작단사건(야당의 간첩접선 적발)
▶1950년문교부, 문맹퇴치운동 5개년 계획 발표
▶1949년중국군 남경 입성
▶1945년독일, 연합군에 항복 제의
▶1942년‘빨간머리 앤’ 작가 몽고메리 사망
빨간머리앤 (Anne of Green Gables) - 1908년
빨간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 언제나 조금은 엉뚱하고 진지한 상상으로 우리를 즐겁게 했던 ‘빨간머리 앤’ 의 앤 셜리. 그녀를 탄생시킨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4월 24일 숨을 거뒀다.
자신을 모델로 한 ‘빨간머리 앤’ 을
집필했던 여류 소설가 몽고메리
앤 셜리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긴 머리. 부모님을 일찍 여읜 것도, 2층 다락방 창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것도, 또 마음의 친구와 변함없는 우정을 맹세하던 것도 모두 작가 자신을 앤 셜리에 투영한 것이었다.
1874년 11월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작은 집에서 태어난 그녀는 2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길러졌다. ‘글을 쓰고 싶어 좀이 쑤시는’ 기질을 타고난 몽고메리는 10살 때 ‘가을’ 이라는 시를 짓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교단에 올라 선생님이 됐지만, 그녀가 24살 되던 1896년 우체국장이던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외할머니를 도와 우체국 일을 도왔다.
그리고 그녀가 30세가 되던 1904년, ‘빨간머리 앤’ 을 쓰기 시작했다. 봄에 시작한 집필은 그 해 10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출판사로부터 모두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어야했고, 그로부터 3년 후 다락방에서 우연히 원고를 발견한 몽고메리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미국 보스턴의 한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 1908년 첫 작품 ‘빨간머리 앤’ 이 발간됐다. 이후 ‘빨간머리 앤’ 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에도 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속편들이 계속 출간, 일본에서는 만화영화로도 제작돼 각국에 수출됐다.
사후 몽고메리는 ‘빨간머리 앤’ 의 이야기 배경지이자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묻혔고, 1년 후 목사였던 남편 맥도널드도 그녀를 따라 함께 이곳에 묻혔다.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뭔가 말로 단정지을 수 없는 캐릭터!
작품요약
매튜와 마릴라 커스버트는 농장 일을 도울 수 있는 고아 소년을 입양하기로 한다. 소년을 마중나간 매튜는 역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는 빨간 머리 소녀 앤 셜리를 만나고 안쓰러운 마음에 집으로 함께 온다. 마릴라는 부탁을 받은 스펜서 부인의 실수로 소녀를 입양하게 된 것을 알게 되고, 어린나이에 부모를 병으로 잃고 이집 저집으로 떠돌며 힘든 생활을 해온 앤의 이야기를 들은 커스버트 남매는 연민을 느끼며 수다스럽고 깡마른 앤을 거두기로 한다.
앤은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초록지붕의 생활에 잘 적응한다. 빨간 머리에 콤플렉스가 있던 앤은 이웃에 사는 검은머리 소녀 다이애나 배리를 만나 친구가 되고, 빨간 머리를 지적한 린다 아주머니께 무례하게 대들다가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혼나기도 한다. 앤은 주일학교에 가면서 모자에 꽃을 꽂고 가서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마릴라 아주머니가 가장 아끼는 브로치를 건드렸다가 그토록 기대하던 소풍을 못갈 뻔 하기도 하는 등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내며 매튜와 마릴라 남매의 삶에 활기를 불러온다.
그러던 중 생전 처음으로 학교에 간 앤은 홍당무라고 놀리는 길버트 블라이스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리친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뒤 놀다가 늦게 교실로 온 앤은 벌로 길버트의 짝꿍이 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학교에 가지 않는다. 어느 날 집에 놀러온 다이애나에게 딸기 주스(라즈베리 주스)를 준다는 게 실수로 와인을 준 앤은 화가 난 다이애나의 엄마 때문에 다이애나와 더 이상 놀지 못하게 된다. 앤은 유일한 친구 다이애나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결국 학교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길버트를 경쟁자삼아 열심히 공부한다.
엉뚱한 앤은 친구들과 연극을 하다 조각배를 타게 되고 배에 물이차서 침몰하자 가까스로 다리에 매달렸다가 강을 내려오던 길버트에게 구조된다. 길버트는 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앤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앤과 길버트는 서로를 의식하며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앤은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커스버트 남매는 똑똑한 그녀를 자랑스러워한다. 앤은 크리스마스에 매튜 아저씨로부터 그토록 원하던 퍼프소매원피스를 선물받기도하고 다이애나의 먼 친척 할머니 배리 여사에게서 예쁜 슬리퍼도 선물 받는다.
길버트와 함께 일등으로 교사 자격시험에 통과한 앤을 매튜와 마릴라는 자랑스러워하고, 어린 앤이 숙녀로 자란 것을 새삼 느끼며 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한다. 학교를 졸업한 앤은 성적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로 하는데, 매튜 아저씨가 돈을 맡긴 은행의 파산 소식에 충격을 받고 돌아가시게 된다. 홀로 남은 마릴라 역시 노환으로 일을 하기가 힘들어지게 되고, 마릴라는 결국 초록색 지붕 집을 팔기로 결정한다. 이에 앤은 학업을 잠시 미루고 마릴라 옆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기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길버트는 자신이 부임하기로 한 에이번리 학교를 앤을 위해서 포기한다. 이를 알게 된 앤은 길버트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우연히 길에서 만난 길버트에게 감사를 표하며 둘은 화해하게 된다.
작품 속의 명문장
“음, 그것도 언젠가 알아볼 일중에 하나이겠군요.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 아녜요?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게 느껴지거든요. 정말 재미있는 세상인거죠. 만일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안다면 재미가 반도 안 될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면 상상할 거리가 하나도 없겠어요.”
자신을 데리러온 매튜를 만나 초록색 지붕 집으로 오면서 흥분한 앤은 마구 수다를 떤다. 자신이 잘못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앤은 들뜬 마음으로 매튜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왜 길이 붉은지 물어보다가 잘 모르겠다는 매튜의 말에 앤은 상상할거리가 생겨서 좋다고 말하는데, 이런 앤의 밝고 엉뚱한 성격은 독자들로 하여금 앤의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니. 앤. 네가 없었더라면 난 어땠을지 모르겠구나. 네가 오지 않았다면. 오, 앤, 내가 널 엄하고 딱딱하게 대했다는 것을 안단다. 그래도 내가 매튜 오라버니만큼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말이 나왔으니 얘길 해야겠구나. 난 늘 속에 있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어. 하지만 지금은 말하기가 쉽구나.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있고 네가 초록색 지붕 집에 온 이후로 넌 나의 기쁨이자 위안이었단다.”
은행 파산 소식에 충격을 받은 매튜 아저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울고 있는 앤에게 마릴라는 이렇게 말한다. 매튜와 마릴라가 얼마나 앤에게 의지했는지를 직접적으로 앤에게 말해주는 대목으로 앤은 마릴라의 진심을 알게 되고, 재정적 부담으로 집을 팔기로 한 마릴라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에이번리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며 마릴라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1921년이상재-윤익선 등 고학생구제회 창립
▶1916년아일랜드 시민군, 부활절 봉기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다음날에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지도자 페트릭 헨리 피어스가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반영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후에 성립된 아일랜드공화국 실현의 기점이 되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피어스는 아일랜드 시민군을 지휘했다. 이 봉기에는 더블린 노동자들과 얼스터 의용군에 대항해 창설된 아일랜드 의용군,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신페인 당원 등이 참여했다.
봉기계획을 미리 안 영국이 무기 밀수 혐의로 로저 케이스먼트 경을 체포하자 아일랜드 의용군 지도자 맥닐은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나 2,000명 정도의 시민군은 더블린 중앙우체국을 점령하고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낭독했다.
결국 영국군에 밀린 시민군은 항복했고, 지도자 피어스와 동료 13명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뒤 총살당했다. 부활절 봉기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의 종말을 예고했다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을 위해 힘쓰다
영국군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진 아일랜드
민족주의 지도자 페트릭 헨리 피어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1 만세운동을
불렀던 것 처럼, 아일랜드도 영국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력을 통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려고 봉기를
일으킴. 이 운동은 4월 30일 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1915년조선호텔서 전조선기자대회 개회 -
조선신문협회 조직키로 결정. 경성기자단 발기
▶1909년터키, 반혁명군 진압으로 모하메트 5세 즉위
▶1904년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데 쿠닝 출생
▶1902년경의철도 기공
▶ 1898년 스페인, 쿠바 봉쇄한 미국에 전쟁 선포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19세기 중엽부터 신에게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믿어온 미국 팽창주의자들의 영토확장 슬로건이자 명분이었다. 캐나다ㆍ멕시코ㆍ쿠바까지 합병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가운데 1895년, 16세기부터 줄곧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대(對) 스페인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스페인의 탄압이 거세지자 미국인들 사이에서 군사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업인들은 새로운 시장을 위해, 종교인들은 가톨릭의 쿠바를 개신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참전을 재촉했다.
1898년 2월15일, 쿠바 아바나항에 정박중인 미국 전함 메인호가 갑자기 폭발, 배에 타고 있던 군인 26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원인불명으로 판명됐지만 선동적인 신문들은 스페인의 음모라며 자국민의 감정을 부추겼다.
미국이 쿠바를 봉쇄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궁지에 몰린 스페인이 1898년 4월24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식민지를 둘러싼 미국ㆍ스페인 간의 제국주의 전쟁이 불을 뿜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3개월 만에 끝난 짧은 전쟁이었지만 미국이 얻은 열매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해 12월 파리조약은 쿠바를 독립시키고 필리핀ㆍ괌ㆍ푸에르토리코를 미국의 영토로 복속시킨다고 결정했다. 하와이는 7월에 태평양 진출 교두보로 미국에 병합된 상태였다.
▶ 1895년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처형
<고종실록 전봉준 처형 '윤지(允之) 기록'>
법무대신 서광범이 전봉준 외 4인의 재판을 끝내고 사형을 시키겠다는 보고에 대한 고종의 윤지기록.
(1895년 4월 23일) 이 기록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사형을 시켰다는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이 날을 사형당한 날로 알고 왔다. 그러나 <시사신보> 1895년 4월 23일 특파원발 기사에 의하면 실제 사형은 윤지를 내린 이튿날 새벽 2시에 처형되었다.
그러므로 전봉준 장군 외 4인의 처형일은 4월 24일(음 3월 30일)인 것이다.
전주한옥마을-백과사전
http://hanok.jeonju.go.kr/OverKids/OverkidsDictionaryDetail.aspx?photoNo=15903
전봉준 체포에서 처형까지
1894.12.28 (음력 12.02) - 전봉준 체포
1895.04.23 (음력 03.29) - 전봉준 외 4명 재판, 사형선고
1895.04.24 (음력 03.30) - 전봉준외 4명 처형(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
▶ 1877년 러시아-터키전쟁 발발
▶ 1856년 프랑스의 군인 겸 정치가 앙리 필리프 페탱 출생
▶ 1845년 스페인 문학가 시피텔러 출생
▶ 1771년 일본, 야에야마(八重山) 지진·쓰나미로 약 1만2000여명 사망
▶1756년 암행어사 박문수 별세
[박문수전] 본문
▶ 1743년 영국의 방직기 발명가 카트라이트 출생
https://youtu.be/vBDykYaQR8w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 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