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산 포항 내연산(711m) 12폭포 트레킹 #7
13:15 내연산 보경사 입구에 도착하여 약 30여분 보경사(內延山 寶鏡寺) 경내를 탐방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02년(진평왕 24)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지명은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海阿縣)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하였다.
723년(성덕왕 22)에는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시주를 얻어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
745년(경덕왕 4) 철민(哲敏)이 중창하였고, 1214년(고종 1) 주지 승형(承逈:圓眞國師)이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하고 종 · 경(磬) · 법고(法鼓) 등도 완비하였다.
1677년(숙종 3)에는 도인(道仁) 등이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695년 가을에 준공하였으며
삼존불상과 영산전(靈山殿)의 후불탱화도 조성하였다.
그때 초한(草閑)이 시주를 얻어 금당을 중건하였고 관음전은 도의(道儀)가, 명부전은 석일(釋一)이, 응향전(凝香殿)은 국헌(國軒)이
향적전(香積殿)과 국사전(國師殿)은 학열(學悅)이, 열반당은 신특(信特)이, 국사전 정문과 사천왕각 및 식당은 비구니 총지(摠持)와 신원(信遠)이
팔상전은 지총(志聰)이, 종각은 영원(靈遠)이 각기 분담하여 중건, 중수하였다.
또한 그와 동시에 도인은 청련암(靑蓮庵)을 창건하고 탁근(卓根)은 서운암(瑞雲庵)을 창건하였다.
1725년(영조 1) 성희(性熙)와 관신(寬信)이 명부전을 이건하고 단청하였으며
성희는 괘불을 중수하였는데, 이때의 사세가 가장 컸다고 전한다.
1916년부터 1922년까지는 장욱(壯旭)이 많은 사재를 내어 전당(殿堂)과 탑을 중수하였고
홍수로 파손된 제방을 쌓았으며 교량을 시설하고 전답을 사찰에 헌납하였다.
1917년 10월에는 태인(泰仁)이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대웅전과 상지전(上持殿)을 중수하였으며
1975년 이후 약간의 단청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 보현보살을 모신 대적광전,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자를 탄 문수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16나한 등을 배열한 영산전
석가모니의 팔상시현(八相示顯)을 나타낸 팔상전이 중심 당우로 자리잡고 있다.
이 밖에도 명부전 · 산신각 · 원진각(圓眞閣) · 일로향각(一爐香閣) · 동로각(東爐閣) · 누각 · 수월당(水月堂)
천왕문 · 일주문 · 원진국사비각 · 설산당비각(雪山堂碑閣) · 창고 등이 있다.
중요문화유산으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보경사 원진국사비와 1965년 보물로 지정된 보경사 승탑이 있으며
조선시대 숙종이 이곳의 12폭포를 유람하고 그 풍경의 아름다움에 시를 지어 남겼다는 어필의 각판이 있다.
그 밖에 198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오층석탑, 1974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다.
부도로는 동봉(東峯) · 청심당(淸心堂) · 심진당(心眞堂) 등 11기가 있다.
현존하는 산내암자로는 동쪽 50m 지점의 청련암과 서쪽 100여m 지점의 서운암
보경사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문수암(文殊庵)과 보현암(普賢庵)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상태사(常泰寺) · 성도암(成道庵) · 계조암(繼祖庵) · 내원암(內院庵) · 대비암(大悲庵) 등의 유지가 있다.
보경사 감로수
포항 보경사 천왕문(보물2254호)
「포항 보경사(寶鏡寺) 천왕문(天王門)」은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의민(毅旻) 스님이 지은 <천왕문중창상량문(天王門重創上梁文, 1761)>과
이종영(李宗榮)이 찬기(撰記)한 <보경사사천왕문중건기(寶鏡寺四天王門重建記, 1767)>에 의해
1679년(숙종 5) 중창한 후, 1761~1767년(영조 37~43)에 중건(重建)한 것으로 확인되며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사찰 천왕문의 조성과 시기적 변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좌·우의 협칸에는 1980년에 제작한 사천왕상을 봉안하였고, 정면 어칸의 평주 하부에는
보경사(寶鏡寺) 적광전(보물)과 유사한 형태의 사자상이 조각된 신방목(信枋木, 대문의 기둥을 보강하기 위하여
가로로 끼워댄 목부재)을 설치하였는데, 천왕문 중 국내 유일한 사례이다.
<천왕문 편액>
천왕문에는 天王門이라 쓴 편액 외에 절이름인 內延山과 寶鏡寺라는 편액이 양쪽에 걸려 있다.
원래 절이름인 내연산 보경사 같은 것은 일주문에 걸리는데, 여기는 천왕문에 걸려 있다.
일주문은 세운 지 불과 20년밖에 안 되는 문이며 1990년대까지 천왕문이 보경사의 정문이자 일주문 역할까지 하였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산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들은 수미산 중턱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동방의 지국천왕>
<서방의 광목천왕>
<남방의 증장천왕>
<북방의 다문천왕>
보경사 오층석탑
일명 금당탑으로도 불리며 고려시대의 5층 석탑으로 높이는 약 5m이다.
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 의하면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등이 고려 현종14년 건립하였다고 한다.
석탑 1층 석탑 뒤에는 부처님 진시사리를 보관한 창문과 문고리 그리고 자물쇠통의 장식이 선명하게 조각되어있는 것이 특이하다.
1층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神)을 올린 모습으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올렸고, 네 귀퉁이는 약간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보경사 적광전과 5층석탑
적광전(경북유형문화재 제254호) 앞마당에는 보경사 오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203호)이 자리하고 있다.
보경사 범종각
1층에는 범종, 2층에는 법고와 목어가 있다.
보경사 적광전(寂光殿)
보경사 적광전은 주존(主尊)인 비로자나불과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삼존불(三尊佛)을 모신 곳으로
조선 숙종 3년 (1677)에 중건한 것이며 그 후 몇 차례 중수가 더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가(樑架) 다포집으로 조선후기 사찰 건축의 양식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보경사 경내의 현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랜된 것이라고 한다.
보경사 적광전 삼존불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셨다.
소원소나무
보통의 반송과 달리 줄기가 구불구불 용트림 모양을 하고 있는데
수령이 300년이 넘는 보경사의 명물이기도 한 반송(盤松)이다.
보경사 감로수
보경사 대웅전(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61호)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
본존불(중앙), 제화갈라보살(우), 미륵보살(좌)
대웅전 옆 석탑
<보경사의 명물 중 하나인 수령이 약 400년이 되었다는 경상북도 기념물11호로 지정된 보경사 탱자나무>
이 탱자나무는 높이 6m, 밑부분 둘레 97cm로서 나무 모양은 원형이고 수새는 매우 왕성하다.
탱자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것이 희귀하므로 노거수로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보경사 탱자나무 외에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와
화도면 사기리의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 제78호 및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 고려 후기 1224, 보물 제252호 )
원진국사는 높은 선풍과 도덕이 후세에도 모범이 되신 보경사의 중창조이시다.
『능엄경』사상 중 돈오점수와 교선쌍홍의 깨달음으로 실천적 행동을 중시하였다.
고려 무신정권이었던 최충헌의 후원을 받아 무신집권기에 은둔하고 있던 재야지식인을 정계로 이끌었으며 거사불교를 전개하였다.
당시 고려 명종 23년(1930)에 일어난 김사미의 난의 잔여세력을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 의 주지를 지내면서 귀농과 사면의 경제적, 신앙적 방법으로 안주시켰다.
보경사 일대가 이의민의 기반세력 중 하나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고려 고종 8년(1221) 7월 팔공산 염불암으로 옮겨가서 마지막 법문을 하고 이내 주장자로 법상을 세번 치고 입적하였다.
원진국사비는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있으며 귀갑에는 육각형 무늬마다 ‘王’자를 새겼고 비좌에는 연잎문양이 사방으로 새겨져 있다.
비신의 윗부분은 양끝을 귀접이 한 규수형이다.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세존의 일대 생애를 시기적으로 여덟가지로 나누어 그것을 팔폭화면에 그린 팔상탱화를 모신 전각이다.
이 전각은 조선 숙종 3년(1678)에 지총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
팔상전에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주존으로 모시고
양쪽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을 모시고 양 벽에 각 네 폭씩 팔상탱화를 배열하였다.
산령각은 내연산 산신과 시방법계의 산신을 봉안한 전각이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런 산신을 모시는 산령각은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이 산령각은 내연산 산신과 시방법계의 산신을 봉안한 전각으로 원래 북쪽 100m 산중에 있던 것을 1914년에 현 장소로 이건하였다.
원진각은 보경사 창건주 지명법사의 영탱과 원진국사의 등상을 모시고
그 밖에 서산, 사명대사와 보경사에서 수도와 교화를 하시다가 입적하신 고승 대덕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이 전각은 조선 숙종 3년(1678) 큰 불사때 학열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
영산은 영축산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산불국을 상징한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법화경 」을 설법하던 곳으로 불교의 성지를 영산전을 통하여 나타낸 것이며
이곳에 참배함으로써 사바세계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영산전은 석가세존이 생존해 계실 때 인도 영취산이란 데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많이 하셨는데 줄여서 영산이라고도 한다.
영산전에는 가운데 석가세존, 좌,우에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모시고
그 좌우로 16아라한을 배열하였는데 일명 십육나한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음 생을 받기 전에 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선악간의 행위를 심판받아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하는 관부와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형상화하여 모신 곳이 먕부전이다.
중앙에 지장보살,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양 그리고 그 좌우로 십대왕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시왕을 대칭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고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그
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이기 때문에 '대원본존지장보살'이라 한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3년(1677)에 건립하였다.
수월당
보경사 공양간
스님들의 일용할 음식에 사용될 장을 담아놓은 장독대
보경사 성보박물관
비사리구시
부처님의 공양을 마련하는 절간 주방의 '구시'로 조선 후기 보경사에서 나라제사때 마다 많은 손님들의 밥을 퍼 넣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쌀 7가마(약4,000명분)의 밥을 담았던 통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조선시대 남부지방의 사찰들이 집중적으로 종이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는 공납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것을 종이 만들때 사용하던 지통(紙桶)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13.7km, 약 7시간 40분(휴식 40분, 보경사 탐방 30분 포함)이 소요된 내연산 12폭포 트레킹을 마치고
14:00 보경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오전 6시 도착할때와 달리 주차장은 산악회 관광버스 및 개인 승용차로 거의 만차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