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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루카 12,39-48
제때 양식을 주는 일이 왜 유일한 행복의 길인가?
오늘 복음은 심판 때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심판 때 당신이 함께 계신 것처럼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 집사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오겠거니 생각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종들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께서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그러니까 ‘행복’입니다.
일을 더 많이 맡기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 행복해지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행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행복은 ‘자존감’에 달려 있습니다.
외적으로 복권에 당첨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안 좋은 일이 발생하여 몸이 아프게 되어도, 몇 주, 몇 달 뒤에는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옵니다.
이것은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한 환경미화원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악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쓰레기통을
비우며 거리를 청소했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도 아니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미화원은 싱글벙글 밝은 모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어떻게 항상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일하실 수 있죠?”
그러자 환경미화원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직업이 행복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의미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같은 환경미화 일을 해도 누군가는 그 일을 단순한 거리 청소나 돈벌이로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일로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당연히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객관적 상황이나 조건이 행복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같은 조건이라면, 결국 행복은 자존감과 연결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복 수준은 자기 스스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좀 야한 부분에 대해 말해볼까요? 만약 부부관계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첫날밤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충분한 행복을 받았지만, 내가 상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요?
남자들은 그래서 더 지속하는 약을 먹기도 하고 여자들은 인터넷으로 남자를 더 행복하게 해 주는 방법들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랑을 받을 때보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때 행복합니다. 그런데 행복의 수준은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양식’에 의해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는 개들은 자신들도 사람인 것처럼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면 같은 개들 무리에서는 그 행복을 더는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기를 버린 주인을 몇 년 동안 같은 곳에서 기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왜 흙에 불과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창조하셨을까요?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행복을
주실 때에야만 하느님으로서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당신 자녀로 삼으셨으면 에덴동산에서 동물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자존감을 주는 양식을 그들에게도 제공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시키심으로써 당신 자존감과 행복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이사 43,7)
행복은 다 이기적입니다.
남이 행복해서 자신도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긍심이 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이웃에게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양식이 되어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내가 이웃에게 하느님 행복을 줄 수 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자존감을 잃지 맙시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로마 6,12-18
루카 12,39-48
<주방 안에도 하느님께서!>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장 39~40절)
신앙생활을 이벤트처럼 해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일만 신자’인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분위기 좋은 성탄 때만 신자인 분들도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바짝 열심히 하고 나서 푹 쉬는 그런 이벤트가 절대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자세가 있는데 바로 지속성이며 일상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로 힘들어도, 때로 악천후라 할지라도 꾸준히 걸어가는 용감한 행위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저녁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 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 그 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루카 12,39-48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종말과 재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
2) 그런데 그날과 시간은 말할 수 없다는 것.
3) 그렇기 때문에 종말과 재림을 맞이할 준비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것.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지는 날과 시간은 인간이 미리 계산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4-6).”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는,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 않게 하려면
빛 속에서(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는,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는, “지금 ‘죄와 악’ 속에서 살고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는,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평소에 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합시다.”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2-48).”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들도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슬기로움’(지혜)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나중’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쾌락에만 빠져서 사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내세,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결국 ‘그날에’ 어떻게 되는지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세속의 재판처럼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재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날의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날 어떻게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맡기셨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이고 ‘집사’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슬기로운 집사’이고,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은 ‘불충실한 집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을 얻으려고 지금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44절의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46절의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불충실한 자들’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과 길을 막지 않으셔도 그들 자신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서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시는 분인데,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는 말은,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불충실한 자들이 아무 준비 없이 그날을 맞이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는 말씀의 뜻은, “신앙인이라면 내세와 심판을 의식하면서 신앙인답게 살아라.”입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경고’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호소’입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산 사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은 피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