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장석남은 수필 '주소 유감'에서 성북동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내가 사는 주소지인 성북동 하면 단연 “거기 그 대단한 동네 말이죠?” 한다.
어떨 때는 “좋은 동네 사시네요” 한다. 이상하게도 모두 뼈가 느껴지는 말들이다.
부촌이요, 예전엔 큰 도둑들의 활동 무대로 이름을 빛낸 동네다.
언젠가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성처럼 우뚝한 집들이 즐비한 쪽을 가리키며
“저쪽을 도둑놈 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는 거였다.
‘도둑이 많다는 뜻일 텐데······’ 하며 씁쓰레 웃은 기억이 난다.
하여튼 그 알 수 없는 내용의 “거기 굉장한 동넨데······” 하고 여운을 남기면
나는 공연히 쓴 입맛을 다시게 되고 그러고는 “그렇죠······”하고는 한참 있다가,
“헌데 성북동에는 성북동이 있고 성북동 비둘기가 있죠.
내가 사는 덴 비둘기 쪽이죠”라고 말한다. 대개는 알아듣는다.
부자들, 세력가들이 사는 동네가 있고 지금도 연탄을 때는 집이 아주 흔한
우리가 사는 쪽을 구별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나는 편의상 그렇게 각주를 붙여보는 것이다.
그래 나는 정확하게는 성북동에 사는 게 아니라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적인 동네(?)에 사는 셈이다.
굳이 구획 지어보자면 성이 바라보이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성북동에
사는 것이고 성 바로 아래서 사는, 성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은 성북동 비둘기가 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선 방향으로만 쳐도 성 바로 아래쪽에 있는 집은
북향 내지는 잘 해봐야 동향이 될 수밖에 없다.
집은 남향이어야 한다는 기본에 어긋나는 것이다.
애초부터 옹색한 언덕빼기에 겨우겨우 미끄러지지 않을 만큼씩 터를 잡고
집을 앉혀 등 붙이고 사는 형세가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주소의 세력’과는 하등 관계없는 주소지인 것이다.
서울성곽에서 비탈길을 좀 내려오니 만해 한용운이 55세 부터 입적한 65세 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이 나온다.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가족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에게 승려 벽산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 사장과 몇몇 유지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대지 113평 건평 16평의 집을 짓고 이를 심우장(尋牛壯)이라 이름 지었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가지 수행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제의 식량배급도 거부하고 독립선언서가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의 작품임을 알고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다시 쓰겠다고 고집하다가 공약삼장만 기초한
철저한 독립운동가인 그는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되므로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에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이 일대는 백악산 동북쪽 기슭의 급경사 사면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현격히 낮은 지형이어서 남향집을 짓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이 일대의 집들이 대부분 북향집임을 고려할 때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혐오해서 북향집을 지었다는 것은 전설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가 아니라도 현장답사를 관심있게 해 보면 답이 나온다.
어쨌던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랄까 심우장에는 만해의 외동딸(이복인 남동생은 월북) 한명숙씨가 살았으나 건너편 언덕바지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서자 "꼴 보기 싫다"며 명륜동으로 이사를 갔고 그뒤 서울시 문화재인 심우장의 땅을 1999년에 서울시가 매입했으나 심우장 마당 한켠에 서있는 시멘트 건물은 여전히 한씨 소유이며 현재 관리인 가족이 살고 있다 한다.
서울시는 한씨와 협의와 보상을 통하여 시멘트건물을 허물어 원래대로 복원하고 만해의 삶과 사상을 전하는 문화재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심우장에서 <흑풍> <박명> <후회> 등의 신문연재소설을 썼다.
마포나룻터에서 새우젖장사로 갑부가 된 이종석의 깔끔한 한옥별장을 둘러보고 다음에 찾은 곳은 수연산방(壽硯山房)으로 월북작가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런데 걸어 오면서 새우를 몇마리나 잡아 젖을 담아 팔아야 저런 별장을 지을 수 있나 친구들끼리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수연산방은 상허가 직접 형편이 되는데로 조금씩 지어 나갔다 하는데 그래도 가난한 작가가 이만한 집을 마련한 것은 대견스런 일이다.
심우장이 16평 건물에 "장중할 <莊>"이란 이름을 부친 것에 비하여 규모에 있어 뒤지지 않고 건축미가 한결 뛰어난 수연산방을 "방 <房>"이라 당호를 지은 것만 보아도 두 분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만해는 호방하고 두주불사형이었으나 상허는 소박하고 사색적이었다 한다.
이 집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에 들어오니 작으면서도 넓고 옹색하면서도 더 없이 넉넉하였다.
이 집은 예전에는 "이태현의 집"이라고 불리다가 1988년 월북작가들이 해금되고 나서야 "이태준의 집"이란 제 이름을 찾았다.
이태준은 <달밤> <돌다리> <복덕방> 등 그의 소설에서 대부분 토착적인 생활의 단면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금은 상허의 외손녀가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한과도 팔고 있다.
오늘도 빈 자리가 없이 손님들이 여유롭고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는데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문화인이 아닐까?
스타벅스다 뭐다 하며 원두커피집이 우후죽순으로 늘어 나는데 원두커피만 즐기는 된장녀들이여! 이런 곳에서 석양을 즐겨봄이 어떨까?
인근 도로변에 선잠단지가 있는데 이 선잠단은 누에치기를 처음했다는 중국고대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신(잠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이 단은 고려성종 2년(983)에 처음 쌓은 곳이였다.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누에를 키우게 했다.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고 조선시대 왕비의 소임중 큰 하나는 친잠례를 지내는 일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간송 전형필(1906~62)이 수집한 소중한 문화재와 값비싼 고미술품이 전시된 간송미술관을 위치 확인만 하였는데 이 미술관은 매년 5월과 10월 중순에 보름동안 무료로 개방된다한다.
성북동 문화유산의 거리를 이리 저리 헤메다 보니 여기 저기 우암 송시열 집터라는 표지석이 나오는데 그 규모가 어림잡아 수만평은 되지 않나 싶다.
자연암벽에 우암의 친필로 회주벽립(會朱壁立)이란 글씨를 새긴 곳으로 부터 심지어 올림픽기념관과 보성고교 자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암은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주자학의 대가로 영조와 정조시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 지면서 그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 졌다.
그는 충북 옥천 외가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향은 충남 회덕이었다.
그런데 그가 성밖인 성북동에 살았다면 조정에 어떻게 출퇴근을 했는지 궁금하다.
좌의정까지 지낸 그가 걸어서는 다니지는 않았을 터이고 가마를 타고 입궐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렸을가.
아마도 본가는 북촌에 있고 성북동일대는 일종의 그의 별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회덕인인 우암이 만석꾼도 아닐텐데 아무리 성밖이라지만 도성과 맞 붙어 있는 이 광할한 땅을 어떻게 차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국가 또는 왕실에 특별한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했던 공신전 [功臣田]일 수도 있겠으나그가 말년에 사약을 받았으니 탄핵을 받아 부정축재로 이 거대한 땅을 국고에 환수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제4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내고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옛집을 찾았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전통한옥으로 건물의 형태와 현판 그리고 정원 등이 조선시대 말 선비의 멋과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민문화유산제1호이다.
최순우가 돌아가시고 나서 성북동 한옥의 양옥화 추세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2002. 12에 내셔널트러스트(외국에는 이런 운동이 많음)에서 기금을 모아 이 집을 사서 보수를 한 후 2004. 4에 일반에게 개방하게 된것이다.
매입금액은 7억8천만원, 보수비용 2억원이 들었는데
대지 120평에 건평 30평이다. 뒷 뜰에는 작고 아담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한옥의 여유와 정취가 요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게 은은하게 베어 나온다.
저녁식사차 어느 돌대통령이 자주 들렸다는 "국시집"을 찾아 성북로를 내려오다 보니, 길가에 오원 장승업의 작업실 터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그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성북동에 오니 이 일대가 이렇게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음을 미쳐 몰랐고
유홍준의 말대로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그의 시대적 유행어가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되는 뜻있는 나들이였다.
첫댓글 ㄳ..
성북동에 이런 문화유적이 많군요 잘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날씨가 따뜻하여 서울성곽을 끼고 성북동 나들이를 갔다.도 어려운 동네가 공존하는 동네이다.
대개 무슨 동(洞)하면 부촌인지, 빈촌인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성북동은 북악산 북쪽 기슭과 골짜기 넘어 마주 보이는 남쪽의 구릉지로 양분되어
이 곳은 재벌의 저택과 외국 대사관저가 밀집되어 있는
최고의 부촌과 이사짐 옮기기나 연탄배
서울에 얼마 남지않은 최하의
그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성북동에 오니 이 일대가 이렇게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음을 미쳐 몰랐고
유홍준의 말대로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그의 시대적 유행어가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되는 뜻있는 나들이였다...
부촌과 빈촌이,,,,,,
함께 공존하는
성북동의
의미 있는
고운
글향에
머물다 갑니다.*^^*
사랑의 전설님,
, ,
오늘도
아름답고 화사한 멋진 날 되시며
더더욱 건안하시며 건필하소서.*^^*
잘 읽었습니다. 공정과 공평은 언제나 나를 혼돈하게 만듭니다.
쳐다보는 자와 내려보는 자의 차이도. 늘..그렇네요
이 글은 최성룡의 에세이집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다]에 있는 수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