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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성령의 불이 붙은 리더: 내외적으로 적을 만든다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해야 할 일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보수에만 있기에 일에서 흥미를 찾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고위직에 앉으면 그 회사나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로마 황제 네로(서기 37~68년)를 꼽고 싶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가서 보면 그의 목욕 욕조가 엄청나게 큰 붉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보다는 사치와 시, 연기 등에 더 관심을 가졌고 로마의 대화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랬다고 뒤집어씌워 박해와 같은 수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에 대한 충실성이 부족하고 제국의 통치를 소홀히 하여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황제를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하는 근위대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원로원도 네로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의 체포와 잔혹한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소문을 들은 네로는 처형이라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를 잃고 있는가!” 무능한 리더는 내부에서만 적을 만듭니다.
그다음은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코닥 필름을 이끌었던 CEO 케이 위트모어(Kay Whitmore, 1990~1993)가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재임 동안 수익성을 유지하고 사진 필름 시장에서 지배력을 유지했습니다. 회사는
표면적으로 여전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고, 그는 특별히 무능하다고 인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코닥의 리더십은 디지털 혁명을 충분히 일찍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수익성이 높은 필름 사업에 너무 집중하여 디지털 사진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트모어는 업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비전과 사진의 미래를 향해
회사를 전환하려는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코닥의 디지털 기술 전환 지연으로 인해 경쟁업체가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고 결국 코닥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코닥이 마침내 따라잡으려고 시도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회사는 2012년에 파산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지금 삼성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는 일하지만, 그래서 겉으로 수익이 나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지만, 이런 사람도 결국 한 나라나 회사, 가정을 말아먹게 됩니다.
할 일만 하는 리더는 내외부에서 다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리더로 적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이브러햄 링컨’의 사례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직 내내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도덕적 신념, 비전,
결단력 측면에서 그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준 탁월한 지도자의 모델입니다.
그는 노예해방까지 주장하며 남북이 전쟁하게도 했습니다.
사실 노예제도 해방 문제로 전쟁을 해야 할 때 적들에게만 반대를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부에서도 반대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기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문에 희화화되었고, 정치적 경쟁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속한 당의 일부 구성원들로부터 멸시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에 계속 집중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보존하고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실천한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링컨이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감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우려를 뛰어넘고, 반대를 견디며, 더 큰 이익을 위해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리더에게 강력한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불이 붙었고, 그 불의 열정은 자신을 짓누릅니다.
또 분열을 일으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한 사람은 큰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은 내부와 외부에서 다 큰 분열을 일으키지만, 결국 한 가정이나
회사, 나라를 부흥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델이 고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의 리더를 뽑을 때 성령의 열정으로 분열을 초래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그 단체의 장래는 밝을 수밖에 없지만, 안정만 추구한다면 그 장래는 밝을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12,49-53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
젊은 사제 시절, 방황하는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별의별 문제성을 지닌 아이들과 함께 살다보니 매일이 사건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학교 담임 선생님 지갑을 털지를 않나,
도시 가스 파이프 라인을 타고 남의 집으로 들어가지를 않나?
수시로 보호자 자격으로 경찰서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중에 가장 두려운 사건은 방화와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인명 피해라도 나면 뒷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야밤에 주인이 퇴근한 문구사 안에 침입했다가, 추워진 날씨에 불을 피우다가 화재를 냈습니다. 사건을 수습하느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경찰에서도 방화범은 강력계에서 담당합니다.
불 한번 제대로 나면 막대한 재산피해는 물론이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큰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방화라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치명적인 범죄이기에 특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이란 일반 방화범처럼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무 이유 없이 질러버리는 그런 불과는 철저하게도 다른 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은 ‘사랑의 불’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입니다.
눈멀고 귀먹은 우리 인간, 켜지지도 꺼지지도 않은 우리, 무기력해진 우리를 각성시키고 일깨우기 위해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한 예수님 사랑의 불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싫어하셨던 부류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큰둥한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쪽에서는 피리를 불고 춤을 추지만 그저 소 닭 보듯이 멀뚱멀뚱 쳐다만 봅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불러보지만 별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인(聖人)들은 우리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을 공통되게 지니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의 불이 지속적으로 활활 타오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체하지 못하던 사랑의 불을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도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인류의 횃불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면에 지니셨던 사랑의 불은 얼마나 뜨거웠던지 스스로를 완전히 연소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불신과 냉담함으로 가득했던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뜨겁게 만드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활활 불타오르게 하심으로써 동토의 땅이었던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사고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참으로 유한합니다.
한때 그토록 뜨거웠던 마음을 지녔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한줌 재처럼 그 마음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때 죽고 못살던 그런 사랑이었는데 불과 몇 달 못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사랑이 변합니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냉랭한 마음, 무기력한 얼굴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변해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의 불을 활활 지피고 계십니다.
냉담했던 우리지만 그분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따스한 그분의 기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그분 사랑의 불을 우리에게 옮겨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당신 내면 가득 채우시고 차갑고 냉담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우리,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우리를 향해 뜨거운 당신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 즉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겪으셔야 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원사업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 대신 속죄하신 일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회개를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고집을 안타까워하시는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13장에 다시 나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전체 인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대재난을 겪어도 깨닫는 것도 없고 바뀌는 것도 없고 그저 일상생활이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인류의 모습은 회개와는 너무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세속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회개를 통해서 ‘삶’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짓눌리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큰 일’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겨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급할 때에는 하느님도 찾고 예수님도 찾고 성모님도 찾다가 그 고비가 지나가면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살던 대로 살면서 회개를 미루기만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하면 후회하고, 예수님께 애원하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또다시 변화 없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51-53).”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내가 주는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치 내가 분열을 일으키려고 온 것처럼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분열시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참 평화’를 뜻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관심이 없고,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간에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하느님 나라는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이 없는, 모두가 ‘함께’ 사는 나라이고, 그래서 분열과 갈등이 없고 참 평화만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고, 또 이웃과도 함께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구들이 갈라져서 서로 맞설 것이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맷돌질을 함께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거나 자매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함께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버려둘 것이다.’로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 말씀은, 회개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회개는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지 않으려면,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