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시집 『육사시집』, 1946)
♣어휘풀이
-맹아리 : 꽃망울의 경상북도 방언
♣작품해설
「황혼」에서 보여 준 안식과 평화를 향한 육사의 의지는 「연보」 · 「노정기」와 같은
비극적 자아 인식으로 깊어져 삶의 비약적 상승과 희망을 꿈꾸는 이 「꽃」이란 자품으로
개화하게 된다. 극한의 식민지 시대 상황 속에서도 ‘디다림’과 ‘믿음’의 강인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이 시는 시적 상황 전체가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
이 시의 표현 특징을 살펴보면 일정한 반복적 구조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서·결로 짜여진 이 시는 각 연 모두 4행씩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각 연의
1행부터 3행까지는 구문의 전개와 함께 시행의 길이가 점층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4행
에 이르러 화자의 심정을 집중적으로 토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 매 4행을
모두 영탄형으로 끝맺는 문장 구조를 통해 화자가 자신의 내면 의지를 강화시키는 특징
도 갖고 있다.
우선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 상황은 ‘하늘도 다 끝난’ 곳,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곳,
‘북쪽 툰드라’ 같은 척박한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생명의 근원적인 모든 요소를 잃어버
린 극한 상황에서도 그는 ‘저버리지 못한 약속’처럼 ‘꽃 맹아리가 옴작거리’고, ‘제비때
까맣게 날아오’는 봄날을 기다리며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하루도 쉼 없이
정진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다. 생명이 부정되는 극한 속에서도 피어난다는 역설적인 ‘꽃’
은 암담한 현실 상황과 대립되는 동시에, 화자의 현실 초월 의지를 대변한다. 2연에서도
화자는 극한적 한계 상황에서 ‘꽃 매아리’와 ‘제비떼’를 기다리는 희망과 기다림의 자세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희망과 기다림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함이 아니라, ‘마침내 저
버리지 못할 약속’의 확신에서 비롯된 의지의 태도이다. 3연에서는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
실행되었을 때의 밝은 미래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제의 오랜 질곳에서 벗
어나 환희로 가득 차 있는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조국 해방의 모습이며, ‘꽃성’으로 표
상된 그 날, 광복의 기쁨에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는 결국 우리 민족의 모습이다.
물론 절대 절명의 극한 상황에서 ‘꽃이 빨갛게 피’었다는 역설은 마땅히 피어야 할 꽃
이 피지 못한다는 의미로, 그만큼 당시가 극한적인 상황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지만, 육사
는 ‘저버리지 못할 약속’에 대한 기다림을 갖고 ‘쉬임 없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그 기다
림이란 ‘북쪽 툰드라’ · ‘찬 새벽’ · ‘눈속’이라는 일제 치하의 현실 상황에 ‘꽃 매아리’ · ‘
재비떼’와 같은 생명의 의지를 심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그 ‘약속’처럼 도래할 찬란한 조
국의 미래를 위해, 그는 꽃 한 포기 피어나지 못할 만큼의 암울한 역사 현장 속으로 온몸
을 던지는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이육사(李陸史)
본명 : 이원록(李元祿), 원삼(源三), 활(活)
1904년 : 경북 안동 출생
1915년 예안 보문의숙에서 수학
1925년 형 원기(源祺),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
1926년 북경 행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 형무소에 3년간 투옥됨
이 때의 수인(囚人) 번호(264)를 자신의 아호로 삼음
1932년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입교
1933년 조선군관학교 졸업 후 귀국, 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하에 체포와 구금생활 반복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1943년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사망
시집 : 『육사시집』(유고시집,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