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소유욕
"늦어도 좋다. 5월에 돋는 감잎만 같아라."
무엇이든 늦은 출발선에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격려의 말이다. 늦게 돋아도 감잎의 윤기를 따를 잎이 없다.
"늦게 피어도 좋다. 5월에 피는 오동꽃 같기만 해라. "
죽은 듯 맨숭맨숭하게 서있던 오동나무에서 소리소문없이 꽃이 피었다. 어려서 엄마가 큰 시장에서 사온 비야이브 털실 색으로 피었다. 몸은 늙고 지친 어머니 모습인데 꽃은 청춘이다. 꽃 속에서 젊은 엄마의 목소리응 마음으로 듣는다. 시간 여행을 시킨다.
"색스럽지 않아도 좋다. 아카시,쪽동백 꽃 만큼만 피어라."
키가 큰 나무라 꽃송이가 맺혔는지도 모르게 세월이 달리는데, 공원으로 들어가면 향기가 진동한다. 순간 고개를 들고 아카시 나무의 위를 본다. 송알송알 꽃송이가 녹다가 만 눈송이 같이 희부연하게 대롱거린다. 그만에 들숨만 하고 싶어진다. 성질 급한 꽃송이는 이미 피고진다, 그 바람에 늦보이는
동료 꽃송이들의 핀 얼굴을 보게 하는 전령사가 된다.
"꽃송이가 작다고 투정 말라. 이팝나무 조팝나무 꽃만 같아라."
멀리서 보면 아예 흰쌀밥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듯 하니 '이 밥 나무''저 밥 나무'가 이팝나무, 조팝나무가 되었다던가. 배고픈 시절의 꽃들은 모두가 먹거리로 보였으나 그래도 좋다. 멀리서 보는 것과 달리 가까이서 한 송이씩 보면 조팝나무는 단아하고 이팝나무는 조형미가 있다. 깨끗한 저들 꽃은 공동체로 존재를 드러내는 꽃송이들, 약한 것들을 대변하는 꽃들이다. 집단으로 피지 않고는 벌을 불러들일 자신이 없어서 아마도 그래야 벌들이 존재를 보고 날아올 것이므로...
"기다리다 지쳐도 좋다. 쥐똥나무 만큼만 기다려라."
5월의 나무에서 뿜어내는 향기 중에 향기는 쥐똥나무에서 오는 것들이 아니더냐. 꽃송이가 크다고 향내가 진한 것도 아니다. 작아도 향이 좋고 뿜어내는 능력도 크게 피우는 능력에 버금가는 능력이다.
꽃철이 다 지나간듯 해도 다시 다가드는 꽃들이 없이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산담. 자식이 인생의 꽃이라 그 꽃 보는 재미가 공짜로 온다더냐. 물 주고 거름 주고 사랑 주어가며 가꾸어야 하거늘.
이사 가는 집에서 버림 받은 화분이 아파트 마당에서 여전히 군자란 꽃을 피우고 있다. 다소 방치한듯 식물의 모양새가 곱지는 않으나 누른잎을 떼어 내고 화분을 골라 다시 심고 거름흙을 갈아주었다. 담시 햇빛을 쏘여도 좋을 듯하여 그 곳에 나란히 두었다. 며칠후 화분이 보이지 않아 경비가 경로당에 들여놓은 줄 알고 믿고 잇다가 확인하 어제 들어가 보았다. 없다. 거름 흙까지 사다가 분갈이를 해서 물을 주어 버림받은 서러움을 달래주었는데 그들의 안위를 늦게야 챙긴 것이 후회되었다. 옷갈아 입히고 영양제 먹여 잠시 보육원에 맡겨두었더니 입양 허락도 없이 아기를 훔쳐 외국으로 보낸 일처럼 허망하다. 그래도 웃었다. 꽃을 좋아해서 데려갔을 것이니 잘 살기를 기원하며 그 화분이 머물던 빈 자리를 눈으로 쓰다듬고 돌아왔다.
부모 손을 놓쳐 이리저리 돌다가 다시 만나는 동안 37년이 흐른 어느 미아처럼 그 화분도 내게 돌아올 확률이 있기나 할까. 가져간 사람이 꽃을 사랑하면 거기둔 사람도 사랑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찾아주려는 의지보다 데려가려는 마음이 커서 그러했을지라도 잠시 내 자식처럼 토닥거리는 동안의 정이 서운함으로 남는다. 그 화분을 달라고 했어도 주었을 화분인데 갑자기 언제 가져갔는지 궁굼해진다. 낮에 가져갔으면 주인없는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고 밤에 들고 갔다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가져갔을 것이려니 인간의 소유욕이 꼬리를 쳤을 것이다. 에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