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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5일
돼지인플루엔자(SI) 공포 확산
멕시코 정부가 2009년 4월 25일(현지시
간) 현재 돼지 인플루엔자에 감염돼 모두
81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멕
시코발(發)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
enza·SI)로 전 세계에 방역 비상이 걸렸다.
멕시코에선 최소81명이 사망했고,1300
여명의 감염자가 발생했다.미국 뉴욕시 퀸
스의 한 고교에서 8명의 학생이 SI에 감염
된 것으로 확인돼,미국에서만도 총 19명이
감염됐다. 뉴질랜드에서는 25일 멕시코를
여행하고 돌아온 22명의 오클랜드주 대학
생 중 일부가 감기 증세를 보이자 교사 3명
을 포함한 그룹 전체를 격리했다.프랑스와
이스라엘에서도 멕시코에서 돌아온 여행객
2명과1명이 각각SI 감염 증세를 보여 입원
했다. 우리 정부도 26일 오전 세종로 중앙
청사에서 긴급 관계 부처 회의를 열고 SI
대응책을 논의하고 비상 방역 체계를 가동
했다.
SI는 그동안 사람에게는 거의 발생하지 않
았다.그런데 이번에 인체 간 감염이 일어난
데다가 사망률도 높자 세계보건기구(WH
O)는 25일 국제보건규정(IHR)에 따라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멕시코와 미국의 SI 확산
사태를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우려 사안’
이라고 밝혔다.
마거릿 찬 WHO 사무총장은 “인플루엔
자 대유행(pandemic) 가능성이 있다”며
“급작스러운 발병을 봉쇄하기에 너무 늦
었는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W
HO는 SI의 발병과 관련, 조류인플루엔자
(AI)로 인해 이미 ‘3단계’로 돼 있는 ‘전
세계적인 유행(global pandemic)’ 경고
수준을 추가로 상향 조정하지는 않았다.
멕시코 정부는 사실상 비상사태를 선언,
SI 환자를 격리하고 주거 가옥에 대한 역학
조사권을 보건부에 부여했다.
인천공항검역소에 입국자들의 SI감염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안내문이 부착되어있다
◆돼지 인플루엔자 (swine influenza)
돼지가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발생하는 호흡기 질환이다.
감염된 돼지와의 직접 접촉이나 공기를 통해 인간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에 멕시코에서 갑작스럽게 환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이 바이러스가 인체 간 감염이 잘 되는 신종 바이러스로 변이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돼지인플루엔자의 증상은 사람이 걸리는 독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열·식욕 부진·기침·콧물 등과 함께, 설사와 구토 증상을 수반하기도 한다
▶2015년재일 사학자 고(故) 신기수 제작
다큐 ‘조선통신사’ 상영
17~19세기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외교 사절이면서 ‘한류 스타’였다. 조선을 떠나 에도(현 도쿄)에 이르는 동안 조선 문사(文士)들을 흠모한 일본인이 전국에서 몰려든 사실이 그림을 통해 생생히 전해진다.
재일동포 사학자 고(故) 신기수(1931~2002)는 흩어진 통신사 사료를 모아 이들의 이야기를 일본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 열정을 담아 1979년 제작한 다큐 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가 25일부터 일주일간 부산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다음 달 3일엔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상영된다. 제작 36년 만에 고국 극장에서의 첫 공식 상영이다. 아버지의 소원을 이룬 딸 신이화(50)씨는 “번듯한 자막을 입혀 고국 극장 스크린에 거는 것…. 아버지의 평생 꿈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48분짜리 다큐멘터리로 잔잔하면서 매혹적이다. 축제처럼 흥겨운 행렬 속에 에도로 향하는 통신사 여정을 신기수가 일본 각지에서 어렵게 찾아낸 당시 풍속화를 보여주며 되짚는다. 사절단이 ‘몰려드는 손님과 모기 떼에 잠을 설쳤다’고 남긴 글, 통신사 일행이 추던 춤이 여태껏 전해지는 마을 등 세심하게 배치된 에피소드들이 몰입감을 높인다.
일본 공개 당시의 반향은 컸다. 언론의 찬사가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상영회가 열렸다. 조선통신사 유물 제보가 빗발치며 신기수는 140점의 귀한 사료를 수집했다. 이 사료가 2002년 개관한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신기수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전시·보관됐다. 당시 식도암을 앓던 아버지 대신 개관식에 참석한 신이화씨는 “꼭 아버지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했고, 4년 전 한국에 와 ‘외국어’나 다름없던 고국 언어를 배우며 조선통신사 기념사업에 매진했다.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에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부산문화재단의 강남주 전 대표이사와 이문섭 현 대표이사,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전 이사장 등이 힘을 보태주었다.
BBC와 NHK 등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진으로 참여해온 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했다.
▶2011년'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원로배우 김인문씨 별세
44년 연기자의 길 걸어
방광암 투병 중 타계… 영화 ’독 짓는 늙은이’ 유작 남겨
어눌하지만 푸근한 말투와 표정으로 대중에게 안식을 선사하던 배우 김인문(72)이 암투병 중 별세했다.
김인문씨는 25일 오후 6시30분쯤 서울 동국대 병원에서 방광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들이 밝혔다. 유족들은 “며칠 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고 결국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2005년 8월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김인문은 재활에 성공한 뒤 끊임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후배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2010년 3월부터 제작에 들어간 소설가 황순원 원작의 영화 ‘독 짓는 늙은이’에서 주인공 송영감 역할을 맡아 전원주, 안병경 등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하지만 끝내 개봉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2007년 영화 ‘재클린의 눈물’에 출연했던 고인은 당시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연기자로서 나의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며 “극중 배역을 위해 아내 몰래 앞니와 어금니 8개를 뽑았다”고 밝혔다. 극중 배역이 틀니를 해야했기 때문에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스스로 생니를 뽑았다는 얘기다.
1967년 영화 ‘맨발의 영광’으로 데뷔한 그는 1968년 TBC 특채 탤런트로 데뷔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수탉’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바람난 가족’ ‘물보라’ ‘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 KBS 장수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대표작이다.
뇌경색을 이겨낸 뒤 그는 장애 배우들을 육성하는데 큰 애정을 쏟았다. 2009년 1월 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를 설립했으며 그가 총괄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린 ‘날개없는 천사’에는 다운증후군, 뇌성마비 환자 등이 배우로 출연했다. 다음달 SBS에서 방영 예정이었던 특집극 ‘유쾌한 삼총사’에는 그의 장애인 제자 강민휘, 길은별이 주·조연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연극영화예술상 남자주연상, KBS 연기대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영란씨와 2남이 있다.
▶2010년'패션계 어머니' 최경자씨 별세
▶2004년교육인적자원부, ‘출석 정지제’ 부활 담은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시행령 입법 예고
▶2004년화장품 브랜드 ‘에스티 로더’ 의 창업자
에스티 로더 사
▶2004년안네 프랑크 탄생 75주년 맞아 희귀 사진 등 인터넷 공개
1942.6.12 열세 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6월 12일은 안네가 태어난 날이면서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이다. 1942년 13세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이었다. 안네는 “생일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유대인 학살이 전염병처럼 퍼지던 시절에 소녀 안네에게 일기장은 단순한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비밀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인격화 시켜 '키티'라고 부르면서 마치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여느 소녀처럼 예쁘고, 개성이 강하고 발랄한 유대인 소녀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실하게 일기를 적음으로써 점점 성숙해 진다. 그녀는 이 일기를 통해 나치 치하를 살아냈던 유대인들의 자서전을 남긴 셈이다.
나는 이 넓은 세상에 외톨이입니다
안네가 일기를 쓰게 된 동기는 감상적인 문학소녀의 모습이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가 끔찍한 사고를 당해 병상에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화상을 그리면서 생의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그녀도 무척 외로웠다. 외로움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은신처에서 '외톨이' 안네는 일기를 쓴다. "드디어 문제의 핵심,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말 할 차례인데, 그건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 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겠어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스스로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출간된 <안네의 일기>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과 어머니 메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소녀였다. 1933년 나치당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학살 정책이 만연하자, 안네의 집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1942년은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을 색출해서 수용소로 끌고 가던 때였다. 안네의 일기는 바로 그 시기를 그려낸 유대인 소녀 작가의 작품이다.
사춘기 소녀가 마음을 털어 놓을만한 참다운 친구가 없다는 고독감을 느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꼭 은신처에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중고를 겪는다. 독일군을 피해 은신처에 숨고, 나돌아 다니질 않으니 친구가 없다. 이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기 쓰기는 안네가 바라보는 시대 상황, 사랑을 포함한 내면 고백, 나치의 만행을 놀라운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너무나 성숙한 문장이어서, 이 일기의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분석결과 그녀의 일기임이 밝혀졌다. 이 놀라운 일기를 보면 훗날 작가로서 대성할 재능마저도 말살시킨 미친 전쟁의 본질도 보인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안네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고 적었다. 안네의 일생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끝이 났지만, 그녀의 표현대로 종이는 인간보다도 더 잘 참고 견뎠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은신처에서 몰래 살았던 기록이, 안네가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믿었던 종이에 남았다. 종이는 글을 만나 완성된다. 만년필이건 연필이건 붓이건 간에 손의 연장인 도구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종이는 기다리고 견딘다.
암스테르담의 안네의집. 내부에는 은신처로 통하는입구를 책장으로 가려놓았다.
안네의 아버지가 마련한 네덜란드의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는 안네의 식구를 포함한 모두 8명의 유대인들(오토 프랑크 가족 4명, 일기에는 판 단이라고 나오는 판 펠스 일가 3명, 치과의사 뒤셀)이 숨소리를 죽이면서 살았다. 건물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비밀 공간에는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지인들만이 가끔 들러 생계를 도와주었다.
은신처에서 안네는 집단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자신을 비유하면서 '천국과 같은 생활'이라고 했다. 비록 사냥개 같은 독일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기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공간이었지만, 맑고 밝은 소녀로서 안네는 어머니와의 말다툼, 같이 사는 다른 가족들과의 반목, 오랜 감금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사춘기 소녀의 성적인 호기심과 사랑이 움트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동경하지만 마음 밖으로 드러내선 안 되는 것
그녀의 일기에는 날이 갈수록 성숙해져 가는 안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숨어산 지 1년 반이 지나자 이렇게 쓴다.
"아마 당신도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에요. 아무리 올바른 판단력이 있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의 솔직한 느낌까지 억누를 수는 없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죠. 하기는 우리 여덟 사람 모두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안네의 일기에 적혀있는 나치의 만행 소식을 듣고 유대인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나, 총소리, 대포소리,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 등 전쟁에 대한 공포, 실수로 은둔처에서 발각될까 봐 조바심을 치는 모습이 있다. 저항문학으로 평가되었던 이러한 면보다는 보통 소녀로서 꿈꾸고 있는 안네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어머니에 대한 불만, 언니와의 말다툼, 성적인 호기심, 첫사랑 소년에 대한 그리움들. 2년이 넘게 숨어 사는 동안 그녀는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점점 꿈꾸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었다. 소녀에게 환한 태양 아래서 마음대로 활보하는 잠깐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숨어 지내는 동안 키가 얼마나 컸는지 문설주에 표시해둬
1944년 7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안네는 드디어 은신처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둠이 깊어 새벽이 오는 것이다. 그 희망의 새벽별을 바라보던 1944년 8월 4일 나치의 비밀경찰에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누군가의 밀고에 의한 것이었다. 안네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오던 희망과 자유의 새벽별은 어둠과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육군 장교였다. 안네의 은신처를 급습한 나치의 비밀경찰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그 사실을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조국을 위해 전쟁을 치른 장교마저도 수용소로 보내야 하는 현실이었다. 훗날 이 비밀경찰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딸 안네를 비롯한 자기 가족이 은신처에서 지낸 2년은 행복했다는 말도 했다. 내가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은신처로 온 뒤 안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표시를 새겨 넣은 문설주를 가리켰다." 안네가 있었던 곳이 비록 은신처였지만, 같이 숨어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았고, 전쟁이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
1944년 9월 6일 안네는 은신처의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의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그 다음은 영영 이별이었다. 판 펠스 씨가 제일 먼저 가스실에서 사라졌고, 안네의 언니 마르고를 '어떻게' 하려던 경비병에게 대들던 어머니가 두 번째로 사라졌다. 은신처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던 남자친구 판 펠스 씨의 아들 페터도 사라졌다.
은신처에 숨어 사는 동안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안네와 지금도 애도 행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무덤
1945년 3월경, 아우슈비츠에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된 안네와 언니 마르고는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두 자매가 죽은 날짜는 확실하지 않지만, 영국군에 의해 수용소 사람들이 구출되기 한 달이 조금 넘은 전으로 추정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극도로 나빠진 건강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들어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독일 비밀경찰이 휩쓸고 간 은신처에 버려져 있던 안네의 일기는 이들의 은신생활을 도와주었던 미프 부인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고, 훗날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어 전 세계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안네의 일기를 잘 보관하고 있던, 미프 부인은 은신처에서도 글쓰기에 열심이었던 '안네'에 대해서 안네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한 말을 들려준다.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
2003년북한, 사스(SARS)로
금강산 관광 중단 통보
▶2003년국산기(KT-1B 훈련기),
인도네시아에 첫 수출
▶2001년병역비리 주범 박노항 원사 도피 3년 만에 검거
▶2001년우리나라 성공회 역사 111년 만에 여성 신부(민병옥) 탄생
▶1997년김현철 청문회
▶1990년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서
허블 우주망원경 전개
▶1989년삼성전자 세계2번째로 16MD램 개발
▶1989년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1심에서 사형선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 피고인에게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서울형사지법은 1989년 4월 25일 선고공판에서 김피고인에 대해 국가보안법 항공법 항공기운항안전 죄목을 인정, 검찰의 구형대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이로써 1백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사건발생 1년5개월, 김피고인이 기소된지 81일 만에 1심 절차가 마무리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범행은 국제협약이 범죄로 규정해 엄벌하고 있는 `운항중인 민간항공기에 대한 폭발물 테러`를 자행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잔인하고 악랄한 소행으로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다"고 사형이유를 밝혔다.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는 동안 김피고인은 고개를 떨군채 듣고 있다가 사형이 선고되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1982년이스라엘,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14년 10개월 만에 완전 철수)
▶1980년미국,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
인질구출작전 실패 후 잔해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1980년 4월 25일 연설을 통해 테헤란에 잡혀있는 인질 52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해 인질 구출에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이란 시간 24일 오후 7시30분, 아라비아 해상에 있는 핵잠수함 미드웨이호로부터 이란에 억류되어 있는 인질 52명을 구출하기 위한 미군 특수부대가 대형 헬리콥터 8대에 분승, 테헤란 남동쪽 330Km 사막지역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6대였다.
다음날 25일 오전 2시 사막에서 테헤란으로 향하려던 헬기 가운데 1대에서 유압장치 고장이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카터는 인질구출에 최소 6대의 헬기가 필요하므로 작전중지를 지시했다. 그러나 부대가 철수를 시작했을 때 새로운 사고가 발생했다. 헬기 1대가 수송기 C130과 충돌, 2대 모두 화염에 휩쌓인 것이다.이 사고로 양쪽 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카터가 이같은 강경책을 취한 배경에는 대통령 예비선거를 의식해 강력한 결단력을 미국민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9년한국-소련 국제전화 가설
▶1974년포르투갈 군부 쿠데타, 스피놀라 정권 장악
▶1972년대법원, `사상계`의 등록 취소소송에 승소 판결
▶1969년한국감정원 발족
▶1965년한국-볼리비아, 국교 수립
▶1965년도미니카 군부 쿠데타
▶1963년동아방송(DBS) 개국
▶1962년미국, 태평양서 핵실험 재개
▶1961년민의원, 공민권제한법 제정
▶1960년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발표
▶1959년미국 5대호와 대서양을 잇는
세인트 로렌스 운하 개통
▶1958년멘데레스 터키 수상 내한
▶1953년크릭-왓슨, DNA구조 발견
▶1952년서울대 국내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
▶1952년제1대 지방의회의원 선거
(시-읍-면의회의원 선거) 실시
▶1946년민족박물관 개관
▶1946년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
▶1945년이탈리아 무솔리니 체포
▶1945년한국 기독교 선각자 김교신 사망
▶1945년미군-소련군 엘베강 토르가우의
다리위에서 해후. 2차대전 종결
악수하고 있는 미-소 양군의 병사들.
미 제1군 69사단의 정찰대와 소련군 58사단 선발대가 1945년 4월 25일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의 한 다리위에서 만났다.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 서쪽으로부터 밀어붙인 미군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 동쪽으로부터 밀어붙인 소련군의 극적인 만남이었지만 독일쪽에서 볼 때 이는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군은 4월 20일에 이미 마그데부르크와 라이프치히까지 진출해 있었다. 영국군도 라우엔부르크에서 엘베강을 건너 메클렌부르크 지방의 서부를 거의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의 몽고메리 총사령관은 "소련인과의 악수는 가능한한 동쪽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처칠의 말대로 좀더 동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얄타회담의 뜻을 존중하려는 아이젠하워에 의해 동진을 중단했다.
엘베강에서 처음 만난 미소 병사들은 이튿날인 26일 토루가우의 엘베강가 잔디에서 독일군으로부터 몰수한 술로 건배하며 서로 끌어안고 승리를 환호했다. 5일뒤인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7일 독일은 항복했다.
▶1945년국제연합(UN) 창립회의 개최
▶1943년`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 사망
이상화 시인.
시인 이상화가 1943년 4월 25일 42세의 나이로 위암을 지병으로 앓다 세상을 떠났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시위를 이끌었다. 1922년 `백조`의 동인이 되어 창간호에 대표작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23년에 동경으로 유학을 간 이상화는 외국어 학교 불어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교남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6년에는 문학 잡지 `개벽`에 또 하나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썼다. 그는 처음에는 백조파 동인으로 `나의 침실로`와 같은 낭만적 상징주의 시와 상징주의적 심미의식을 드러내는 `말세의 희탄`과 같은 시를 썼다.
그러나 후기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한 민족주의적인 시, 빈궁한 삶에 대한 공감과 연대감을 표출한 시를 써 당대의 대표적인 민족적 저항시인으로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1943년러시아의 극작가 네미로비치 단첸코 사망
▶1926년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 승하
조선 27대 임금 순종(純宗)이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53세로 승하했다. 이름은 척(拓), 능은 유릉(裕陵)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은 1874년 고종(高宗) 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 민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순종은 1875년 2월 세자에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양위하면서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융희(隆熙)로 삼았다.
즉위 직후부터 일본의 압력에 의해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한국군을 해산했으며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허가해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 합병 조약에 서명하면서 국권이 피탈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순종은 일제에 의해 창덕궁에 머물게 됐으며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이왕(李王)이라 불렸다.
순종의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가 있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어서 이복동생인 영친왕(英親王) 은(垠·1897~1970)을 황태자로 삼았다.
순종
일본 내각은 순종이 승하하자 궁중상을 선포했으며 장례 절차는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나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학생들은 서울에서만 210여명이었고, 전국적으로 1000여명에 달했다. 순종의 승하로 인해 촉발된 6.10만세운동은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1925년조선공산당 창당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튿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해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우, 선전부장 김참 등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알려진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제3인터내셔널이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함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해방 뒤인 1945년 9월 12일 재건됐다.
▶1923년진주서 ‘형평사’ 발족
1923년 4월25일,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발족됐다.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 백정(白丁)들이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자구노력의 일환이었다. 창립식의 참석자는 80여명이었지만 열광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백정은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에 따라 법제상으로는 분명 해방된 존재였지만 사회적인 차별로부터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장가를 가도 상투를 틀 수 없었고, 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고상한 한자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일반인과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도 못했다. 더구나 호적에 도살업자를 의미하는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이 표시돼 자식에게까지 차별이 세습됐다.
5월 13일 발기식을 가진 형평운동은 진주 백정 이학찬과 일본 메이지대학을 유학하고 온 장지필이 주도했다. 이학찬은 상당한 자산가였지만 자녀들이 차별당하자 형평운동에 뜻을 두었고, 장지필은 총독부에 취직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 자신의 등본에 '도한'이라는 출신성분을 발견하고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진보적인 사회단체와 여론은 호의적이었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백정들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5월 24일 진주에서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해산을 요구하며 이들이 판매하는 고기에 대해 불매·불식(不食)운동을 벌였다. 8월 14일에는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와 교육회 건물을 3일 동안 파괴해 전시상태를 방불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창립 1년 만에 조직이 12개 지사, 67개 분사로 늘어나고 5년 뒤에 회원수가 9,600여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했다.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 회원이 3만 4,000명(형평사 측 추산 40만명)이 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조직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내분으로 1931년 제 9회 정기대회에서 해소 건의안이 제출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21년조선군, 군법회의 설치
▶1920년소련.폴란드 개전
▶1919년건축·디자인 혁신한 ‘바우하우스’ 개관
벽면을 따라 위아래로 찬장을 배열한 현대식 부엌공간, 둥근 갓을 쓴 전기 스탠드, 등받이와 팔걸이를 갖춘 철제 의자, 둥그런 손잡이를 단 주전자, 지금까지도 우리의 생활공간에 깊숙히 침투해 있는 바우하우스 정신의 산물들이다.
1919년 4월25일, 20세기 건축ㆍ디자인ㆍ회화 등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온 미술공예학교 ‘바우하우스’가 독일 바이마르시(市)에서 문을 열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교사(校舍)로 사용된 바이마르시(市)의 바우하우스 학교.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을 체계화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주된 관심은 건축, 이른바 `바우(bau)`를 중심으로 모든 창조예술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제각기 고립돼 왔던 건축ㆍ회화ㆍ가구ㆍ조각 등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야 했고, `천재의 감각`에 의존해왔던 예술과 오랜 숙련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기술도 통합해야 했다. 중세 길드의 도제식 교육방식이 채택됐고, 교수와 학생간의 일방적인 위계도 무너뜨렸다. 칸딘스키ㆍ클레ㆍ파이닝거ㆍ야블렌스키 등 당대의 쟁쟁한 젊은 화가ㆍ건축가들도 교수진에 참여, 그로피우스의 교육이념을 뒷받침했다.
파격과 참신성으로 각지에서 찬사가 쏟아졌지만 전통을 옹호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은 늘 있게 마련이다. 바이마르 시민들도 바우하우스의 작품을 이해못한 데다 자유분방한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결국 1925년 데나우시(市)로 학교를 옮겼으나 그곳도 나치에 의해 폐쇄(1932년)되는 바람에 1933년 베를린에서 문을 닫았다. 학교 폐쇄는 이곳의 교수와 학생들을 세계 도처로 분산시켜 오히려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됐다.
▶1916년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12년근대 불교의 위대한 선승 경허 스님 입적
▶1900년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파울리 출생 -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발견해
▶194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871년 미국선박의 강화침입을 계기로, 흥선대원군 척화비 세우다
1827년 멕시코의 대통령(1872-1876) 레르도 데 테하다 출생
1823년 미국에서 첫 야구경기
뉴욕타임즈 1823년 4월 25일자에 `야구`라는 이름의 경기가 열린 것으로 확인됨으로 현대적 의미의 야구가 시작됐다. 뉴욕대학의 한 사서가 당시 뉴욕에서 발행되던 `내셔널 애드버킷`과 `뉴욕 가제트 앤드 제너럴 애드버타이저` 등에서 확인한 기사에 의하면 야구팀이 구성돼 미국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경기를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야구`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경기방식에 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 기사가 발견되기 전까지 현재와 가까운 형태의 야구는 1839년 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인 애브너 더블데이가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야구계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 쿠퍼스타운에 명예 전당까지 마련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 물론 야구 기원을 영국에서 발원한 크리켓으로 보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야구계는 현대 야구 규칙이 등장한 시기를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뉴욕 은행원 출신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야구클럽을 조직해 엘리시언 구장에서 첫 경기를 가진 1846년 이후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1792년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이예즈` 탄생
▶ 1783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 최초로 기구실험 성공
▶ 1714년 스위스의 법학자 바텔 출생 - 국제관계에 자연법이론을 적용한 `국제법`(1758)의 저자
▶ 1599년 영국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 출생
▶ 1214년 카페 왕조에서 가장 인기있던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 재위) 출생
▶ 1185년 일본의 제81대 천황 안토쿠 사망
▶ 570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출생
https://youtu.be/laKqmJePuS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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