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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자유 게시판◀ 스크랩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발전 과정 그리고 전망
갈대바위 추천 0 조회 258 13.08.15 22:1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현대 오순절 운동


  현대 오순절 운동은 1901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마치 초대교회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 강림의 역사처럼, 다른 방언이 따르는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역사적인 날로 생각한다. 

  현대 오순절운동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경륜」속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에베소서 1:10을 보면, “때가 찬 경륜”이라는 말은 막 1:15의 “때가 찼고”, 갈 4:4에 “때가 차매”라고 했다. 여기 “때가 찬”(the fullness of the times)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 될 수 있는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오이코노미아는 ‘신적인 계획’ 또는 ‘하나님의 계획의 이행’라고 했다. 그러므로 “때가 찬 경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결정적인 시점이 되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집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축복을 주실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그 목적의 성취는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성취되어지며, 하나님의 성취목적도 그리스도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는 통로도 교회이다 (엡1:23).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을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교회에 부어주셔서, 교회를 통하여 그의 목적을 성취케 하셨다. 20세기 초에 오순절 성령을 부어주지 않았다면, 인간의 이성을 앞세운 자유주의신학과 성경의 권위를 여지없이 땅에 내동댕이친 황금만능의 번영,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 인간의 지식…등으로 교회는 완전히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셨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오직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의 역사만이 이 시대 속에서 교회를 세우고, 회복하며, 세상을 구원해 갈 수 있음을 아셨던 것이다.


1. 정통 오순절 교회(Classical Pentecostal Church)

  정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s)는 1960년대부터 기존의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서 일어난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 혹은 카리스마운동(은사운동)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순절 부흥운동과 연관이 있는 교단들을 가르치고 있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의 독특한 교리는 성령세례로서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glossolalia)이라고 믿고 있다.

  카리스마운동자들은 신앙과 삶의 근거를 고린도전서 12-14장(은사운동)에 두고 있으며, 전통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1절-4절에 두고 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원형적(성경적)이며, 사도적(사도행전적)이고, 신약 기독교회의 신앙과 경험과 삶들과 우선순위들에게 동등하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초대교회 마가다락방의 신자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회심의 순간 또는, 그 후에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현상이 일어나는 종교적 경험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전통 오순절운동에는 특이한 몇 가지가 있다.


  ①오순절운동에는 창시자라고 지목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

1906-1908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아주사거리(Azusa Street)에서 일어났지만, 오순절 부흥운동이 전 미국과 세계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면서, “오순절운동은 두드러진 인물이나 지도자에 기원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듀플레시스 (David Du Plessis)는 일세기 교회처럼 20세기의 오순절운동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셨고, 이끌어 가신 성령의 지도력(Leadership)을 강조하고 있다.

  ②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오순절운동이 어떤 특별한 지도자나 교단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③성령 안에서 연합(Pentecostal ecumenism)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이 교리나 교회 정치를 강조하지 않고, 경험을 강조하다보니 교리와 교파적 개념을 뛰어넘게 되었다.

  ④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을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신념이 있었다.

  첫째: “성령세례의 신적인 목적은 증거와 봉사를 위하여 능력의 입힘을 주셨다”는 것과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전 천년 재림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신 종말론적인 강한 믿음이었다.

  둘째,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복음적인 열정이 있었다.

  셋째, 초기 오순절 선교사들이 자원하여 복음을 증거 할 때에 초자연적인 역사가 더해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통오순절주의자들의 강한 신념과 열정과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20세기의 세계 선교의 경이적인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정통 오순절주의는 다음과 같이 교리적인 차이로 분류할 수 있다.

  1) 침례적 오순절주의(Baptistic Pentecostals)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 또는 「케직(Keswick) 오순절주의」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감리교 성결 정통 노선을 따라서 완전한 성화 교리를 주장함으로써, 회심 또는 중생 후에 완전한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 그 후에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 침례교 목사인 더함(William H. Durham)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사역’은 죄의 용서만 위한 것이 아니고, 신자들의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을 걸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편 성결운동은 요한 웨슬레(John Wesley)의 성화 개념에 따라 회심, 즉 신생(중생)후에도 부패한 죄 성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 “내재적 죄”는 두 번째 은총으로 뿌리가 뽑혀야 죄의 사슬이 완전히 벗겨진다고 하는 “완전한 성화” 또는 “성령세례”라고 보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부흥사들, 특히 개혁신학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세례의 목적을 “죄의 근절”에 두지 않고 “봉사와 사역을 위한 능력 부여”에 두었다.

  개혁 주의적 케직 운동의 주장을 따라온 오순절운동자들은 “케직” 오순절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선구자인 파함(Charles F. Parham)과 시무어(William J. Seymour)는 감리교 성결 정통 노선을 따라서 완전한 성화 교리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회심, 또는 중생 후에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 ,그 후에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침례교 목사인 더함(William H. Durham)은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이라는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사역’은 죄의 용서만 위한 것이 아니고, 신자들의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을 걸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19세기 후반개혁신학 전통을 따르는 부흥사들, 특히 개혁신학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세례의 메도디스트적인 요소를 누르고 “봉사를 위한 능력 부여” 쪽을 선택하였다.  또한, 케직(Keswick) 운동의 교사들인 무디(D.L. Mood), 토레이(R.A. Torrey), 마이어(F.B. Meyer), 개혁교회 목사인 머레이(Andrew Murray), 침례교도인 (몰간(G. Campbell Borgan), 순복음(Full Gospel)의 주창자 심슨 (A.B. Simpson), 그리고 오순절운동의 선구자로서 침례교 목사인 고든(A.J. Gordon) 등은 성령세례의 목적을 “죄의 근절”에 두지 않고 “봉사와 사역을 위한 능력 부여”에 두었다.  이러한 개혁주의적 케직운동의 주장을 따라온 오순절운동자들은 “케직” 오순절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성회는 교리적으로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이면서, 또 한편 침례교의 개혁주의적이고, 즉 삼위일체주의자이면서 비웨슬레주의이다. 신학적 노선은 근본주의적인 복음주의적이다.

  오순절 하나님의 교회(Pentecostal Church of God-PCG)도 완전주의자들의 “두 번째 경험”의 교리를 배제하고, 성화를 구원의 경험에 포함시키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침례적 견해를 따르고 있다. 국제 사중복음교회(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 : l_ICFG)는 여류부흥사 멕퍼슨(Aimee Semple McPherson)에 의하여 세워졌다. 멕퍼슨은 1909년 시카고에서 더함(William H. Durham)에게 은혜를 받고 함께 사역하다가 1919년 하나님의 성회에서 부흥사로 목사임직을 받았다. 그녀는 1922년 겔1:4-10에서 “사중복음”이라는 영감을 받고 심슨(A.B. Simpson)의 사중복음인 예수그리스도는 “구원자” “성화자” “치료자” “재림의 왕”에서 두 번째인 성화를 “세례자”라고 바꾸어 사중복음을 “오순절화”시켜 놓았다.


2) 웨슬리안 성결 오순절주의 (Wesleyan Holiness Pentecostals)

  19세기 미국 감리교인들 사이에서 나타난 성결운동은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를 경험한 후에 신자에게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죄를 이기게 하여 성별케 하는 순간적인 “두 번째 위기의 경험”인 성화(sanctification)를 가르쳤다.

  웨슬레 성결 오순절주의의 시발점이 된 어윈은 플레처의 ‘완전한 성결의 경험 후에 오는 불타는 사랑의 세례’라고 하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 「불세례」라고 불리는 세 번째 축복인 성령세례를 주장하였다. 이 사상을 1901년 토페카부흥의 지도자 파함(C.F. Parham)과 1906년 아주사거리 부흥의 시무어(W.J. Seymour)가 그대로 전수하여 첫 번째 은혜는 회심이고, 두 번째 은혜는 마음을 정결케 하는 완전한 성결이고, 세 번째 은혜는 방언으로 증거 되는 성령세례라고 주장하여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 : CGC)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흑인 오순절교단 중에 하나다.


  마슨(Charles H. Mason)은 신유와 귀신이 쫓겨나가는 체험을 한 후에 존스(C.P. Jones)를 만나 함께 1897년에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창설하게 되었으며, 1906년 로스엔젤레스의 부흥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찾아가서 5개월 동안 머물면서 최초의 증거인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

클리브랜드(Cleveland, Tenn.)에 본부를 둔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 CG)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오순절 교단중의 하나다.

  CG의 교리는 두 개의 교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오순절 완전주의 그룹과 똑같다. 그 두 가지란, 첫째는 주의 만찬의식 가운데서 성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고, 둘째는 개인적 성결을 위하여 성도들이 몸의 장식을 위하여 장신구를 입는 것을 금하는 등 26가지 가르침을 예시하는 극단적인 해석이다.

 

  3) 단일성 오순절주의(Oneness Pentecostals-OP)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이들은 “오직 예수”오순절주의라고도 부른다.

에와트(Frank Ewart)는 제2차 AG총회에 참여하여 “새로운 발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단일성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삼위일체를 신봉하는 지도자들은 1916년 제4차 총회에서 『근본진리 선언』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 공포하게 되었다.


2.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

  오늘날 “카리스마틱”(Charismatic) 이라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12장 8절-10절에 나와 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표현하는 "Charismata"에서 온 말로서 오순절적 경험을 강조하여 표현한 말이다. 그러므로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란 원시 기독교회의 부흥을 갈망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실행하며, 방언을 말하는 교회와 신학들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정통 오순절주의의 교리를 따르거나 그에 속하기를 바라는 모든 오순절주의 형태의 기독교회를 표현하는 말이다. “신오순절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루벤 로레스(Ruben Lores)는 미국 오순절 성령운동을 연구하고 난 후에 오순절 운동을 “정통적 오순절 주의”(Classical Pentecostals), "개신교 오순절주의“(Penteprotestants), "카톨릭 오순절주의”(Pentecatholics)로 분류하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교회가 탄생할 당시 … 성령께서 각 나라의 방언을 주신 표적은 그때 당시에 한 번 주어졌다가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한 “은사 중지로”는 지금까지 기독교계의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또한 칼빈(John Calvin)도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라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는 초대교회와 함께 종료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20세기 초기의 뛰어난 보수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도 “이적인 은사들의 기능은 분명히 사도교회를 특징짓는 것으로서 사도시대의 교회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도들이 죽은 후에는 이런 초자연적인 은사들도 필연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1970년대 이후로는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로마 가톨릭 안에 전통 오순절주의와 같이 방언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는 것은 수용하지 않으나 현대에도 성령의 은사가 역사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은사 중지론”의 신학을 거부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 은사운동의 기원

  (1) 신유 부흥사들의 활동

  20세기의 미국인들 사이에는 항상 신유 부흥사들이 흥미를 끌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존 도위는 영, 혼, 육인 전 인격을 구원하는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여 초기 오순절주의 부흥사들과 많은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전인 구원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축복 중에 하나로서 모든 신자가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로 부흥운동을 이끄는 중심주제가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구원-신유 부흥사들인 브랜함, 오랄 로버츠, 린드세이, 오스본등을 통하여 육체의 치유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이들 부흥사들은 교리적으로 한결같이 오순절적인 메시지를 전하므로 “성령세례”의 신앙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랄 로버트 목사는 오순절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TV 매체를 통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하였다.


   (2) 순복음 실업인 연합회(Full Gospel business Men's Fellowship Internaltional)의 활동

  오순절 신앙인들 가운데 194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낙농업으로 크게 성공한 오순절 사업가 샤카리안(Demos Shakarian)이 초교파적인 「국제순복음실업인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어느 날 기도를 하다가 세상에서 죽어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바꾸어주는 비전(Vision)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순복음의 소리』라는 잡지를 만들어,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를 하였다.   협회는 계속해서 성장하여 60년대 중반에는 10만 명의 회원 불어났고, 70년대는 30만 명으로, 88년도에는 87개국에 3,000개의 지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3) 오순절교회의 급성장

  로마 가톨릭교회의 학자 담보리에나(Prudencio Damboriena)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성결-오순절운동이 발생한 근본적인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교회들이 “참 신앙”에서 분명히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교회들이 다윈의 진화론, 칸트의 이성론,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종교, 브쉬넬의 기독교 양육설,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 등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성 교단들이 죽은 형식주의를 따랐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회 안에 만연된 세속화 때문이다.

  넷째는 단순한 지식과 대외적인 직업에 의하여 개인적 신앙생활이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단적 패권주의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개혁 사항들의 승인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담보리에나가 예리하게 지적해 준대로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깊은 영적 중병에 걸려서 기독교의 신앙은 비신앙화 되어갔고, 예배와 삶은 점점 더 경직화되고, 세속화까지 겹쳐서 교인들은 교회생활의 맛을 잃어버려 멀어지고 떠나게 되므로, 교회는 점점 교인 감소 현상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오순절주의 교회들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교인들이 몰려들고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오순절교회 성장의 대표적인 것이 70만 명의 교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다.


  (4) 듀플레시스 (David du Plessis)의 영향

  듀플레시스는 프랑스 위그노(Hugenots)의 후손으로 남아프리카에 피난 온 사람으로, 그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오순절주의 교회인 사도 신앙선교회에서 회심하고, 총회장까지 지냈다.

  그의 에큐메니칼을 위한 활동으로 인하여, 역사적 교회들에게 오순절운동에 대하여 폭 넓은 이해를 심어주게 되었고, 천주교회에 카리스마 갱신운동이 일어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2) 프로테스탄트 은사운동(Protestant Charismatic Renewal)

  루터교회 목회자인 브레데센(Harald Bredesen)은 1946년 오순절 캠프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교회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그대로 머물면서 성령세례를 증거 하여, 기존 전통교회 안에서 은사갱신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팻 로버슨(M.G,(Pat) Robertson), 세릴(J. Sherrill), 팻 분(Pat Boone)과 성령세례를 경험하는 중요한 오순절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하였다.

그는 1963년에는 “신오순절주의”라는 말에 대조하여 “카리스마틱 갱신”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신오순절운동이 표면화 되게 하고 확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캘리포니아 반 누이스에 약 2천6백여 명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는 「성마가 성공회」의 신부 데니스 베네트였다.

  반 누이스(Van Nuys)의 「성 마가교회」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을 통하여 은사운동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 일이 추진되게 되었다.

  첫째는 베네트(Dennis Bennett)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전통적 교회 속에서 공식적으로 오순절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성 누가교회」는 성령세례의 말씀을 세계의 중요한 교단들에게 확산시키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진 스톤(Jean Stone Willlans)를 통하여 신오순절 운동의 첫 번째 조직인 「복된 삼위일체 협회」가 조직된 것이다. 그녀는 일찍이 성령세례를 경험한 「성 마가교회」의 평신도였다. 그녀는 1960년 BTS를 자기 집 거실에서 조직하고, 성령세례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하였으며, 그곳에서 친교와 교육과 전도, 그리고 수많은 전단지와 팜플렛을 인쇄하는 곳이 되게 했으며, 1961년에는 정기 잡지 『드리니티』를 간행하여 성령의 새로운 역사에 대하여 증거 하는 역할도 하였다.

  진 스톤은 신오순절주의가 보여 준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방언을 받는 과정이나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즉 공중 집회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인 방언사용을 더 중요시 여겼다. 성직자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욱 방언을 중요시하였고, 이들은 체험보다는 성경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 교회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방언을 하되 너무 방언에 치중해서도 안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엄격히 따르는 가운데서, 더욱 질서 있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다.

  1950년대에 성령세례의 방언과 신유를 경험한 옥터라 장로교회의 목사 브라운은 후에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돌아서서 복음적 은사주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순절적 경험 때문에 교회를 떠나려 할 때에, 오순절운동의 지도자 듀플레시스가 ”당신의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그곳을 갱신시키라“는 충고에 따라, 장로교회에 그대로 머물면서 토요 오순절 집회를 개최하여 미국에서 가장 큰 은사 기도회를 만들었다.


  「연합장로교회」 제180차 총회(1968)에는 “방언, 신유, 축귀, 신오순절운동”에 대한 신학연구 문제가 상정되었다.  제 182차 총회(1970)에서는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은사 중지설”을 거절하고 「연구보고서」내용을 채택하여 은사운동을 허용하게 되었다.

  영국에서의 은사갱신운동의 자각은 1960년대 초에 휴즈(Philip E. Hughes)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베네트를 방문한 것과 듀플레시스가 영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은사 갱신운동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인 미첼 하퍼(Michael C. Harper)가 1962년 성령의 세례를 받고 방언의 은사를 경험한 후에 은사 갱신운동을 촉진시킬 목적을 「분출하는 확신」이라는 단체를 조직,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다음의 네 가지 목적을 세웠다.

  첫째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둘째는, 은사적이다.

  셋째는, 협력적이다.

  넷째는, 온정을 베푸는 것이다.


  3) 로마 가톨릭 은사운동(Catholic Charismatic Renewal)

  오순절운동에서 가톨릭 오순절주의가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황 23세는 1세기 동안 중단되어 있던 공회를 “교회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창문을 열어야 한다”는 목적을 걸고, 1962-1965년까지 로마에서 소집하였다. 세계에서 모여온 2500명의 주교단들은 ‘교리를 변경하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새로운 개혁”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으며, 교황은 전 세계 교인들에게 “새로운 오순절”을 위하여 공회 기간동안 매일같이 기도하라고 당부하였다. 여기에서의 첫 번째 결정은 가톨릭교회가 교회일치 운동에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오순절주의 형제를 수용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에 영적 갱신의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두 번째 결정은 “영적 은사들은 교회생활에 적당하고 유용한 것이기에 감사와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고 결정하므로 은사 갱신운동을 수용하는 길로 간 것이다.

  세 번째 결정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든 평신도들도 성직자들과 동등하게 나누라”는 영적 갱신운동에 성직자보다 평신도들이 책임 있게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오순절 성령의 경험은 어느 특정한 교파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 현상은 역사적 프로테스탄트, 영국 국교회,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를 망라하여, 전 기독교의 현상이 되었기에 이제는 교회적, 또는 교단적 의미는 없어지고 동등하게 되었다. 오직 다른 것은 각 교단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것들의 불일치만 있을 뿐이다.

  마침내 1972년에 하나님의 성회 실행위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세계에서 행하는 것들은 우리들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여 Charismatic Renewal을 인정하게 되었다.



◆ 현대 오순절운동으로의 도화선


  20세기의 오순절주의와 카리스마 부흥운동은 오순절 날 이후 가장 큰 영적각성운동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 증명 되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5억3천이 넘는 오순절 ? 은사주의의 숫자적 성장을 보면서, 더욱이 오랜 전통에 메어 문을 열지 않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문호를 활짝 열고, 오순절 신앙과 교회 갱신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어떤 영적각성운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업적을 남긴 것을 알 수가 있다.

  미국에서 오순절운동이 일어난 문화적, 종교적 요인들을 노르웨이 역사학자인 블로흐 호엘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오순절 운동이 일어난 것은 미국인의 교회생활을 그르치는 다양한 특성들 때문이  다. 미국 기독교회는 전반적으로 틀에 박히지 않고, 의식적이지 않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미국인들 생활 속에는 종교적인 것을 관용하고 여러 교단들을 쉽게 수용했는데, 이것이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 번영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했다.

  셋째는, 미국인들의 독특한 생활 형태로 그들은 자발적으로 단체를 만들어 열정적인 신앙 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오순절운동을 쉽게 일어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부흥운동에 뛰어들어 열심히 전도했다.

  넷째는, 미국인의 개인주의의 풍조가 개척자들을 생산하기도 하고,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다섯째, 19세기에 만연된 낙관주의가 종교와 윤리적 사상에 큰 영향을 주어서,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여섯째, 미국 산업의 변화와 거대한 이민은 정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사람들로 인하여 쉽게 오순절주의와 연결되어,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일곱째, 깊은 종교의 영향을 받은 미국 사회의 철저한 민주적인 특성이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여덟째, 산업 사회의 계급적인 편견 구조는 오순절운동을 일으키는 원인 작용을 했다.

  아홉째, 제도주의, 세속주의, 미국교회를 가장 크게 위협한 현대주의가 오순절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순절운동은 당시 교회의 경계를 쉽게 넘을 수 있는 범 교단적인 부흥운동 때문에 여러 교단의 교인들 사이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 케직 운동(Keswick Movement)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 성결운동의 부흥사들이 영국 교회를 자주 방문하면서 자연히 성결과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보스만(W. E. Boardman)의 『더 높은 크리스챤의 삶』과 스미스(Robert P. Smith)의 『믿음을 통한 성결』, 『빛 가운데 걸어감』, 또한, 그의 부인 한나 스미스의 『행복한 삶의 기독교인의 비밀』의 영향으로 크리스챤의 고귀한 삶을 위하여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1973년도에 스미스와 보드만은 영국에 있으면서 “고귀한 삶”을 추구하기를 원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끌어들여 모임을 갖다가 마침내, 1874년 옥스퍼드에서 「성서적 성결운동을 위한 연합회」를 결성하고, 성결모임을 개최했을 때에 8,000여명이 운집하게 되었다.

  케직 지도자들 가운데는 다비(John N. Darby)의 형제단, 성공회, 칼빈주의 침례교인, 장로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통 성결운동에서 주장하는 ‘성화와 성령세례를 하나 또는 같은 경험으로 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성령세례는 세계 복음화를 신속히 이루기 위하여 신자들에게 부어주시는 특별한 능력으로 두 번째 오순절로 가는 경험으로 보았다.

  케직 운동의 가르침과 교사들은 현대오순절운동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2. 제 3의 축복 불세례(Third blessing-baptism of fire)

  웨슬레는 그의 사상의 기본 주제라 할 수 있는 구원론에서 은혜의 두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죄에서 구원받아 의인되는 중생의 체험과 죄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받는 완전한 성화의 체험이다.  불세례성결교회 사람들은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는 최초의 증거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성령세례를 성화에서 또는, 후에 오는 경험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오순절부흥운동을 시작한 파함에게 영향을 주어, 파함은 그의 『사도신앙』잡지에 “불세례”교리를 게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불세례성결교회는 현대오순절운동에 교리적, 사회적, 지적인 면에서 직접적인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3. 도위의 시온운동(John Dowie's Zion Movement)

  도위(John A. Dowie, 1847-1907)는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13살 때에 호주로 이민을 가서 성장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국 에딘버그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1872년 호주의 회중교회의 청빙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시드니 교외 뉴턴에서 목회를 하면서, 치유 은사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해 나갔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신유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므로, 당대에 가장 유명한 신유의 사도가 되었다.

  도위는 자신의 신유 사역은 마태복음 4:23절과 9:35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방일 뿐이라고 강조하였으며, 마태복음 8:16-17절에 그리스도께서 “병든 자를 모두 고치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였듯이, 우리의 질고도 담당하셨기 때문이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병을 고친다고 했다.

  그는 신유 사역에서 두 가지 전제조건으로 내거는 주제가 있었다.

  첫째는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그의 능력과 뜻은 변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질병은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원수요, 마귀의 역사로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원수의 능력-악의 사슬-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영도 육체도 구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죄는 질병과 죽음과 피할 수 없는 지옥의 원인이며, 성결은 건강과 영생과 영광스러운 천국의 원인이기에, “먼저 신유를 기도하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 하고, 성결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원시 사도시대 기독교의 완전한 회복을 주장하면서 이 종말의 때에 영적 은사들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었으며, 신유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교회의 원형의 모습을 회복하는 사도 신앙의 비전이 자신들을 통하여 회복되고 있다고 가르치므로, 오순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모든 오순절주의 신유부흥사들은 병자 치유사역의 뿌리를 도위에 두고 있다.


   4. 웨일즈 부흥(The Welsh Revival)


  1904년에 일어난 웨일즈 부흥은 오순절주의 기원을 이루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 오순절운동과 미국 아주사거리 오순절부흥 등 각 지역의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데 직접적인 동기 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부흥은 1903년 뉴키(New Quay)에 있는 죠셉 젠킨스(Joseph Jenkins)목사가 섬기는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이 없어 갈등을 하던 에반스(Florrie Evans)양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자, 이 말에 온 회중들이 깊은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 성령이 임재하게 되었고 ,형용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의 임재는 더욱 그들 가운데 강하여 임하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웨일즈 부흥의 두드러진 특징은 설교도 없고, 순서도, 찬송가집도, 오르간도, 헌금도, 광고도 없이, 성령 안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개방적인 집회로서, 과거의 틀에 박힌 종교 형식을 탈피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로 인도하였다. 그들은 오래도록 찬송하고, 온 청중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성령 세례의 체험과 인도하심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모든 기도와 언어 속에 성령의 인격과 역사하심이 강하게 일어났고, 기도와 설교 속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하고, 황홀한 언어인 방언을 말하였다. 웨일즈 부흥의 설교자들은 이는 마지막 때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는 요엘2장 28절의 예언의 성취라고 보았다. 영국의 부흥사 몰간도 “일점의 의심도 없이, 이것은 오순절의 연속이다”라고 평가하였다.




  ◆ 오순절운동의 폭발


  지난 1세기 동안 전 세계 교회를 폭발적으로 부흥시킨 오순절운동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북미 흑인들과 부흥운동가들의 헌신적인 사역이 있었기에 일어난 것이다.

  북미 교회의 부흥은 1734년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지역에서 일어난 대 각성운동으로 18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였다.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ewards)가 1734년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설교를 증거 할 때에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고,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전 도시에 충만하듯이 역사하였다. 1740년 영국에서 조지 휫필드가 오면서, 부흥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신앙적 각성뿐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적 간섭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국가적 각성도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1775-1782년까지 7년 동안 독립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때 제 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제 2각성운동은 1801년 켄터키주 케인 릿지에서 맥그래디(James McGready)와 맥기(John McGee)의 인도에 따라 천막집회가 열리면서, 강력한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다.


  또한 1858년에 일어난 각성운동도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857년 9월에 뉴욕시 선교사로 파송 받은 랜피어는 6명으로 「매일 밤 기도모임」을 시작했는데 삼주 후에는 40명의 지도자가 생기더니, 1858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서, 범 교단적 기도모임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그들의 모임은 어떤 의식이나 준비된 계획이 없이, 어떤 사람이든지 일어나서 기도하고, 권고하고, 찬송을 인도하든지 간증을 하였다. 또한 성령 강림을 위하여 금식과 기도를 매일같이 했다. 그들 가운데는 교파적 간격이나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의 간격도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회심 자들이 생겨서 오르(Edwin Orr)는 이 부흥운동을 일백만 명가량이 회심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했다.

   어느 시대든지 부흥운동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달라”는 기도 모임이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기도만이 영적 부흥의 밑거름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오순절 부흥운동은 19세기의 각성운동과 성결운동의 배경 가운데서 신유운동과 전 천년재림운동과 사도 신앙운동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 운동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1. 토페카 부흥(Topeka Revival)

  방언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라고 믿는 오순절 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은 캔사스주 토페카시에서 성결운동을 하던 파함(Charles F. Parham) 목사를 통하여 일어났다.

  파함을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하는 기조를 그가 처음으로 놓았기 때문이다.

  파함은 어린시절부터 늘 병약한 몸으로 고통과 죽음의 위협을 받고 성장의 장애를 겪으며 자라왔다. 1891년 류마치스 열병을 앓으며,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또한 신유의 교리를 확신하여 치료받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그는 성결운동의 신학에 매료되고, 또한 자신의 병이 치료받는 신유를 경험하면서, 1895년 감리교회 목회 직을 사임하고, 독립적으로 성결운동을 전개하는데 헌신하게 되었다. 그는 캔사스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신유를 강조하는 성결 메시지를 전하였다. 1898년 토페카로 이사와서 그는 시카고 시온시의 도위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로, 「벧엘 치유의 집」을 개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육체적 영적 문제를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진료소, 신학교, 입양소, 직업소개소까지 열었다. 또한 성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사도신앙』이라는 잡지도 출간하였다.

  그는 성령이 부어질 때에 한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재림 때에 세계적인 부흥을 가져오는 것이며, 마지막 때에 사도 적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같게 되었다. 그래서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는 토페카에 돌아오자마자, 그해 10월에 벧엘 성서학교를 개교하고 샌포드의 방식을 따라서 학교를 운영하고자, 오직 하나의 교재인 성경만 가지고, 선생도 오직 한분이신 성령을 의지하여,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면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는 “아무리 격식에 맞지 않고 비현실적인 것같이 보여도,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철저히 포기하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서 학생들을 함께 기숙시키면서 등록금도 받지 않았다.

  그는 학교 커리큘럼을 아주 단순하게 세 가지 일정으로 이끌었다.

  첫째는 모든 학생들에게 연구할 한 가지 성경적 주제를 주고, 함께 귀납적 접근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

  둘째는 “기도 타워”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실천 사역으로 토페카시 전역을 다니면서, 가정 방문하여 전도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가을학기 동안 회개, 회심, 성화, 신유, 그리스도의 재림의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 파함은 역사의 마지막 시대의 표적으로 주어지는 사도적 능력인 성령세례의 증거가 성경적으로 무엇인지, 또한 성령세례가 성화인지, 또는 “내주의 기름 부으심”인지, 세례의 참 뜻을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가을학기를 마치고 학생들에게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의 성경적 증거는 무엇인지 연구하도록 과제를 주었다. 학생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오순절적 축복이 임한 사도행전의 각 경우를 살펴볼 때에 “성령세례의 성경적 증거는 다른 방언”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함과 학생들은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 이것만이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신비한 사도 적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으며, 1901년 1월 1일 저녁 7시에 신년을 맞이하여, 찾아온 75명과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며 오순절의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곳에 가득하게 되어 파함 목사가 성령 받기 위하여 머리에 안수 할 때에 오즈만(Agnes N. Ozman)양이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초대교회의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속하여 기도하다가 1월 3일에는 파함 목사와 다른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12명의 교역자들이 전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하여 파함은 방언이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적 증거였다는 자신의 명제를 세우게 되었고, 이것만이 사도의 신앙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의 교리적 가르침은 성결운동의 칭의, 성화, 신유, 전 천년 재림교리에다가 오순절운동의 독특한 교리인 다른 방언이 최초의 증거라는 성령세례를 더하게 되었다.


  토페카의 역사는 바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초대 오순절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기에 “참 성경적 기독교”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파함은 칸사스 시 주변에 있는 도시들이 “하나님의 임재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사도 신앙” 밴드를 만들어서 1901-5년까지 중서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도 신앙 회복과 오순절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1905년 겨울동안에는 파함의 부흥집회의 영향으로 미조리와 텍사스주에 걸쳐 약 25,000명의 오순절 신자와 60여명의 설교자를 얻게 되어, 그들은 후에 하나님의 성회 초기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칸사스, 미조리, 텍사스 주의 여러 도시에는 오순절 집회 장소들이 생기게 되었다. 부흥의 역사가 확산되고 많은 일꾼들이 생기자 결국 파함은 신학교를 개교하여 토페카에서처럼 가르쳤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 명의 미국 흑인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아줌마”로 불렀던 화로와 아주사거리 선교회의 사도 윌리엄 시무어, 테리 등 이었다. 테리는 휴스턴에 머무는 동안 성령세례를 충만히 받고, 로스엔젤로스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나중에 아주사거리 오순절 부흥운동이 폭발하는 연결 역할을 했다.



2. 아주사거리 부흥

  현대 오순절 운동이 실제적으로 폭발하여,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아주사거리 부흥의 결과였다.

  1905년 4월경에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케직 사경회 강사인 마이어(F.B. Meyer)가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웨일즈 부흥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청중들에게 설명하고 다녔다. 그로 인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웨일즈 부흥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기를 갈망하는 기도회가 여러 교회와 선교회들 사이에서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샤우(S.B. Shaw)의 책 『웨일즈의 대부흥』과 몰간의 팜플렛 『웨일즈의 대부흥』이 널리 읽혀지면서 부흥을 갈망하는 기도회는 더욱 뜨거워지게 되었다. 특히 침례교 목사인 스멜은 웨일즈 부흥 현장을 다녀와서, 교회에서 17주간동안 로스앤젤레스에 오순절의 부흥과 같이 성령의 부어주시는 역사가 오기를 기도하는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오순절적 은사와 표적을 구하는 “순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들이 100여 교회가 넘었고, “보다 높은 삶”을 추구하는 성결 모임들과 부흥을 갈망하는 기도회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므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1) 보니브레 거리(Bonnie Brae Street)

  1906년 2월 22일 파함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고, 파송 받은 시무어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산타페 거리에 있는 나사렛성결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주일 첫 번째 설교에서 사도행전 2장 4절을 펴놓고 방언을 말하지 않고는 참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설교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 자신을 방언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그는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는 파함의 견해를 확신하고 있었다.

  1906년 4월 9일 그날 저녁 Asberry의 작은 주택 거실에서 기도모임을 갖기 위하여, 에드워드 리(Edward Lee)의 집을 떠나기 전에 그녀의 남편 오웬 아이리쉬 리와 방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기도하는데, 갑자기 리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는 곧 한 사람 한 사람씩 성령세례를 받고, 마루바닥에 쓰러져 황홀경 속에서 방언을 하기 시작하여 7명이 오순절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애즈베리의 어린 딸 윌레라가 집밖으로 뛰쳐나가 두려워 떨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리에 퍼져서 많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성령을 받은 무어 자매는 지금까지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1906년 4월 9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오순절경험과 매우 유사한 역사라고 확신하고 있다.


  2) 아주사거리(the Azusa Street)

    1906년 4월 14일 그들은 아주사거리에 있는 옛 감리교회 건물을 빌려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날 온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하며 집회를 가졌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4월18일자에는 “괴이한 언어의 혼탁한 소리”라는 제목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토해내고, 이해할 수도 없고,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이론을 설파하는 한 종교 집단이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다 쓰러질 것 같은 통나무집에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떠들썩한 소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방언의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논평을 했다. 계속하여 그 집회 중에 어떤 사람이 본 비전과 예언을 이렇게 적었다.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이 지옥을 향하여 큰 물결로 떼지어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이 새로운 신앙의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도시에 무서운 파멸이 있을 것입니다” “무서운 파멸”을 예언한 바로 다음날 4월 18일, 로스앤젤레스 대신에 샌프란시스코에는 진도8.3의 대지진이 일어나 1,4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오순절주의자들도 지진과 아주사거리 집회와 연관시켜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여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야 할 것과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타당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 여파로 아주사 부흥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어 계속 열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집회에 수백 명, 어떤 때는 수천 명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가르부부는 자신들의 「불타는 여우꼬리 선교회」문을 닫고, 아주사 선교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세례를 받고, 곧 인도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 오순절 불을 붙였다. 1906년 9월에 그 부흥운동을 더 확산시키기 위하여, 시무어는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파함이 강조한 ‘신약 기독교의 경험을 회복하는 길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스승의 가르침과 운동의 이름까지도 그대로 『사도 신앙』이라고 하여 잡지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부흥운동의 기획자는 파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기에 파함의 가르침을 따라 ①회개, ②사도 신앙회복, ③믿음에 의한 칭의, ④은혜의 완전한 사역으로서의 성화, ⑤방언으로 증거 된 성령세례, ⑥구속 안에 있는 신유, ⑦그리스도 재림에서 성도들의 전 천년 휴거를 가르쳤다. 그는 오순절 성령의 경험을 종말론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이 가르침은 오순절의 뼈대가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는 두 번의 큰 절정의 기간이 있었다. 첫 번째 절정기는 1906-1909년까지로 아주사거리에서 시무어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의 역사다.

  아주사거리 부흥은 1909년부터 사람들의 참석률도, 놀랍게 나타나던 초자연적 역사들도, 시들어지면서 파당과 융통성이 없는 사업과 의식화 되어가는 집회로 인하여, 최초의 모습은 없어지고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뿐 아니라, 그 조직의 영광을 찾으므로 성령께서는 사역 속에 역사하지 않았고, 그의 영광이 떠나기 시작하여 1909년 말 에는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1-12년에 더함(William F. Durham)의 오순절 메시지로 인하여, 다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다. “완성된 사역”이라는 새로운 성결 교리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더함의 사역을 통하여 처음 아주사거리 선교회에서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와 이적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시무어 때보다 더 강력하게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3) 오순절 부흥의 확산

  아주사 부흥의 소식은 빠른 속도로 다른 교회와 전국으로 전파되면서 수많은 선교사, 부흥사, 교회 사역자들이 대 부흥의 역사를 보기 위하여 몰려와서, 회심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국가와 인종과 피부 색깔을 초월하여 참여했던,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오순절 경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자기 지방으로 돌아가서 오순절 진리를 확산시켜 나갔다.

  포스트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알려진 파사데나에 있는 신자들에게 오순절 메시지를 전하였고, 1907년에는 남아프리카, 잉글랜드, 웨일즈, 세일론 등을 여행하면서, 오순절 부흥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고 다녔다. 아주사 부흥회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던 바틀맨은 8th와 Maple street에 「오순절 선교회」를 세웠고, 이것을 물려받은 성결 캠프모임의 대중적 강사인 펜델톤은 성화의 경험 후에 오는 성령세례를 증거 하는 오순절 교회를 세웠다.

  국제적으로 오순절 진리가 빠르게 확산 된 것은 방언을 선교사 사역의 목적으로 주신 언어라는 신념을 가지고 선교사로 나아가 오순절 신앙을 전했기 때문이다.

  아주사거리(Azusa Street) 오순절 부흥운동의 중요한 역할은 성령세계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사(Azusa)를 현대 오순절운동을 일으킨 근원지와 같은 곳으로, 또한 여러 오순절 교단들이 생겨나게 만든 원천지로 보고 있다. 바틀맨(Bartleman)은 아주사 부흥은 “미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다.


  3. 시카고 부흥(Chicago Revival)

  시카고에서 초기 오순절 활동을 한 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성회의 초기 성장과 신학적 기반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가 두 개가 있다.

그것은 윌리암 파이퍼(William H. Piper)가 이끈 스톤 교회와 윌리암 더함(William H. Durham)이 인도한 북 선교회이다. 이들 두 단체는 초기 오순절 운동과 가르침을 전하는데 가장 넓게 영향력을 미쳤다. 비록 파이퍼와 더함은 하나님의 성회가 설립되기 직전에 죽었으나, 초기 오순절운동에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준 사람들이다.


  1) 파이퍼의 스톤교회

  Piper는 시온시에 있는 Dowie의 사도 신앙 회복운동에서 그 아내와 함께 치유를 경험하였다. 시온그룹 사람들이 오순절주의 교리로 나뉘어 질 때에 파이퍼는 오순절 가르침을 거절하는 입장을 취하였었다. 그러나 1907년 봄에 갑자기 600명의 교인 중에서 125명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 아픔을 겪으면서, 그는 교인이 줄어든 것보다 더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검토하기 위하여, 여러 날 간절히 기도하면서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하여 하나님은 참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순절 가르침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이퍼 목사는 시온그룹 출신으로서 오순절 사역을 하는 세 사람을 불러다가, 교인들에게 오순절 진리를 설명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많은 교인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게 되었고, 교회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스톤 교회는 오순절운동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교회가 되었다.

  스톤(Stone)교회는 1908년 10월에 『늦은 비 복음』이라는 월간 잡지를 출판하여 오순절 진리와 소식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특히 편집장인 Anna Reiff는 평신도로서 Evangel를 통하여, 스톤교회가 오순절 진리를 전파하는데 가장 돋보이고 성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더함의 북 선교회

  더함의 북 선교회는 해외 이민자들이 처음으로 정착하는 지역에 있었으므로, 여러 민족의 단체들과 쉽게 접하게 되었고, 또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과 접하다 보니, 교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이상을 이루어 가는데 가장 큰 장해물이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더함은 1906년 봄에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다”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아주사거리 부흥운동에 대하여 듣게 되었고, 주위에 있는 몇 명의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사도 신앙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모든 신자는 사도행전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더 깊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1907년 3월 2일 아주사거리 미션에 참석했다가, 성령께서 그곳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물결치는 것을 경험하였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보았다…성령께서 완전히 지배하시는 것 같았다. 내 영혼은 주님 앞에 녹아지고 말았다. 찬송 한 장을 부른 후에는 능력과 영광의 물결이 그곳을 휘몰아쳤다. 나는 성령께서 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마침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경험한 더함(Durham)은 시카고로 돌아와서 놀라운 오순절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의 교회를 세계 오순절 운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여 빠른 속도로 오순절 진리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신유의 이적들이 일어났고, 그의 뛰어난 설교를 들으려고, 1,000여명이 몰려와서 성령세례를 갈구하므로 오순절부흥의 불길은 더욱 강력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파함(Parham)과 시무어(Seymour)가 가르치는 성화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발견하고는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the finished work of Calvary)이라는 교리를 전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성결운동은 웨슬레가 가르치는 성화, 즉 회심의 경험과는 별개로 “완전한 성화” 또는 “기독교인의 완전”의 순간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 성화”를 “성령세례”의 동의어로 보았다. 성결운동의 초기 회원이었던 파함과 시무어도 웨슬레의 견해를 따라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는 은혜의 세 번째 사역으로서 성화의 삶을 위하여 입히는 능력의 은사라는 수정된 교리를 가르쳤다.

  이에 대하여 더함(Durham)은 웨슬레의 완전 성화 사상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의 갈보리에서의 완성된 사역은 단지 죄의 용서만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화를 위해서도 사역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화에 대하여 중생 때에 이미 받은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더함의 성화는 회심 후에 일어나는 은혜의 즉각적인 두 번째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의 은혜가 적용되어 점진적 과정을 통하여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와 점진적 성화에 대한 더함의 설교는 당시 수많은 오순절 성도들에게 지지를 얻었고, 성령께서는 강력하게 그 자리에 임재 하여 역사해 주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와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더함은 1910년 시카고에서 열린 오순절 대회 때에, 자기의 견해를 처음으로 공포하자 큰 논쟁이 일어났다. 성결 오순절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더욱 파함의 반대는 거셌다. 감리주의자들과 웨슬레주의, 자유의지 침례주의자와 많은 성결그룹과 사도 신앙그룹, 하나님의 교회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함의 견해는 폭넓게 지지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파함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더함의 “완성된 사역” 가르침에 동참하게 되었다.

  사실 더함의 견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한 성화의 경험이 없이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4. 동부지역 부흥(Revivals in the East)

  많은 현대 오순절 그룹들이 토페카와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미래의 하나님의 성회에 영향을 미친 오순절부흥운동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뉴욕에 있는 로체스터 부흥과 심슨의 기독교선교사연맹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다. 특이한 것은 이 부흥운동의 초기 관계자들이 거의 하나님의 성회의 해외 선교의 몫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1) 로체스터 부흥(The Rochester Revival)

  엘림(Elim)으로 널리 알려진 뉴욕 로체스터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감리교 목사인 던탠의 다섯 딸들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났다.

  그녀들은 뮬러(George Mueller)의 『신뢰의 삶』을 읽으면서 받은 영향에 따라 자신들도 『신뢰』라는 월간지를 출간하여 배포하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어느 때는 믿음의 집과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음식과 연료와 돈이 부족할 때에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운영해 나아갔다. 그러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이적들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1904년부터 웨릴스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에 대한 보고를 들으면서, 자신들 가운데에서도 그와 유사한 부흥의 각성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기도하던 차에 Azusa거리 부흥의 소식을 듣게 되어,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함을 느꼈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뜨거운 갈망의 마음이 일어남을 깨달았다.

  1907년 하기수련회를 위하여 오랜 시간 기도로 준비하게 되었고, 마침내 수련회에서 오순절 진리를 전하는 강사를 통하여 사도 신앙의 메시지를 듣고는 그녀들은 “늦은 비”의 새 시대가 도래 하였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새 일을 행하시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엘림의 사역은 곧바로 철저한 오순절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순절운동은 언어의 회복이 아니라 “오순절의 회복…즉 사람들이 타락시킨 교회를 하나님이 디자인한 원래 계획대로의 교회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CMA를 설립한 심슨(A.B. Simpson)은 부흥 설교자로서, “깊고 높은 크리tm챤의 삶”을 위한 성결 선구자로서, 세계 선교의 기획자로서 종말론의 이론가로서, 신학의 통합자로서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축은 부흥과 해외선교였으며, 그의 신학의 중심은 “사중복음”으로서 그리스도를 구원자, 성화자, 신유자, 재림의 왕으로 높이는 것이다.

  특히 그의 성화 교리는 개혁복음주의 , 또는 케직과 무디와 고든이 따르는 점진적 성화를 주장하였고,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별도로 복음 증거를 위하여, 믿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 입힘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전 천년주의를 따라서 그리스도 재림 전에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해외선교를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심슨에게 있어서 성령세례는 세계 복음화를 위한 열정을 얻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받아야 할 능력 입힘이라고 보았다.

  오순절 세례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미 사도 신앙의 견해를 같이 하고 있는 연맹의 다른 사람들도 연결시켜서, 오순절 신앙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여 오순절세례를 받게 만들었다.


   5. 동남부지역 부흥(Revival in the Southeastern)

  미국 남캐롤리나(Wouth Caorlina)의 성결운동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파이크는 『믿음의 길』이라는 정기 주간지를 통하여, Azusa에서 일어난 오순절 부흥의 소식을 게재하여 널리 알렸다.  이 기사를 본 북캐롤리나의 성결교회 목사 캐쉬웰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영혼의 갈급함과 성령께서 자기를 오순절로 인도해주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1906년 11월 돈을 빌려 Azusa Street 선교회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6일 동안 금식과 기도를 했다. 그는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니, 자신은 백인 남부출신인데 아주사 선교회에 다른 인종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거부감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거리낌을 극복하고,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시무어에게 기도와 안수를 요청하게 되었다.

  동부지역의 오순절운동은 장차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가 설립되는 모판(母板)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성결 오순절운동의 부흥 역사도 동남부 지역에서 일어나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오순절 운동은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게 확산되어 나갔다. 다른 기존 교회들은 침체되어 가고 있었으나, 오순절운동은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AG 총회장이었던 짐머만(Thomas F. Zimmerman)은 초기 오순절 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웨일즈 부흥의 지도자 에반 로버츠는 성경에 제일의 우선순위를 두고 사역을 했다. Topeka 부흥도 벧엘 대학 학생들이 성경을 연구하다가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는 결론을 얻은 것에서 출발하였다.

  둘째는, 그들은 성령이 임했을 때에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은 대속적인 구속을 강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그들은 자유롭고 열광적인 예배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온 힘을 다 쏟아서 하는 전도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오순절 신앙인들은 어디든지 가서 누구에게든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열심이었다.



  ◆ 결론:  21세기 오순절운동의 과제


  “그리스도교는 로마에 入하여 異端, 異敎, 迫害를 막으려고, 통일을 힘쓴 결과”敎權中心의 宗敎“가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기독교의 제 1전기였다.

  이 교권중심의 종교는 암울한 골자기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때에 루터 칼빈 등이 성경을 들고 프로테스트···교회를 개정함에 미쳐서, 교권에서 “聖經中心의 宗敎”로 진전하였나니 이것이 기독교의 제 2전기였다.

  이 성경중심의 종교도… 생명을 잃어버리는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지면에는 流血과 不義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어찌하리오. 이제는 聖靈의 全能大功이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 될 때이니, 이는 設의 宗敎에서 「聖靈中心의 宗敎」로 進展하는 제 3전기이다.

  이 시대에 성령중심의 기독교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1. 오순절 운동이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1)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운동이었다.

  오순절 운동은 순식간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서,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로 확산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오순절 운동이 거의 모든 나라의 가장 큰 개신교회가 되었고, 칠레는 인구의 14%가 오순절 교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브라질에서는 모든 개신교회의 70%가 오순절 신앙인이 되었다.

   2) 오순절 운동은 교회갱신 운동이었다.

  오순절 운동은 그 세력의 급속한 성장뿐 아니라 기독교 예배와 메시지, 그리고 신앙인의 삶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 20세기 기독교회가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등에 오염되어, 너무나 믿음의 열기가 없는 형식적이고, 이지적이며, 기업적인 단체로 전략해 가고 있을 때에 오순절주의는 새로운 교회 갱신을 준 것이다.


  3) 오순절 운동은 선교 운동이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은 해외 전도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복음 증거를 위한 능력 부여로써 방언이 있는 성령세례를 받았고,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어야, 그리스도께서 전 천년 재림하신다는 뜨거운 신앙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토페카 부흥과 아주사 거리 부흥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비량하여 세계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국에 온 최초의 오순절 선교사 럼시(Mary Rumsey)양도 1906년 아주사 거리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자비량하여 한국으로 달려 왔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14년 창립하여, 그 해에 1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18년에는 73명을, 1987년에는 187개국에 1464명을 파송하였다. 1996년에는 147개국에 176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2억2천만 불이라는 엄청난 선교 비용을 해마다 지출하고 있다.


  4) 오순절 운동은 교회 성장 운동이었다.

  교회 성장 학자 Peter C. Wagner는 “오순절 운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폭발적인 교회성장률을 높이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회를 예로 들면 1955-56년 사이에는 296%, 1965-75년은 181%, 1975-1985년은 187%의 교회성장을 가져왔다.


   2. 오순절 운동에 나타난 여러 딜레마(Dilemma)들이 있다.


  오순절 운동이 지난 1세기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앞으로 21세기 오순절 운동이 식어지지 않기를 위해서는 지난 1세기를 보내면서 오순절 운동을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과거 교회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수 없는 운동들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또는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게 2:5)는 말씀처럼 오순절 운동의 불꽃이 꺼져버리지는 않을까 염려해 보게 된다.

  론 어쉬(Ron Auch)는 『위기에 있는 오순절주의』에서 오순절운동이 제1세대에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제2세대에게는 그런 대로 좋은 운동이었고, 제 3세계에 와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운동으로 전락했다고 걱정하고 있다.

  또한, 포르마는 『기로에 서있는 하나님의 성회』에서 은사와 행정 구조에서 나타난 난제들을 지적하면서 오순절 운동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으며, 스피틀러(Russell P. Spittler)도 오순절운동의 정체성과 성장 둔화 현상 속에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철하게 우리의 모습을 진단하여, 21세기에서도 계속하여 성령께 쓰여 지는 도구로써의 오순절운동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오순절 운동이 승리주의 또는 우월 의식에 도취해 있다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특정 교리나 전통이 다른 교파의 것들보다 우수하다는 승리주의(triumphalism)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사용하고 있다는 우월주의에 도취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순절파 사람들은 지금 급속한 성장률과 상승일로를 걷고 있는 교단의 영향력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위험이 있다. 이러한 의식은 자신의 실체인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여” 결국에는 옛날의 몬타니스주의와 같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2) 성령의 내적 충만의 결여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의 성품에 참여”(벧후 1:4)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의 이루고”(갈 4:19) "온전한 사람“(엡 4:13)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오순절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내적 충만이 결여되어, 성령과의 교제와 내적 변화를 통하여 ”절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요 15:4; 갈 5:22), 오히려 육체의 현저한 모습들만 나타내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 능력 있는 사역은 감당하면서도 인격적인 모습에서는 성령에 충만한 신령한 자의 특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온갖 추태와 역겨운 냄새만 풍기고 있다.

  세상적인 성공과 부요의 상징처럼 보이던, 텔베비젼 짐 베이커(Jim Bakker)와 지미 스와가트의 몰락은 오순절 운동에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3) 신학적, 교리적 정체성 확립에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는 정말 좋은 신학적 바탕과 신앙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너무나 경험 중심의 사역을 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9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렇다할 신학 서적이 없고, 교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리적 혼선이 자주 일어나고, 한국에서는 AG가 마치 웨슬리안 오순절파와 같은 신학 노선을 가진 것처럼 인식하여 활동하고, 알미니아주의를 따르는지, 칼빈주의를 따르는지 모를 정도로 애매하게 행동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신학교 교수들마다, 그리고 각 교회의 목회자들마다 자신들이 배운 대로 각각의 신학과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자기 정체성도 모르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귀동냥을 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4) 사역 성령론의 부재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아 신비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불로, 불로, 충만, 충만”만 외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을지, 그 구체적인 성령의 은사 개발, 사역 속에서 적용하는 방법,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방법, 성령의 세례를 체험하게 하는 사역…등등을 개발하여 훈련시켜야 했다.


  5) 샤머니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많이 깔려있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종교에는 자연적으로 샤머니즘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샤머니즘은 주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형태를 가르친다. 신앙에는 신비주의적인 체험적 요소가 있다. 기독교에도, 특히 성령운동에는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비적인 성령의 체험이 아니라, 무속 화 되어 가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 무속에서 무당이 하는 역할을 잠시 생각해 보면,

먼저는 무당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이 미신적이고 주술적이지만, 그 나름대로는 사람들의 갈등과 불안을 해소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점, 푸닥거리, 살풀이, 그리고 굿에서 무당이 주로 하는 일은 신과 인간 사이에 서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 주고, 인간이 바라는 것을 신에게 도움을 주도록 신의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둘째는, 무당은 사람들에게 신의 암시를 전해준다. 왜 병이 걸렸고, 불행이 일어났는지를 알려 주고,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칼로 찌르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 병이 언제쯤 나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셋째는, 카타르시스(catharsis)의 효과를 노린다.

  넷째는, 조상에 대한 공포를 제거해 준다.

  다섯째는, 무당은 카운슬러 역할도 하고, 괴로워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도 한다. 여러 가지 난처한 문제, 괴로운 문제를 상의할 때에 좋은 말로 설득해 주고, 조언해 주며, 함께 울면서 괴로움을 달래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사에게서도 무당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를 가지고 와서는 말을 하지 않고 무조건 기도를 받아서, 목사가 알아 맞추기를 바란다. 이 사상을 무격관에서 찾아야 한다. 무격은 신명을 부리고 봉사하는 동시에 이를 사역하고, 악력을 쫓아 질병과 재난을 소산하고, 길흉을 점복하며, 그 치유책을 강구, 예언하는 자인데, 그런 기능을 목사에게서 기대한다.


  우리가 무속적 요소를 배제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속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역기능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자기를 통찰하는 자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개인의 책임의식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속 사회에서는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정신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순수한 성령운동을 변질시킬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에, 가나안 종교와 혼합주의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서 경계하셨다(신 6:13-15, 7:4-5, 25-26).

  그러나 백성들은 바알 신에게 미혹되어 여호와를 떠나고(호 4:12-14),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서, 결국 “뒤집지 않은 전병”(호 7:8)처럼 온전치 못한 신앙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그들을 버리시고, 그들을 패망케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성령의 사역을 매수하려고 하고 오도시키려고 하자, 단호하게 물리쳤던 것을 볼 수 있다(행 8:17-24).

  우리도 순수한 오순절운동을 바르게 전개하기 위하여서는 비성경적인 모든 무속적 요소들을 배제시키고 정화시키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6) 오순절 사역이 의식화, 제도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순절 예배 의식에서도 이러한 현상들이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보편적으로 미국 AG의 예배의 구성 내용은 찬양과 경배, 방언과 예언, 회심을 위한 제단으로의 부름, 치유와 일반적 필요를 위한 기도, 간증, 설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예배 의식을 통하여 오순절 경험을 하는 것을 반복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가면서 내면적인 깊이는 없이 상징적이고 형식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Margaret M. Poloma는 AG의 예배는 지나친 감정주의에 빠지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1940년대 동안 더욱 형식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3. 21세기를 맞이하는 오순절 운동의 과제는 무엇인가?


  1) 개혁복음주의 오순절 신학에 대한 정체성을 찾고, 그 긍지와 자부심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AG의 신학은 가장 성경적이며,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노선의 신학적 바탕 위에 오순절 신앙을 덧입으므로, 더 이상 나무랄 대가 없는 가장 좋고, 이상적인 신학과 신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을 체계화시키고, 더욱 연구 발전시켜서, 사역자와 교인들에게 가르쳐서 긍지를 갖게 만들어 주고, 이 신앙을 확산시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성령 충만한 성도들로서 신앙 인격이 그리스도 화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다.

  박종화 목사는 “성도들이 생활 속의 예언자로 활동하지 못하는 것과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며, “생활 속의 거듭남, 즉 종교개혁 및 갱신운동이 한국교회에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기독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상은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성령의 내적 충만」을 통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 및 일치를 통하여, “저절로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요 15:4) 만들어 주고, 주님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천국 백성의 삶의 원리를 터득하게 하여 실천하게 해야 한다.

  또한, 철저한 제자의 삶(눅 14:26-27, 33-35)을 살게 하며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기”(벧후 1:4-8) 위하여, 날마다 경건의 연습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의 신자들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행 6:3, 2:47)이 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3) 성령 사역론을 개발하여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Wagner는 “16세기 혁신적인 변화는 주로 신학적이었으나, 현재의 개혁은 신앙의 개혁이 아니라 실천의 개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과 신앙의 개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다. 즉 사역 방법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에디 깁스(Eddie Gibbs)는 『Next Church』에서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9가지의 방향 전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과거 회귀에서 현실 참여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는, 마케팅 모티브에서 선교 적 모티브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는, 관료적 계층 구조에서 사도 적 네트워크(Network)로 전환해야 한다.

  관료적이며 계층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 지도력으로는 더 이상 교회를 이끌어 갈 수가 없다. 초대교회와 같이 사도 적이면서 관계 협력을 중시하는 지도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넷째는, 집단적 가르침에서 개인적 멘토링(Mentoring)으로 전환해야 한다.

  신학교의 강의실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신학 교육은 현실의 목회 상황에 적용할 수 없어서 자질이 없는 지도자를 양산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비전을 다함께 성취하도록 사람들을 지시할 줄 아는 영적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다섯째는, 대중적 설교자에서 내면적 영성가로 변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뜻대로 영적 감동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대중문화 속에서 삶의 의미와 의의, 만족감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실제적이고 풍성한 체험을 통하여 개인의 삶이 거룩해지고 세상에 봉사하는 열정을 갖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여섯째는, 보는 예배에서 느끼는 예배로 변화되어야 한다.

  예배가 관객 위주의 공연으로 전락하게 되면, 교회가 세상의 문화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새로운 공연을 찾아서 교회를 떠나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교회 출석까지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예배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거부하는 세속적인 영향 때문에 예배의 능력을 손상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가 사람들로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게 하거나 신학과 성경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과 성스러움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해야 한다. 바로 성령으로 가득 찬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훌륭한 자극제가 된다.

  일곱째는, 기다리는 전도에서 찾아가는 전도로 전환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서…제자를 삼는”(마 28:19) 사역을 위하여 찾아가야 한다. 교회는 초청하는 전략에서 탈피하여 침투하고, 전복시키고, 변화시키는 예수의 임재를 드러내야 한다.

  여덟째는, 수동적 교인에서 활동적 교인으로 바뀌어야 한다.

  듣기만 하는 교인들을 이제는 생활 속에서 이웃 불신자들과 관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아홉째는, 닫힌 공동체에서 열린 공동체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는 어쩔 수 없는 공동체적 존재다. 그러므로 서로 갈등과 분열로 치닫게 하는 제도화되고 프로그램화된 공동체에서 이제는 변화되어 서로 삶을 나누고, 서로 기도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구별되고, 함께 사역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에디 깁스(Ediie Gibbs)가 제시한 것은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요소보다는 전부 사역의 변화, 개혁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운동은 이제 성령 사역 론을 개발하여야 한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말씀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개혁이었다면, 21세기는 사역을 평신도들에게 돌려주는 개혁이 일어나서 평신도 지도력 개발에 힘써야 한다.


  4) 사회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베이비 버스터 세대 혹은 X세대, 한국에서는 주로 N(Net Generation)세대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하여서는 사역의 새로운 전환이 있어야 한다.

  N세대는 변화를 원하고 기존의 구태의연하고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갱신을 추구하면서, 젊은 세대가 갖는 갱신의 방향과 접촉점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그들의 문화에 흡수되거나 반대로 분리되어 존재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문화와 역동적인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침투하고, 전복시키고, 변화시켜서 그들 속에 예수의 임재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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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8.15 22:27

    첫댓글 이런 글을 발견하여서 소개합니다.
    객관적인 분별을 하는 토론을 원하며,
    좀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말은 사절합니다.

    기적 추구 신앙은 그리 쉽게 말로 해결될 건은 아니지만
    이 현상은 막을 수 없는 현대교회의 현상입니다.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내적 신앙에서
    실제적이며 신적 능력이 나타나는 외적 신앙의 현상인데
    그렇다면 이들이 내적 신앙을 무시하느냐,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브라질 선교를 와보니 세대주의적인 목사들은 선교사에게 접근하여
    돈을 얻기를 바라는 태도인데
    오순절,은사주의 목사들은 영적 성령 충만을 더 중시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현대 교회 신앙인들의 현상을 알아보는 차원에서 대화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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