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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 사는 형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삼촌, 더운 날씨에 농사일 너무 많이 하지 마래이. 땡볕에 오래 일하모 큰일 난대이.” 덕동에 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정홍아, 우찌 지내노? 이리 더운데도 밭에 나가서 일하나? 먹고사는 거 별거 아이다. 하루 세끼 밥 안 굶고 살모 안 되나. 나이 생각해 가믄서 살살 일해라야.”
서정홍 시인
산골 농부로 살다 보니 걱정해 주는 사람이 참 많다. 가뭄이 들 때에도, 물난리가 날 때에도, 농산물 값이 떨어졌다는 뉴스가 나올 때에도, 때때로 전화나 문자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살맛이 난다. 한국 속담에 “걱정이 반찬이면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다 일어나는 걱정이 아니라, 남을 위해 걱정하다가 상다리가 부러지면 어떠랴. 남의 일(농부)을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여기, 황매산 자락에 뿌리내리고 산다, 나는.
2005년 2월2일, 국가에서 농부로 인정하는 ‘농지원부’가 나오던 날! 그날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뜻깊은 날이었다. 이웃을 모르고 사는 게 더 편한 도시에서 약삭빠르게 자리 지키며 살다가 뒤늦게나마 마흔 중턱에 산골 농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난 걸 먹고 살다가, 흙이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마음 설렜겠는가.
그날, 그 기쁨과 설렘을 잊지 않으려고 이 글을 쓴다. 16년 동안 농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걱정해 준 사람들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한 식구처럼 살 수 있는 작은 산골 마을에 빈집과 논밭을 알아봐 준 정상평님, 작은 흙집을 짓다가 건축 자재 값이 없어 허덕일 때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힘을 보태 준 사람들, 때때로 새참을 손수 만들어 주신 마을 할머니들, 여섯 달 넘도록 돈 한 푼 받지 않고 흙집을 같이 지어 준 김성환 선생, 농사지으려면 거름이 필요하다며 밤 10시가 넘어서 큰 트럭에 소거름을 싣고 찾아온 강기갑 선배, 농촌에 정착하려면 이래저래 생각지도 않게 돈이 들어간다며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와 정착금을 주고 간 가톨릭농민회 김성호 선배, 농기구 사는 데 보태라며 봉투 하나를 슬쩍 놓고 간 자동차 정비공인 친구 정종철, 농약과 화학비료에 병든 땅을 살리는 ‘생명농업’을 해 보겠다고 큰소리치다가 벌레 먹고 볼품없는 농산물을 거두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사 준 사람들, 감자든 양파든 농산물을 받을 때마다 농사짓느라 애썼다고 택배비에 식구들 밥값까지 얹어서 돈을 부쳐 주는 사람, 한 달 뒤에 농산물을 거둘 것이라는 문자를 보내고 나면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기저기 주문을 받아 주는 사람, 산골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강아지똥학교’와 청소년을 위해 만든 ‘담쟁이인문학교’를 열 때마다 이름 밝히지 않고 기부해 준 사람, 지난해 코로나19로 온 지구촌이 불안하고 어려운 때 영농조합법인 공장을 지을 터를 사 주고 건축비를 후원해 준 사람들, ‘오래된 미래’인 농부를 아껴 주는 그 사람들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어찌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으랴. 다만 여기, 작은 산골 마을에서, 길을 찾아가는 청년 농부들과 하루하루 웃음을 잃지 않고 살면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농부 한 사람 살리려면 백 사람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백 사람 가운데 기꺼이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