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은 ‘친환경’ 경영을 할까? 국내 주요 병원 조사해보니…
국내 의료기관의 친환경 경영 실태
친환경 경영에 적극적인 주요 대학병원들. 차례대로 삼성서울병원, 고대안암병원, 한림대성심병원./사진=삼성서울병원, 고대안암병원, 한림대성심병원 제공
환경오염을 최소화하고(E),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S),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유지(G)해야 한다는 ‘ESG’에 의료기관도 참여하는 추세다. 그러나 명확한 평가 기준과 규제가 있는 일반 산업계와 달리, 의료기관은 관련 기준이나 규제가 미비하다. 의료기관의 ESG,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걸까?
티끌 모아 태산,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헬스조선 자체 조사 결과, 현재 국내 주요 대학병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친환경 행보는 다음과 같다. “시행 중인 친환경 캠페인이 없다”고 말하거나, 회신주지 않은 대학병원도 있었다.
▶고대의료원= 올해 2월, 국내 의료기관 중 최초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ESG 보고서)를 발간했다. 산업계에 통용되는 다양한 ESG 평가표를 참고해 의료기관에 특화된 ESG 평가 지표를 개발하기도 했다. 환경성 질환, 대기오염과 건강 영향 간 상관성 등 기후위기가 유발할 수 있는 질환을 연구 중이다. ▲잔반 줄이기 ▲여름철 실내 온도 26℃ 유지 ▲영양팀에서 쓰는 비닐봉투 친환경 봉투로 교체 ▲의료폐기물 분리배출 사업 재개를 통해 전기 사용량과 의료폐기물 발생량을 줄이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지난달, 국내 의료기관으로서는 두 번째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했다. ▲실내 적정온도 26℃ 유지 ▲점심시간 사무실 50% 소등 ▲계단 이용 생활화 등의 활동으로 2022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전년 대비 2.6% 감축했다. 폐린넨을 재활용해 만든 유기견 이불, 곰 인형, 파우치를 가족. 보호자. 유기견 센터에 배부하기도 했다.
▶서울아산병원=2021년 5월 국내 병원 최초로 ESG 위원회를 설립했다. 일회용 진료재료 분리수거 활동, 분리수거함 설치를 통해 병원 발생 의료폐기물의 양을 줄이고 있다. 서울시 협약을 통해 전기차 충전시설도 설치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서울시와 온실가스 총량제 업무 협약을 맺기도 했다. 건물을 용도에 따라 12개 유형으로 분류하고, 유형별로 단위면적당 온실가스 표준배출 기준을 설정해 준수하도록 하는 제도다.
▶한림대의료원=의료원 산하 병원 5곳 중 4곳에선 태양광 발전설비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이 설비를 통해 올 상반기 108,853kwh의 전기사용량을 절감했다. 이외에도 2022년 환경부 주관 ‘감염 우려 의료폐기물 처리 기술개발사업’의 하나로 관련 업체와 병원 맞춤형 의료폐기물 멸균분쇄 시스템을 개발하는 중이다. 멸균하지 않고 소각할 때 발생하는 탄소배출량 유해물질을 줄이기 위함이다.
▶아주대병원= ▲냉난방 온도 1℃ 낮추기 운동 ▲노후설비, LED등 교체 ▲컬러 대신 흑백 인쇄 ▲종이 사용 없는 의료·행정 환경 조성 ▲미사용 전자제품 콘센트 뽑기 등을 시행해 2022년 전년도 대비 에너지 사용량을 1.5% 절감했다. 토양이나 하수 처리 시스템에 섞여 들어가도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살균제인 액상 플라즈마를 개발 중이다. 이외에도 폐기물 처리 기준을 만들어 핵의학과의 실험실 의료폐기물 37.5%, 혈액 의료폐기물 7.5%, 주사실·분배실 의료폐기물 31.45%을 감축했다.
‘태양광 발전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사업이 있는가 하면, ‘잔반 줄이기’ ‘종이 아끼기’ ‘냉방 온도 낮추기’ 등 사소한 행동도 많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잔반을 줄이거나 종이를 아낀다고 환경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까? ESG를 제대로 한다고 말하려면 뭔가 큰 ‘한 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ESG협회 이사장인 행정전문대학원 교수는 “ESG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병원에서 발생하는 탄소량을 줄이는 모든 행보가 ESG, 그 중에서도 E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교수는 “직원들이 개인 차량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것, 환자들이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도록 셔틀버스를 제공하는 것도 다 ESG”라며 “잔반 줄이기, 종이 사용량 줄이기, 옥상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화장실 용수로 쓰기는 지나치게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ESG를 실천하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이라고 말했다. ESG는 결국 티끌 모아 태산이다. 의료기기나 사무용품 등 병원 비품을 구매할 때도 조금이나마 더 친환경적으로 생산되고 작동하는 걸 골라야 한다.
반짝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ESG 관리 체계’ ‘전담 인력’ 필요
ESG든 친환경이든 중요한 건 ‘지속가능성’이다. 2014~2015년 ‘친환경 병원’이란 단어가 기사에 자주 오르내릴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새 관심이 사그라졌다가 최근 들어서야 ‘ESG’란 이름으로 다시 주목받게 됐다. 기후위기가 본격화되며, 소비자와 산업계 전반이 ESG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그 계기다. 대학병원에 시작된 친환경 바람도 이번엔 오래갈 수 있을까. 수십년간 병원 물류·운영관리 전문가로 활동해온 지영호 물류학 박사는 “과거에도 병원에서 친환경을 했었지만, 그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 ESG 열풍이 유행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병원에서 ‘탄소배출량’과 ‘의료폐기물’을 핵심 관리 대상으로 설정하고 친환경 노력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SG 성과를 기록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이제 기업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또 다른 재무제표가 됐다. 그렇다면 대학병원도 종이를 아끼는 것만으로 ESG가 달성됐다 속단할 수 없다. 재무제표를 작성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고대의료원이 국내 의료기관 최초로 개발한 ‘의료기관 최적화 ESG 관리 지표’엔 환경 관련 지표가 5개 제시된다. ▲환경정책 및 규정(가중치 3%) ▲온실가스 목표대비 감축률(2%) ▲재생에너지 사용비율(1%) ▲용수 재활용률(2%) ▲폐기물 재활용률(2%)이다.
친환경 행보를 결정할 세부 방침이 있는지 연 1회 이상 확인하라는 ‘환경정책 및 규정’의 가중치가 가장 높다. 고대의료원 사회공헌사업팀 김석만 팀장은 “병원이 감염 관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데 감염 관리 기준이나 감염 관리 전담 인력이 없을 순 없다”며 “ESG를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면 전담팀을 두고 ESG 추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전담 부서가 있는 병원이 아직은 많지 않다. 작년 10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국제의료사업을 추진 중인 국내 의료기관 1769개소를 대상으로 ESG 담당자 유무를 조사한 결과, 겸업을 포함했음에도 전체의 45%에만 담당자가 있었다.
규제 때문에 하기보단,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친환경 도입을 촉구하는 데 규제가 마중물 역할을 할 수는 있다. 많은 대학병원에서 ESG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덴 분명 ‘ESG 규제가 도입될 것이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지난해 대표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상급종합병원 지정 기준과 의료기관 인증기준에 ESG 관련 항목을 넣는 것이 골자다. 이외에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작년 말 ‘의료기관 ESG 활동 모델 개발’에 관한 연구용역 입찰공고를 냈으며, 낙찰을 받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올해 5월 관련 보고서를 제출했다. 의료기관으로서는 ESG 관련 규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석만 팀장은 “병원 수입은 보험 수가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ESG 기준을 만족하지 못해 상급종합병원에서 탈락하면 크게는 몇백 억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하고, 중소형 전문병원은 보건복지부 인증을 받지 못하는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정부가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한 ESG 기준을 도입하려는 밑작업이 보인다면 병원은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규제만이 답은 아니다. 규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친환경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김정학 교수는 “상급종합병원 지정 기준에 ESG 관련 항목을 포함시키면 대형병원은 항상 에어컨 온도를 28도로 유지하는 등 행정적 조치로 어떻게든 그 기준을 맞출 것”이라며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만 하고 말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기준이 별 효과가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친환경은 비용이 많이 든다. 같은 제품이어도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만든 물품은 일반 물품보다 값이 비싸다. 김정학 교수는 “의료기관의 현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무작정 강한 ESG 규제를 신설하면, 규제를 받아들이는 쪽에서 ‘정부에서 예산을 줘야 할 수 있다’ ‘의료 수가를 올려줘야 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며 “그럼 정부에선 의료기관과의 논의 끝에 기존 상급종합병원들이 무리 없이 달성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게 되고, 결국 규제라는 것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가장 좋은 건 병원들이 자발적으로 ESG에 참여해, ESG 실천 노하우를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해 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ESG 잘 하는 병원’이라는 것이 환자들의 병원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셀링 포인트가 돼야 한다. ESG가 중요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 잡아야 가능한 일이다. 김 교수는 “공공부문과 언론에서 ESG 잘 하는 병원을 계속 조명해나가고, 칭찬해야 한다”며 “병원들은 본인이 달성한 ESG 성과를 병원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표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목표를 달성할 역량이 있는 조직’임을 보이고, 성과를 자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ESG 관련 협회들도 활성화돼야 한다. 어떤 병원이 ESG를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인증하고, 소비자가 병원을 선택할 때 판단 근거로 삼을 만한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