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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양심: 원인 모를 불안 해결법
오늘 예수님은 세상 것들은 예표를 보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면서도 인간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작은 잘못이 쌓이는데도 자기 잘못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을 벌이고야 만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미쳐서 큰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어뜨리듯이 큰 잘못도 다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점점 나빠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왜 알아채지 못할까요?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느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 살 것이지만 작은 변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개구리에게 온도를 느끼는 피부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분명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많은 계기판이 있습니다. 연료게이지도 있고 알피엠, 또 속도게이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보는 것은 속도게이지입니다.
다른 것들은 가끔만 보면 됩니다.
그러나 연료게이지만 보다가는 속도에 무감각해져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 주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도 우리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이 세상에서부터 심판해 주는 우리를 ‘고소한 자’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말하자면 구형을 때리는 검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검찰과 협의가 이뤄지면 재판은 하나마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를 고소하는 검찰이 누구일까요?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기준은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과 같습니다.
그 심판기준은 그분의 계명입니다.
곧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은 이웃 사랑의 계명과 어긋날 때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확증 받게 됩니다.
얼마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을 만났습니다.
70세가 넘어서 처음으로 가신 것입니다.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처음엔 몸도 아프고 40년 이상 껴 온 반지는 물론 많은 물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이 길에서 버리게 되는 것은 결국 ‘불안’이라고 합니다.
가장 혼자가 되는 시간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지만, 나중에는 이 길이 끝나는 게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진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나눔’입니다.
산티아고 성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무언가 쓸모없는 것까지 지고 가는 게 무겁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숙소마다 그곳에 자고 간 이들이 필요 없는 물건들을 두고 간 것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스님은 빈손으로 와서 버리고 간 물건들만 사용하며 끝까지 완주하였다고 합니다.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의 목적지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그럴 때 양심에서 불안한 감정을 내보냅니다.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양심의 문제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고 유의배 신부의 방 안에 붙여논 글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12,54-59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 구절 중에 ‘은총의 독방’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방은 아파트 안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 대상자가 쓰는 독방입니다.
독방! 하니 세상 편하겠네, 생각하시지만,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그냥 독방이 아니라 은총의 독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그분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셨던 분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 안에 살아가니,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천국을 사셨던 분입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분...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부단히 초대 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런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그냥 수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벽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빡센 하루 일과를 보낸 지금, 별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하루였음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소 4,1-6 루카 12,54-59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4-56)”
이 말씀은, 자연현상을 풀이하는 일은 잘하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은 왜 모르느냐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시대’는 ‘메시아 시대’와 ‘종말’을 뜻하고, 동시에 ‘회개해야 할 때’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안다고 잘난 체 하면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정말로 실천해야 할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 13,1).”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8-9)”
실제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성서학과 신학을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서학과 신학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으로 그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성서학과 신학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앞의 10장에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5ㄴ-28)”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네가 알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과 율법과 신학과 이스라엘 역사 등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영원한 생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죽은 지식’이 될 뿐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여기서 ‘올바른 일’은 ‘회개’를 뜻하고, ‘판단’은 ‘실천’을 뜻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능동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고소한 자’는 하느님으로 해석됩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재판관이신 분이시고, 동시에 죄인들을 기소하는 검사이신 분입니다.)
‘고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5-46).”
이 말씀에서 ‘모세’는 모세가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의 ‘고소한 자’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의 ‘양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소한 자와 ‘합의’를 본다는 말은 회개를 뜻합니다.
‘도중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입니다.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여행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고소당해서 재판관에게 끌려가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거나 의식하지도 않으면서 살겠지만......)
어떻든 회개는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행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지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지 않고 회개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회개해서 살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보속을 완전히 마칠 때까지 연옥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연옥도 지옥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끝난 곳, 보속을 할 수도 없는 곳, 희망이 전혀 없는 곳, 완전한 절망과 후회만 있는 곳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